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카페에 한번 올렸던 글인데 제가 경솔하게도 지워버렸었고 읽어보지 못하신 분들도 많으실듯해 다시 올려봅니다.
글 3개를 한데 묶어서 양이 좀 많은듯 하지만 분명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저도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며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세상에는 많은 지혜의 글들이 있지만, 우리들이 알고 싶어하는 근원적인 물음인
우리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무엇때문에 존재하고 있는가? 에 대한 답을 주는 글은 흔치가 않습니다.
흔히 이야기들을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을 배우고 경험하기 위해 이 살벌하고 무정한 지구에 왔다고..
그렇지만 왜 무엇때문에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서는 섣불리 설명하지 못합니다.
고대의 지혜라 일컷는 카발라에서는 오래전 부터 그 답을 전하고 있어 한번쯤 접해 보는것이 좋을듯
여겨집니다.
요약해 적다보니 글이 매끄럽지 못해도 무한한 이해심으로 읽어 주시길....
카발라에서는 우리의 현실이 장막에 의해 두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말한다.
1%의 영역과 99%의 영역이다.
1%의 영역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감이 작용하는 물리적 세계를 말하며,
빛의 99%의 영역이란 장막에 의해 가려진 장막너머의 실제로 우리 현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저 장막너머의 더 큰 현실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결과들의
원인은 장막너머에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장막너머의 빛과 접촉함으로서 이곳에서의 혼돈과 무지를 해소 할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왜 99%의 영역에서 튕겨져 나와 이곳에서 외롭고 슬픈 싸움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1.에너지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에너지의 무한한 힘이 있었다.
이 힘은 영원히 채워나가고 시간과 공간과 움직임 너머의 무한속으로 확장되면서 영원과 맞닿아 있었다.
이 에너지의 성질은 끝없이 확장하고 나누고 베푸는 것이었고,
본질과 실체는 무한한 충족, 끝없는 기쁨, 무궁한 깨달음 이었다.
우리가 바라보는것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 그 안에 있었다.
카발라 에서는 이 에너지를 제1원인이라고 한다.
2.그릇
베풀고자 하는 성질을 충족시키기 위해 에너지의 무한한 힘은 자신의 본질을 나누어 줄 수혜자를 창조 하였는데 카발라에서는
이를 그릇이라고 부른다.
에너지가 창조한 그릇은 무엇이든 받고자하는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에너지가 발산하는 온갖 종류의 충족과 기쁨에는 그에 상응하는 그릇의 받고자하는 욕망이 있었다.
베풀고 나누는 무한한 에너지를 제1원인으로 그리고 그릇을 제1결과로 칭하며,
이 그릇은 우리들의 뿌리이며 씨앗이고 기원이고 근원이다.
이 그릇의 창조는 무한세계에서 일어났으며, 빛의 무한한 나눔을 실현하기위해 만들어진 그릇은 빛의 본성을 물려받았다.
비어있는 유리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유리잔이 따뜻해지듯이...빛이 그릇을 계속 채움에 따라 빛의 성질이 그릇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빛의 본성을 물려받음으로서 그릇 안에서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났다.
이것은 창조자의 DNA라 부를만한 그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그릇은 무한한 충족의 수혜자가 아닌 창조자가 되고 싶었고 그 충족을 나누고 싶어했으며 자기 자신의 행복의 원인이
되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릇은 창조자의 유전자를 표현할수 없었기에 이것은 충족되지 못한 외로운 욕망으로 남게 되었다.
3 부끄러움의 빵
부끄러움의 빵이란 자기 힘으로 얻지 않은 행운에 뒤따르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고대 카발라의 숙어 이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베품을 받게 되어 자신의 행운을 미워하는 사람을 가리켜 부끄러움의 빵을
먹었다 라고 표현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릇은 무한세계에서 한가지만 빼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가지란 바로 자기 힘으로 충족감을 느끼고 스스로 그 충족의 원인이 되는 능력이다.
부끄러움의 빵은 그릇이 절대적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가 되엇다.
