쪽빛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지중해 세계에서 빛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빛은 모든 은폐된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 사람들은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도 그 어원은 본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빛이 비칠 때 세계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는 믿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는 스물 여덟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는 심한 혼돈과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 편지에서 기록했다.
그리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근원은 철학”이며, “참된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기까지에는 인류는 고민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플라톤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소크라테스 철학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우리는 난감한 사실에 봉착한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 동일한 소스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플라톤이 쓴 기록을 통해서 읽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35편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철학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인가 하는 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것을 철학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러한 사례는 어찌 소크라테스뿐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논어]도 그렇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한 불교 경전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석가모니 역시 자신들이 직접 책을 쓰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시대를 더 내려오면 신약성경과 코란도 그렇다. 예수도, 무함마드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경전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고대 철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많은 책에서는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위서 논란이 심심하면 터져 나온다.
그들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철인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 바로 플라톤이다. 그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모아서 집대성한 단순 기록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대화편은 플라톤이 30대에서 70대까지 쓴 책들이다.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화체 형식이다. 플라톤이 쓴 일련의 책들을 대화편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통점이 또 있다.
한 편을 제외하면 모든 대화편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편을 통해서 하나의 철학적 동일체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깐! 플라톤의 대화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초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후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플라톤이 젊었을 때 쓴 초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원숙한 나이에 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손 노릇을 했지만, 나중에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철학의 입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가지치기 작업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구분하는 난제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대화체 형식의 책을 썼는가 하는 점을 ‘플라톤의 퍼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조용한 사색의 장에서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대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아고라 광장에서, 때로는 푸른 지중해가 한 눈에 보이는 아테네 근처의 바닷가에서, 때로는 지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철학을 문자로 생중계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토론 철학이 가진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대화편은 마치 한 편의 희곡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대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토론을 하는 그때 그곳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잡힌다. 마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대화편이 철학 책으로서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결론 없이 대화를 마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당연하다.
대화편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철학의 역사에서 대화편과 같이 고전적 지위에 우뚝 오른 다른 철학서적,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35권의 대화편은 과제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다양한 여러 주제들이 하나의 책에 뒤섞여 함께 논의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거리에서 철학을 했을까?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 거리 철학을 왜 문자로 생중계했을까? 그 단서는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역설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림으로 기록할 때 그 그림은 죽어있듯이, 살아 있는 말을 문자로 쓸 때 문자로 기록된 말은 죽어있다고 말한다.
문자로 된 말은 질문을 던지지도 질문을 받지도 못한다. 그렇다. 플라톤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전반에 영국 캠브리지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화이트헤드가 만년에 한 강연에서 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플라톤 철학의 요체를 이처럼 적절하게 설명한 말도 드물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 말을 플라톤 철학의 체계가 뛰어나다는 칭송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뛰어난 것은 그의 답안에 있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끝없이 던지는 질문 방식에 있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가 된 이유는 그의 철학 체계보다는 그가 쓴 철학적 발제에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좋은 질문을 던진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맞다. 굳이 저작권 개념으로 따진다면, 문자 중계한 플라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 발언자인 소크라테스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을 기본 포맷한 철학자로 인정받는가?
이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야 한다. 좀 지겹겠지만 할 수 없다. 철학적 동일체를 이룬 스승과 제자의 몸통을 분리하는 수술이 아닌가?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대화법 또는 산파술로 요약되는 질문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가실 정도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주로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 든다.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빠졌음을 깨닫고 우물쭈물한다. 큰 당혹감과 혼돈에 빠져든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주시한다. 옳은 답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해결되지 못하고 끝난 문제 – 이것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출구가 막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길도 진리의 길이 아니고, 저 길도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우리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은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로 돌아가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이었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이미 철학의 관심이 피시스(자연세계)에서 노모스(인간세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모스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떠올랐다.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관심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재판 법정에서 한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했다고 고소장에 씌어있지만 자신은 자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언급한 사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말해달라고도 주문한다. 그렇다고 자연철학자를 경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철학사에서는 그 양자의 차이를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의 격돌로 정리한다. 소피스트는 인간사회의 규범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규범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보편적 진리를 수호한 순교자로 소크라테스를 자리 매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가? 나는 소크라테스를 보편 철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답안을 내놓기보다는 상대 답안의 논리적 허점을 등에처럼 성가시게 물고 늘어져 철학적 대화를 아포리아 상태로 몰고 간 소크라테스 철학이 어떻게 보편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논리적 연결고리만큼은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철학의 정신이 아닌가?
만약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 대화법(엘렌쿠스)은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주의, 또는 진리는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와 더 가깝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 이론이 빛을 발한다. 플라톤 철학이 스승의 몸통에서 분리되는 대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포리아가 출구가 막힌 종착점이 아니라 새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막장에까지 다다르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 아닐까?
