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7개의 머리를 가진 뱀

황령산산지기 2019. 6. 23. 19:29
재생과 치유의 상징 뱀띠이야기 
 
뱀은 희랍신화에 보면 재생과 치료의 신이다. 
 
의학을 상징하는 문장도 뱀 두마리가 합쳐진 모습이다.요가에서 뱀은 우리 몸에 깃든 잠자는 에너지를 나타낸다. 
 
또아리를 튼 뱀이 깨어나면 척추를 타고 올라와 7개의 챠크라를 깨어나게 하는 상징이다. 
 
태국사원 지붕의  기와모습은 뱀무늬형태이다.불상은 7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가 부처님의 좌대와 광배역할을 하고 있다. 
 
서양 종교에서는 뱀이 사탄의 상징이지만 동양에서는 잠든 에너지가 깨어남을 나타낸다. 
 
뱀은 허물을 벗는 동물이며 겨울잠을 잔다.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나 영생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뱀띠의 수호 불보살은 약사여래불이다.닦아야 할 덕행은 치유와 장수이다. 
 
뱀띠들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돕고 상처받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약사경을 읽고 약사여래 만트라를 수지독송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치유능력을 가져야 한다. 
 
불전에 올리는 공양물은 콩이다. 
 
약사여래 만트라.ᆢ데야타 옴 베칸체 베칸체 마하베칸체 란쟈 사뭇 카테 소하.ᆢ 
 
유투브에 메디신붓다 만트라 검색하면 최고의 힐링뮤직을   만날수 있다.




뱀의 종교로서의 불교 영성

 

By Dr. Witness Oh

 


3장에서는 아담의 타락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뱀에 대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 구체적으로 선포되고 있음을 있다. 뱀은 진리를 속이는 자로 소개되고 있으며 피조물이 하나님 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고 유혹한다. 뱀은 원래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로서 아담에게 이름을 부여 받았던 지혜로운 동물이었다.

 

그러나 지혜가 초자연적인 존재인 사단에 의해 미혹되어 아담과 하와를 속이는 변질된 지혜자로서의 뱀으로 3장은 소개하고 있다. 3장에 등장한 뱀의 속에서는 오늘날의 종교들과 뉴에이지 사상의 본질이 담겨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분의 거룩한 영적 전쟁이 뱀의 후손과 배후의 사단을 향해 강력하게 선포된다.

 

 사단은 교활하지만 동시에 교만한 존재이다. 그래서 사단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드러내고 남기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민족의 전통 문화 속에는 사단의 형상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 중의 하나가 바로 뱀의 상징이다. 뱀이라는 상징은 오늘날 가히 세계적이다. 죠지 오티즈 2세의 조사에 따르면, 뱀의 형상이나 장식은 세계 도처에 퍼져있다. 고대 바벨론의 지구라트 벽화에도 뱀이 발견된다. 하와이의 부두교라는 종교도 뱀을 숭배한다. 안데스산맥의 고대문명에도 뱀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탄트라(Tantra)라고 불리 우는 밀교(密敎) 뱀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육체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킴으로 신과의 합일에 이르는 사상으로 성적 욕망을 추구했던 바알종교와도 관계되어 있다. 사상은 행위를 통해 여신 또는 뱀으로 상징되는 군달리니라는 에너지를 일깨움으로 해탈의 문을 여는 것으로 믿는다. 요가가 욕망 자체를 제거하는 극단적 금욕주의라면 탄트라는 성적 욕망을 충족함으로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극단적 쾌락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는 어디서나 쉽게 뱀의 미혹을 발견할 있다.

 

불교 영성이 또는 용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스탠리 탐비아라는 분은 캠브리지 대학의 사회인류학 강의에서 미얀마의 승려들이 사제로 임명 받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승려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새로 임명 받는 승려의 친척이나 가족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축제이다우리는 후보 승려들이 나그(nag)라고 불리우는 것을 목격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는 바로 물뱀(the water serpent)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와 뱀과의 관련성은 다음의 조형물에서도 명확하게 확인된다.

 

 


 

                                 

           

위의 그림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인 Naga 위에 앉아서 보호를 받고 있는 부처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불교에서는 7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 부처의 수행도중 비가 내리자 그를 보호한 것으로 이해하며, 뱀을 지혜자로 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머리와 뿔달린 짐승이 사단() 권세를 받은 적그리스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13:1).