이러한 상황은 애초에 그릇을 창조할때 밑바탕에 깔려있던 의도나 생각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릇은 그냥 받기만 해서는 늘 불행할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의 빵으로 알려진 그 불쾌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 그릇이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무한세계에는 합일된 빛과 그릇밖에 없었고 창조자인 빛은 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
해결은 이렇게 났다고 전해진다.
그릇은 빛을 받기를 멈추었다.
그릇은 빛을 밀어내고 저항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제 그만"
그 순간 어떤 영적이 폭발이 일어났고 그 반향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그 폭발에 이름을 븥였다.
"빅 뱅"
고대 카발리스트들은 빛을 밀어내는 그릇의 행위를 저항 이라고 불렀다.
그릇이 빛을 채워주려는 것을 저항하는 순간 빛은 물러서서 텅빈 공간을 창조했다.
빛은 스스로를 수축하여 무한 세계안에서 한점 어둠을 창조했다. 무한이 유한을 탄생시키는 순간이다.
밫에 저항함으로서 그릇은 부끄러움의 빵을 제거하는 작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아이가 스스로 걷는법을 배울 수 있도록 아이가 넘어져도 그대로 내버려두는 부모처럼, 빛은 그릇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뒤로 물러났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난 스스로의 힘으로 빛을 만들어 내고 나누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빛은 그릇에게 스스로의 신성한 본성을 진화시켜 나갈 시간과 공간을 내 주었다.
그릇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물리적인 우주이다.
동화 같은 이야기로 보이시나요? 그럴수도 아닐수도....
무한한 욕망은 우리들 그릇의 본성이고, 나누고 베풀고자 하는 성질은 창조자인 빛의 본질입니다.
글을 읽으시는 당신은 어느쪽을 많이 가지고 계시는지....
카발라를 접하다 보면 성서와 많은 연관이 있다는걸 발견한다.
성서 하면 알레르기를 일으킬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글을 쓰는 저 또한 기독교에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며 카발라는
그 성서보다도 연혁이 훨 더 깊다는것...그리고 성서가 표면이라면 카발라는 그 속 깊숙한 아원자층의 지혜를 전하고
있다고 말하는 고대의 카발리스트들의 말을 믿고....진지하게 그 가르침을 접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항상 말하고 있지만...단 한분이라도 이 지혜를 깨우치고 스스로 변화하는 분이 있을수 있다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 보며...
영성은 누가 권하고 떠민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닌...때가 무르익은 그 누군가가 있다면 이 글을 접하고 이것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할수 있기를....
빅뱅이전....하나이던 무한한 그릇이 성질이 다른 두가지 영적 에너지로 나뉘어 졌다.
아담이라 불리는 남성적 힘이 이브라 불리는 여성적 힘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런 다음 둘로 분리된 그것은 다시 무수한 조각들로 산산이 부서졌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은 지금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그 태초의 무한혼의 한 부분이며, 우주 만물은 모두
스스로 빛을 내뿜는 힘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카발라는 말한다.
그릇이 산산조각나는 그 순간..10세피로트는 우주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런 수축을 겪었다.
열개 차원중 여섯이 하나로 접혔는데 이를 통틀어 상부세계라 말하며,남아 있는 네개 차원이 우리의
3차원 우주와 4차원 시공의 선구(?) 라 한다.
생명나무의 10세피로트
이것이 우리들 영혼들이 주는 빵을 마다하고 우리의 고향을 뛰쳐나온 이유라 일컬어 지는
이야기들이다.
수긍을 하든 수긍을 하지 못하든 이것이 만약 진짜 우리의 운명이라면....
이제는 거꾸로 이 장막을 뚫고 다시금 우리 자신을 99%의 영역으로 알려진 상부세계와 연결 시키는
방법을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1. 반응성과 능동성.
카발라에서는 그릇,즉 인류의 모든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며 이를 "반응성"이라 한다.
반응성의 의미는 --결과가 되려함, 창조된 존재가 되려함, 모든것의 지배하에 있으려함, 받으려함-- 이며,
반응성 행동은 인간의 받고자하는 욕망에 바탕하며 이는 무한세계에서 창조된 원초적 욕망인 탐욕,이기심,방종,에고와
우리가 외부 상황에 대해 나타내는 어떤 반응...분노,질투,자만심,자기비하,양심,원한... 등이며
우리 행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의 본질이라 할수 있다.