스승이 즐겨 사용한 엘렌쿠스로서의 철학은 제자의 이데아 철학의 뒷받침을 얻어 출구에서 탈출한다. 아니, 이 말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모욕이 된다면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통해서야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관계에서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손 노릇을 했지만, 점차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입 노릇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 분기점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 그 때를 기점으로 토론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난다. 아포리아가 해결불능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 점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철학은 아포리아의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철학적 사유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항상 상식적인 사고를 요청하지만 아무도 그 상식에 이의를 달지 않을 때 철학적 사유는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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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플라톤의 철학적 발제|작성자 Laissez Faire |
이데아를 향한 철학의 여정
아테네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항구 피레아스. 에게해에 그림같이 떠 있는 그리스 섬들로 가기 위해서는 보통 여기에서 배를 탄다. 지금은 이곳까지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시내에서부터 걸어다녀야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국가](폴리테이아)는 어느 여름날 소크라테스가 피레아스에서 열린 축제를 구경하고 난 뒤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대화가 시작된다. 책은 두툼하다. 분량으로 보면 플라톤 [대화편] 전체의 5분의 1쯤 될까?
그래서 다른 [대화편]은 한 숨에 죽 읽어내려갈 수 있지만 [국가]는 그럴 수 없다. 시간을 좀 투자해야 한다. 근대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 루소는 이 책을 “인간 교육에 대한 세계 최대의 논문”이라고 잔뜩 추켜 세웠지만 어디 교육 분야뿐이겠는가? 이 책은 오늘날 거의 모든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고전으로 통한다.
플라톤 대화편의 백미로 꼽히는 [국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논의가 풍성하게 펼쳐지는 책이다
철학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이 책이 씌어질 당시는 학문과 철학이 나누어지지 않았던 때였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중심 질문이었던 “올바름(정의)이란 무엇인가” 하는 논의가 이 책에서는 풍성하게 펼쳐진다.
그 논의가 인간 개인에 적용되면 윤리학이 되고, 인간 사회로 확장되면 정치학이 된다.
“철학자 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좀 생뚱맞은 주장이 플라톤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 이론’과 함께 등장하는 곳도 이 책이다. 이데아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도 재미있다.
[국가]는 플라톤의 나이 50세가 넘어서 집필한 책이다. 그가 평생을 두고 존경했던 스승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에서 서서히 벗어나, 그의 독자적 철학이 이 책에서 펼쳐진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또는 ‘소크라테스식 철학하기’에 흥미가 있다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는 것이 좋고, 플라톤이 꿈꾼 철학 왕국에 흥미가 있다면 [국가]를 권한다. 루소처럼 이 책을 호의적으로 읽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철학자 포퍼와 같이 플라톤을 전체주의의 원조격으로 바라본 이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장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그가 서양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크다는 점만큼은 누구나 인정한다. 단순화해서 용감하게 말하면 서양 철학, 더 확장해서 서양 학문의 전통은 플라톤 철학에 기초하고 있거나 또는 플라톤 철학에 반기를 든 철학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류는 플라톤 철학을 지지하는 넒은 의미에서의 플라톤의 제자들이다.
아카데미에서 학자들과 토론 중인 플라톤. 플라톤의 사상은 서양철학 전통의 원류를 이룬다.
우리는 플라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물음은 서양 철학의 전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곧바로 연결된다.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이 발원하는 사실상의 분수령이 된다면, 서양 철학의 물줄기가 어떻게 플라톤에 흘러 들어와서 나갔는가 하는 점을 눈 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학문적 전통이 다 그렇지만, 플라톤 철학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번 우리는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을 살펴보았지만, 플라톤 철학에는 소크라테스 이외의 다른 성분도 들어 있다. 플라톤의 숨겨진 철학적 스승이라고 말해도 좋을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대표적이다.
특히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 되는 이데아 이론이 체계화되는 데에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유난히 많이 남긴 이 두 사람의 고대 자연철학자 역할이 절대적이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해서 감각적 경험은 믿을 수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감각적 경험의 대상은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다 변화한다.
기억하는가? 만물은 변화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헤라클레이토스 편’에서 나는 지식iN에게 물었다. 변화에서 자유로운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가장 많은 답변은 뜻밖에도 변화 자체라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답변을 읽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끝없이 변화하는 만물과 그 변화를 규정하는 역동적 힘으로서의 변화 자체를 구분했다고 흡족하게 생각했을까? 그는 후자, 곧 변화를 지배하는 초월적 실재를 ‘로고스’라고 불렀다.
감각을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니다
참 존재와 참 지식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플라톤은 변화하는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존재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또 그는 같은 이유에서 감각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이 참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참 존재와 참 지식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나 자기 동일성을 가진 참 존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데아는 위 물음에 대한 플라톤의 응답이다.
헤라틀레이토스가 끝없이 변화하는 자연에서 그 변화를 지배하는 요소, 힘 또는 원리로서 로고스라는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중요한 개념을 찾아냈다면, 플라톤은 그 변화하는 모습의 배후에서 변화하지 않는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다.