 

어떤 여자 분이 계셨다. 그런데 분은 아들을 어릴 질병과 사고로 잃어버렸다. 분은 아들을 간절히 낳기 원했다. 예전에는 가문에 아들을 얻지 못하면 나는 알고 있었던 바로 그런 때였다. 이러한 딸의 애통한 사정을 너무나 알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인의 어머니였다. 여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자기 딸에게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서 칠성단을 쌓고 부처 전에 기도하여

반드시 아들을 너에게 보낼 것이다

 

유언을 남긴 분은 영험 있던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동네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리 웠던 신통력이 있는 할머니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이 지난 , 여인은 신기하고 생생한 태몽을 꾸었다. 황룡 꿈이었다. 용의 모습은 이러했다. 눈에 불꽃이 일고 몸은 뱀의 비늘로 덮혀 있었다. 머리에는 날카로운 뿔이 솟구쳐 올라와 있었고 몸을 360도로 둥글게 굽혀 꼬리를 여인의 배꼽에 고정시키고 입을 벌려 사람의 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당신에게 상사(想思) 들렸습니다.” 새벽 2-3시경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인이 소스라치며 꿈에서 깨어났을 여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적어있었다.

 

그리고 신통한 할머니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는 생생한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다.  아이가 3 길을 지나던 신령한(?) 불가(佛家) 보살들인 예언자들이 아이의 관상을 살피면서 엄마에게 아이가 저승에 있는 어느 누군가의 기도 때문에 땅에 왔다고 외할머니 산소에 촛불을 켜도록 했는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밤에 바람이 불어도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시주하는 스님이 집으로 찾아와 아이의 운명을 예언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용궁에서 왔다고 용왕제를 드리고, 불가와 인연이 있다고 절을 열심히 다니기도 했다(그러나 그녀는 말년에 하나님에 의해 극적인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이는 불교와 잡다한 종교의 언저리에서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고 신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모르게 고민하며 고민했다.

 

왜냐하면 아이의 태몽에 나왔던 바로 용은 동양, 특히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신령하고 존귀한 존재로 숭배를 받는 영물이지만, 성경에서는 반대로 용을 , 마귀로 말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든 태몽이 사단적인 것은 아니다. 신자들도 간혹 태몽을 꾸기 때문이다).

 

신학생은 혹시 자신이 <적그리스도> 태어난 아닌가 두려웠다. 그는 이전에 숫자 666 관련하여 적그리스도로 태어난 아이 데미안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영화<The Omen> 이라는 공포영화도 보았기 때문이다.

 

고민하며 기도하는 도중, 신학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땅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마귀가 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주는 것이다. 초월적인 존재인 사단은 나의 천상의 비밀의 일부를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어두움의 종들을 통해 비밀을 계시한다. 너희 외할머니의 경우도 그러하다. 너의 외할머니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부처를 신으로 섬겼다. 그녀는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귀의 계시를 받았고, 그녀가 기도하면 마치 부처가 땅에 손자인 너를 보낼 거라고 미혹했다. 너를 땅에 보낼 것을 계획한 이는 하나님이다. 마귀가 시기를 이용했을 뿐이다너는  기억하거라. 아들아. 내가 너를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종으로 삼았다는 것을…”

 

본인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를 무조건 비하하고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나는 영적 실체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긴 하지만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리 웠던 한국 불교 조계종의 종정 성찰 스님의 열반송(죽음시- 열반시 남기는 마지막 유언적 ) 보면 그가 추구했던 불교 영성의 허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불교계는 위의 열반송에 대해 지옥과 극락은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성철 같은 도력이 깊은 스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을 고백한 시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그의 수도과정 가운데 불교 영성에 속해있는 영적 실체에 대한 어떤 진리의 빛을 발견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자비로운 부처 뒤에 있는 어두운 그늘을 발견했다! 그러나 실체는 성철 스님 자신이 지나온 숱한 고난의 수도생활과 깨달음의 영성으로도 감히 저항할 없는 엄청난 권세였다. 바로 사단이다. 어두움의 왕이다. 자비와 도력으로 포장한 불교 영성의 배후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영적 실체가 성철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열반 송은 처절한 그의 영적 몸부림을 대변하고 있다. 사단의 진면목을 발견했으나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권세를 빠져 나올 없었음을 탄식한 것은 아닌가? 실제로 성철스님 조계종 종정으로 있던 1987 "부처님 오신 " 법어에서  "사단이여! 어서 오십시요,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부처님입니다."라고 발표한 있다.