반면 능동성은 우리가 99%의 영역에서 물려받은 빛, 부끄러움의 빵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시현할 필요가 있는 빛의 4가지 속성--원인이 되려함, 창조자가 되려함, 지배하려함, 베풀려 함-- 이다.
그렇다면 너무도 손쉽게 답이 나온듯 하다.
우리의 사명과 삶의 목적은 다름아닌...반응성 존재에서 능동성 존재로 바뀌는 정신적 변환이다.
카발라에서는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당연히 반응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충동에 저항하라고 이야기 한다.
현금 인출기 앞이나, 교통체증이 심한 도로에서 또는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길게 늘어선 줄 속에서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반응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며, 초조해하거나 성급하게 굴거나 화내지 말라고 이야기 해준다.
그 줄은 당신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며, 반응하지 않을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반응한다면 당신은 그 상황에 지배당하는 것이고 그 상황이 원인이 되고 당신은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그때 그러지 말고 조금만 참을걸...하고 얼마나 많은 후회들을 하고 살아왔는가?
그리고 카발라에서는 그런것에 저항하는것이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저항의 진정한 목적은 당신을
좀 더 빛 가까이 데려 가기 위함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 정도는 아주 쉬워 보이시는가? 그렇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이러한 저항함 에는 보이지 않는 적이 있기 때문이다.
2. 내부의 적.
2000년전, 카발라의 유명한 서 조하르 는 그 적의 정체를 밝혀 놓았으며, 그가 사용하는 다양한 기법과 무기 전술까지
밝혀 놓았으며 그 적은 물리적 세상과 인간 정신에 혼돈을 가져오는 숨은 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적은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걸 알고 있는데도 "어서 그렇게 해" 라고 말하며 또한 우리가 그렇게 해야한다는걸
알고 있는데도 "그렇게 할 필요 없어" 라고 말한다.
제일 나쁜것은 우리가 살면서 반응성 행동을 그만두려 저항할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적에게
교묘하게 설득 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기로 하던 고대 카발리스트들은 그 적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진짜로 실재 한다고...
카발라의 옛 현자들이 밝힌 그의 이름은 영어로 번역하면 사탄(suh-tahn)이다.
이 사탄은 붉은 옷을 입고 갈퀴를 휘두르는 머리에 뿔달린 마귀가 아니다. 그러한 미신은 그의 진정한 목적과 정체를
더더욱 은폐시켜왔으며 그의 진정한 이름은 에고로 움직이는 반응성 행동 을 가리키는 암호명이라 말한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 또한 실제의 남자와 여자가 아닌 음과 양을 상징하는 암호명이라고 카발라는 전한다.
그의 가장 큰 해악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신적 본성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삶의 목적조차도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3. 전장.
이 적과의 오랜 전쟁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대지에서 벌어진다.
카발라는 우리의 생각은 뇌라는 물질에서 오는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며,오히려 뇌는 안테나처럼 신호를 받아서
의식적인 마음에다 다시 전파하는 수신국과 같다 라고 이야기 한다.
카발라는 두 개의 우주 방송국 즉...빛 과 사탄이 우리뇌에 전파를 보내며 마음의 청취자들을 겨냥한 시청률 경쟁을
벌인다고 이야기하며, 그 둘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전해온다.
소리가 크고 명백하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 반응하도록 부추기는 생각은 어떤 것이든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사탄의 생각들은 우리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마음과 에고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반면...어떤 생각이 우리 마음의 후미진 곳으로부터 나와 간신히 들릴 정도로 희미하다면...그것은 빛의 노래이다.
또 갑자기 스치는 직관리라든가 즉흥적인 영감 따위가 떠올랐다면 그것 역시 99%의 영역에서 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비법 은... 사탄의 신호를 차단하고 방송을 꺼버리는 것이지만 적은 그에 대비한
첨단 전략과 무기를 확보하고 있다고 카발라는 말한다.
4. 그들의 무기들.