감각을 통해 얻는 지식은 참이 아니다. 이데아는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등장하는 모든 철학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지만, 로고스와 이데아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로고스는 원래의 말 뜻이 “말”(spoken words)이고, 이데아는 “본다”는 말에서 나온 “모습” 또는 “형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용어에 지금의 철학적 의미가 잔뜩 붙게 된 것은 2,500년 동안 생각이 쌓인 퇴적의 결과로 봐야 한다. 로고스라는 말도 그렇고, 이데아라는 말도 그렇고 우리는 지금 이 용어들을 골치 아픈 철학적 언어로 생각하지만, 원래는 일상 생활에서 쓰는 평범한 말들이었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변화하는 세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변화하는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는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상정한 이데아는 끝없이 변화하는 현실세계 저 너머에 있는 초월적 존재라고 봐야 한다.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비시간적(atemporal)이며,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비공간적(aspatial) 존재다.
잠깐! 그런 존재를 믿어야 하는가? 보지도 듣지도 만질 수도 없다면, 그것이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플라톤은 이데아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고 답한다. 그것은 우리 얼굴에 붙어있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지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지성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누스’(nous)를 번역한 것이다. 지성의 기능은 이데아의 세계를 보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얼굴에 있는 눈이 현상 세계를 보는 것을 기능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원본이다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할 수 있는 지식, 에피스테메
플라톤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를 풀어보면,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사실은 가짜고, 지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원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상식이 아니다.
일반 사람의 상식적인 의견을 전복한다. 의견을 확 뒤집어버리는 것 – 그것을 보통 ‘패러독스’(paradox)라고 부르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철학적 개념이 있다. 패러독스는 의견을 뜻하는 그리스어 ‘독사’(doxa)와 ‘거스른다’는 뜻의 접두어(para)가 결합해서 생긴 말이다. 독사는 불완전한 지식이다.
그것은 육안의 눈을 통해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참 지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할 수 있는 지식이 참 지식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불렀다. 에피스테메는 육안의 눈이 아닌 지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이다.
그것은 지성의 눈으로만 보이는 이데아의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한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보통 안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지식은 단순히 독사이며 그것은 결코 완전한 앎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잠깐!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가이미 살펴본 바 있는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다. 그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철학시에서 독사의 길과 진리(알레테이아)의 길을 이야기했다.
플라톤은 독사를 에피스테메와 대칭시켰지만, 따지고 보면 이 구분법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독사/알레테이아의 구분법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가 이야기의 흐름을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서 슬쩍 빼놓고 온 점이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참 지식(에피스테메)을 인식하는 기관이 지성(nous)이라는 생각도 사실은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이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용어를 차용했을 따름이다. 지성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 – 그것을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이야기하면 ‘존재’가 되고 플라톤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데아’가 된다.
이데아는 감각적 경험의 문 너머 지성의 지각을 통해서 인지되는 참된 세계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또는 플라톤의 이데아는 오로지 지성의 지각을 통해서만 드러나지,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눈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귀로 사물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대상은 오로지 눈이라는 시각 기관에만 열려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청각대상은 오로지 귀라는 청각 기관에 열려 있듯이, 존재는 존재 지각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성에만 오로지 열려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지성의 지각은 존재와 동일하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던진다. “사유는 존재와 동일하다”는 진술로 흔히 변용되어서 전해지는 그의 말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주장 중의 하나다.
인간세계 속 올바른 삶과 자연세계의 근본 원리
플라톤은 이데아를 통해 이상 사회의 설계도를 그렸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시계 바늘을 뒤로 돌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다시 복기하는가? 플라톤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아니다.
반드시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 고대 자연 철학자들의 역설을 통과해야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더 콕 짚어서 이야기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존재론적 측면과 인식론적 측면이 모두 도출되기 때문이다.
더 일반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서양 철학의 양대 기둥이라고 부르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바로 이 대목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경한 철학 용어를 퍼부어서 여러분을 골치 아프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때로는 사유의 깊은 바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퍼렇게 날이 선 개념으로 추상화 작업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때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를 마치 세계의 비밀이나 벗겨내기나 하는 것처럼 지루하게 반복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암호같이 해독불능의 언어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런 일은 대체로 하나의 생각의 틀과 다른 생각의 틀이 충돌하는 전환기에 주로 일어난다.
플라톤이 [국가]를 쓸 당시의 아테네는 지중해 세계의 질서가 크게 요동치던 시기였다. 생각과 생각이 충돌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철학의 관심이 자연세계에서 인간세계로 관심이 이동하면서 무엇이 올바른 삶이며, 무엇이 올바른 정치 체제인가 하는 관심이 크게 고조된 때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세계의 근원과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생각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로 깊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이 시작되는 발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것은, 위와 같이 여러 갈래로 흐르는 생각의 흐름을 하나의 틀로 묶어냈기 때문이다.
그 핵심 개념이 바로 이데아다. 그가 쓴 [국가]에는 그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철학적 깊이와 문학적 향기가 함께 묻어난다.
거기에는 정의가 강자의 이익을 반영한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와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거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상 사회를 향한 설계도를 그린 플라톤, 그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철학적 토대로서의 이데아 이론과 그 기본 개념 틀을 제공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등이 함께 숨을 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데아를 향한 철학의 여정 [Plato] - 플라톤의 철학적 발제 (생활 속의 철학, 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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