사단의 권세는 사단에게 속한 자들이 저항하고 이길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악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한 신자들이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만 물리칠 있는 지옥의 능력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동양의 불교는 지극히 신비스럽고 자비로운 종교이며 인간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비우고 다스리는 지극히 선한 종교이다. 철학적 깊이가 매우 깊고 심오하여 많은 이들를 매료시티기도 한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을 끊기 위한 깨달음과 부처가 되는 열반에 이를 것을 강조한다. 열반은 인간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계속 되풀이 하는 소위 윤회를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는 결국 수행을 요구한다. 수행이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는 정견(바른 판단), 정사유(바른 생각), 정어(바른 ), 정업(바른 행위), 정명(바른 생활),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명상), 정정(바른 집중) 여덟 가지를 말한다.


예전에 본인이 예수님을 모르던 청년 시절에 남해 금산에 위치한 보리암이라는 암자를 찾은 적이 있다. 불교 사찰들 중에서도 영험이 있고 기도의 응답이 많은 유명한 암자였다. 암자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조 이성계가 곳에서 백일 정성으로 기도하여 위화도 회군에 성공, 이씨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본인이 이곳을 방문해서 일을 묵을 이곳에서 일어난 신기한 기적들에 대한 간증들을 들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날이 저물어 밑에 도착을 했는데 암자를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미터 앞에 갑자기 어떤 여자분이 앞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자분도 암자를 찾아 가는 분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뒤를 쫓아갔다. 앞서 가는 여자 분이 마치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인도하듯 일정한 거리 간격을 유지하며 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암자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주지 스님에게 여자분에 대해 물어보았다. 주지 스님이 그런 여자분은 암자에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아마 관음보살이 현현하여 길을 인도한 같다고 답변하는 것이었다. 


외에도 암자에서 기도하고 응답 받은 기적들에 대한 간증은 숱하게 많았다. 기독교에만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종교에만 얼마든지 기적들이 일어난다. 배후에 있는 존재가 기적들을 일으킬 있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의 물질주의와 기독교에 혐오감을 느낀 수많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불교의 영성 세계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고통과 그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을 맞추지만 인간의 죄에 대한 본질은 결코 이해할 없다..


예전에 한국의 KBS에서 차마고도(茶馬古道: 중국차와 말을 교역하던 오래된 길이라는 )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번째 시간에 <순례의 > 방영되었다. 내용은 4-5명의 순례자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티벳 라싸까지 무려 186 동안 2100km 걸어서 순례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던져 땅에 엎드리고(오체투지)일어나 걷기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러한 행위가 자신들을 부처 앞에 하나의 희생제물로 절대적으로 굴복시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보시로서의 수행방법이기 때문이다.  가는 길이 험난할수록 이들은 이것을 기쁨으로 감수한다. 왜냐하면 고통이 더할수록 만큼 죄악도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티벳의 라싸에 있는 티벳 불교의 중심지인 조캉사원에 10 번의 예불을 드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순례 행위는 다른 불교인들로부터 거룩한 보시행위로 칭송 받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종교 행위들은 심각한 것으로 해석 있다. 불교가 전해지고 천년 동안 이러한 순례 행위들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소위 차마고도로 불리 우는 땅과 지역에서 행해졌다. 부처 앞에 몸을 던져 숭배하는 오체투지 행위는 실제로는 사단의 권세를 공식적으로 불러들이는 종교 의식이다. 이들이 밟고 엎드리며 지나갔던 모든 땅이 사단에게 속해있음을 합법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티벳을 비롯한 이러한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만큼 사단의 견고한 진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 선교 단체들이 이러한 지역을 탐방하며 기도하는 소위 < 밟기 기도>(Walking Prayer) 대해 단지 어리석거나 무모한 활동이라고 무조건 비판해서는 된다. 밟기 기도 한번 만으로 사단의 권세가 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장악된 사단의 권세를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면서 모든 땅과 하늘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다시 선포하는 행위는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영적 전쟁 활동이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은 인간의 피나는 노력과 고된 수행으로 인간의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움을 얻는 신의 경지가 가능하다고 믿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 또한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나 힌두교에 매료된다. 철학적 가르침이나 지혜가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인도한다고 믿기 때문이며, 실제적으로도 신비적 체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만 불교 인구가 300만에 달하고 불교적 명상 인구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선한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단은 선하게 보이는 자기 인본주의적 종교들을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인도한다.


사도 바울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