1) 시간
카발라에서는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이며, 원인과 결과 사이의 거리 라고 정의하며..행동과 반응 사이를 분리하는
거리 라고 이야기 한다.
시간의 환영은 원인과 결과 사이를 벌려 놓는다.
우리 행위와 결과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우리 행동과 그 반향사이에 간격이 생겨난다.
그 사이에 사람이 자신의 부정적 반응들이 몰지각함을 깨닫고 정신적 성장과 긍정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은 능동적 행위가
주는 보상을 알아차리기을 바랄뿐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러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부정적 습관을 바꾸는 일과 정신의 사다리를 오르는 일에 관한한 자유의지 라는 신적 특성을 부여 받았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인간은 반응하는 즉시 벌을 받을것이고, 긍정적 행동을 할때 마다 보상 역시 즉각적으로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이 보상받지 못하고 악도 응징되지 않은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카발라에서는 말한다.
우리는 30년 전에 부정적인 씨앗 하나를 심고서 그것이 싹 틔울쯤은 그 씨앗에 대해 까맣게 잊어 버리고 만다.
결국 거대한 나무 하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일이 생기며, 우리의 삶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고야 만다.
카발라에서는 말한다.
그 무엇도 우연히 생기는 법은 없다 라고...
모든 것은 과거 어느 때인가 심은 씨앗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만 시간이 우리로 하여금 원인이 되는 애초의 행동을
잊게 만들었을 뿐 이라고....
누구나 자신의 크고 작은 부정적인 행동들의 결과를 미래 어느 시점에선가 맞게 되어 있으며, 몇달이 걸릴수도,,,
몇해 또는 수십해가 걸릴수도 몇 생이 걸릴수도 있다고 카발라에서는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다.
부정적 행동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긍정적 행동을 취할때도 적은 우리의 성취를 망가뜨리기 위해 시간을 무기로 맞선다.
이는 우리에게 내릴 빛 또한 지연될수 있다는 것이며...죄와 벌 사이를 벌려 놓듯이 시간은 저항과 보상 사이도 벌려 놓는다.
그것에 조바심을 느끼고, 회의를 느낀다면 우리는 지게 되는것이라고 그들 카발라는 이야기 한다.
2). 자기만족.
카발라에 따르면...
영성은 산에 올라가 신 또는 자연과 교감하거나 맑은 냇가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새들의 지저귐에 둘러싸여
명상에 잠기는 따위의 그런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반응성 행위를 일으키는 방아쇠들과 맞서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으며, 혼란과 고난과 분란과 수고로움의 세계로
들어 왔다.
그 방아쇠들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자신의 반응성 행태를 변화시켜 자기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변환...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창조의 퍼즐을 재조립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삶에서 우리가 빛을 더 얻게 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지닌 긍정적인 특성들이 아니다.
각자가 가진 훌륭한 개성과 사랑스러운 면모들은 우리 삶에 새로운 차원의 충족과 빛을 가져오는데 사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들은 이미 능동성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우리들 각자의 부정적 개성과 특성들은 우리 인격의 진정한 변화를 꾀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주변의 세상과 우리 자신 안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창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긍정적인 변화는 저항과 갈등과 장애물들에 부딪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어려운 상황들을 끌어 안아야 한다.
평온하게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아야 한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진정 그런 것이었을까?
현재에서의 자기만족...그러나 이런것들은 우리 적의 무기가 될수도 있으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가 자신의 삶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걸 깨닫게 될때는 이미 때가 늦다는걸 알아야 하며
더 나쁜것은 어떤 사람은 자기가 공허한 삶을 살았다는걸 깨닫지도 못하고 무덤까지 간다는 것이다.
3), 위장술.
적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무기중 하나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재주이며, 우리는 슬프고 어리둥절해지고 질투가 나서
우리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도 도무지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신을 화나게 하고 분노케하며 좌절시키는 진짜 적은 내 앞에서 나와 다투고 있는 내 이웃도 아니며 부패한 사회시스템도
아니라는 것이다.
카발라에서 전하는 놀라운 사실은...
어느날....누군가 당신을 부당하게 대할때, 그 사람이 당신을 그렇게 대하는것은 당신이 당신 삶의 어떤 부문에선가 저질렀던
부정적인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발라에서는 말한다.
절대로, 정말로 절대로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사건들 탓으로 돌리지 말라.....라고 이야기 한다
카발라 에서는 이 원칙의 실천을 돕는 아주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기술 하나를 제시 한다.
언제든지 누가 당신에게 정말로 좋지 않게 행동하면...적이 그 사람의 귀에 속삭이고 있는게 실제로 보인다고 상상하라.
그래서 그 모든 부정적인 행동이 나오는 것이라고 상상하라.
당신앞에 있는 그 사람을 완전히 적의 손아귀 아래 놀아나는 불쌍한 꼭두각시로 보라. 적이 범인이라는 걸 알아차려라.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증오와 갈등의 불길을 부채질 하면서 둘 다를 비웃고 있을 적의 모습을 상상 하라.
그러한 영적 작업이 진핻되면....적이 당신의 귀에도 속싹이고 있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당신이 남에게서 부정적인 특성들을 알아보고 그것들에 대해 반응 할수 있는것은 당신 스스로 그러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반응성 충동이 이끌어 내는 쾌락 에너지에 저항하려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지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어떤 것이 우리가 저항하지 않도록 설득하려 들때만 생겨난다.
그 설득속에 적이 노리는 바와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숨어 있다.
카발라는 말한다.
우리의 반응성 충동들에 대한 저항은 빛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낸다.
반면 반응성 행위는 강렬한 빛의 번쩍임을 만들어 내지만, 나중에는 결국 어둠을 남기게 된다.
카발라 에서는 감정을 억제하는 것과 반응성기제를 차단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있다고 말한다
감정의 억제는 장기적 스트레스 를 가져와 그 압력이 쌓이면 결국 폭발하지만
누군가 우리를 화나게 했을때 자신이 평소 해오던대로 무분별하게 반응하는 대신 진정으로 저항한다면, 우리 가슴에
감정의 앙금이나 원한 따위도 남지 않으며 수모당한 느낌이나 상처 받았다는 느낌도 없다 라고 말한다
화나 그 밖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단지 우리가 부끄러움의 빵을 제거할수 있도록 빛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시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때 우리는 자신이 저항을 제대로 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며, 그럴때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행위로부터 생겨난 빛의 광채를 느낄것이며, 또한 알게 될것이다.
장애물이 주는 기쁨---클수록 좋다.
장애물은 우리가 빛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다. 장애물이 많을수록 우리는 빛과 접속할 기회가 많아진다.
장애물이 많을수록 우리를 많이 자극할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저항하여 변화를 꾀할 수 있다.
많을수록 신나는 일....변화가 우리 삶의 목적일진대 오직 장애물만이 우리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저항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받게 되는 빛의 크기 또한 결정된다.
카발라는 말한다.
장애물이 클수록 잠재되어 있는 빛도 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 되도록이면 순응하려 한다. 가능한 쉽고 안락한 상황을 찾는다.
그러나 편안하게 머물러서는 빛을 계속해서 발생 시킬수 없다.
우리는 편안한 곳으로부터 도망쳐 불편한 상황으로 머리를 쳐박고 뛰어드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큰 저항을 발휘할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며, 그것들이야 말로 영적 발전을 위한 진정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티쿤의 법칙.
동양의 여러 정신적 전통들과 맥을 같이하는 카발라는 우리 각자가 지난 생애로부터 물려받은 짐을 갖고 이 세상에 온다고
가르친다.
이 짐 속에는 우리가 전생 또는 금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반응성 행위로 "누전" 시킨 모든 상황이 들어 있다.
우리가 자신의 반응성 행위에 저항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미래 어느 시점에선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이 바로 잡음 을 티쿤 이라고 한다.
우리는 돈이나 사람 건강 우정 인간 관계 등에서 이러한 티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개인적 티쿤을 알아보는 방법은....우리를 불편케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티쿤의 일부라고 카발라는 말한다.
우리가 자신의 반응성 행위에 저항하여 어떤 문제를 바로 잡는데 실패한다면...다음번에 그와 같은 종류의 문제가 일어날때는
그것을 바로잡기가 더욱 힘들어 진다.
그러한 특정 상황에 반응하는 성질은 더욱 강해지며, 그만큼 우리의 적도 더 강해 진다는 이야기 이다.
그리고 그 다음번 이란 것이 반드시 다음 생이 아니며...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자꾸 되풀이 해서
나타날 수 있다고 카발라는 이야기 한다.
편안함을 찾아 티군을 피하는 것은 일시적 만족과 안도를 줄 수 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는 스스로를 카오스로 이끄는
일이 될수 밖에 없으며,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정면으로 부딪혀 그것을 극복해야 만 한다.
우리는 자신이 맞닥뜨린 고난과 문제의 불편한 상황들을 더 이상 외면하며 슬퍼하고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어려움은 지속적인 충족의 빛을 우리 삶에 불러 들이기 위한 것이며, 먼저 바로잡아야할 티쿤 상황이
우리앞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을때 우리는 좋은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럴때 우리는 교만해 지며 자신은 절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믿어 버린다.
카발라는 빛의 출처가 두 가지 라고 이야기 한다. 창조주와 사탄.
기억하라. 창조주의 빛은 영원한 불꽃이란 것을,,,
반면에 적의 빛은 다이나마이트 한개 가 만들어 내는 강렬한 번쩍임이라는 것을...
우리가 반응성 행위로 성공을 추구할때, 그 성공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다.
반응성 행위가 많을수록 우리가 거두는 성공도 크다. 그러나 그 댓가를 치룰지니.....라고 카발라는 말한다.
적은 우리를 반응성 심리 상태에 오래 묶어 두기 위해 잠시 동안은 후한 댓가를 지불할 것이라고 카발라는 가르친다.
적은 다이너마이트 한개에 특별히 오래가는 휴즈(시간)을 덤으로 끼워준다.
그리하여 성공과 빛의 환영이 더 오래 가도록...
우리가.... 자신의 성공을 만들어 내는 눈부신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고 굳게 믿으며 높은 곳을 날고 있을떄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공기가 빠져 쭈그러 드는 황당한 일이 발생 하고야 마는 것이다.
카발라는 말한다.
수많은 반응성 행위와 생각과 감정들에 저항하라...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모조리 놓아버리고 모조리 주어버려라 라고 말한다.
백만불짜리 일
만약 누군가 어떤일을 하면 백만불을 준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면...그리고 그 일이 아주 하챦아보이는....
누군가를 돕는일 혹은 세상을 밝게 만드는 일들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눈에 불을 밝히고 그런 일들을 찾아나서고 우리들은 그런 일을 할수 있는 기회조차도 가지기 힘든
상황이 발생할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세상에는 남들이 거들떠도 보지않는 그런 일들이 넘쳐난다.
카발라에서는 아무도 쳐다보지않지만 실제로는 백만불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일들이 세상에 넘쳐난다고 이야기 한다.
카발라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한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이자 달인에게 다가가서 외다리로 균형을 잡고 서는데 걸리는 짧은 시간안에
우주의 모든 비밀과 장엄한 신비를 푸는 답을 가르쳐 달라고 청한다.
그 비범한 달인은 이 지상에서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정신적 거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열성적인 제자의 요청을 받고는 그 질문에 대해 아주 신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는 무한한 지혜로 눈을 빛내면서....이렇게 대답한다.
그대 이웃을 그대 자신처럼 사랑하라. 나머지는 모두 해설에 불과하다.
자 어서 가서 배우라.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에서 배운것을 통해 다음 세계를 선택하는 존재들입니다.
지금 이순간 자신의 마음 이란 밭에.... 사랑과 나눔 이란 씨앗을 심어 놓지 못한다면 다음 세상에서도
메마른 황무지와 같은 마음의 대지를 성적표 처럼 받아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길고 재미 없는글 끝까지 읽어 주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신이 내리는 빛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
이 글은 2003년 국내 출판된 예후다 베르그의 내 영혼의 빛( The power of kabbalah)라는 책에서 발췌 했으며
압축 요약하면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무한한 관대함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출처] 카발라. (임사체험, AFTERLIFE 연구회) |작성자 semonem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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