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일 때

황령산산지기 2019. 6. 8. 09:55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일 때가 있다. 하는 일이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익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다. 한마디로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시시껄렁해 보일 때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어떤 장년의 남자가 숫돌에 부엌칼을 갈고 있었다. 반복되는 동작이 무의미해 보였다. 돈도 되지 않은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가치해 보였다. 그런 한편 하찮은 일임에도 열중하는 모습이 왠지 달리 보이기도 했다.

 

어떤 중년의 여인이 추수가 끝난 논을 쓸고 있었다. 논바닥을 빗자루로 쓰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여인은 벼이삭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이삭줍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삭쓸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처럼 보이긴 했지만 한톨이라도 건지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은 숭고해 보였다.

 

자만으로 가득한 삶

 

젊을 때는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인다. 나이 든 사람을 보면 무슨 재미로 살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 가면 삶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젊음의 시절이 지나가고 노년이 되었을 때 낙이 없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어 노년이 되는 것에 대하여 용납이 되지 않았다.

 

젊음의 시절은 자만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이 자신감이 넘친다. 노년은 먼나라 이야기이다. 영원히 이 젊음과 이 건강이 지속될 것처럼 착각한다. 그래서일까 노인의 삶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고 무가치하고 시시껄렁하게 보인다. 젊음의 자만과 건강에 자만에 가득 찬 삶이다.

 

젊었을 때는 즐기고 본다는 생각이 강하다. 가장 빛나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는 병들고 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애써 피한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듯 하다. 마치 죽음은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나에게 병들고 늙은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밤이 새도록 마시고, 밤이 새도록 춤을 추고, 밤이 새도록 즐긴다.

 

대학캠퍼스는 젊음의 아름다움으로 넘쳐난다. 군대는 젊음의 패기로 넘쳐난다. 요양원에 가면 어떨까? 늙고 병들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젊음의 자만과 건강의 자만으로 가득한 자가 병든 자나 형편 없이 늙어 버린 자를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들어갈까?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애써 외면 해도 되는 것일까?

 

주변에서 보는 천사(天使: devaduta)

 

어떤 사람이 젊음의 자만과 건강의 자만으로 살았다. 그는 급작스럽게 죽어서 죽음의 신, 야마왕(Yama)에게 끌려 갔다. 야마왕은 이보게, 그대는 세상에서 두 번째 천사가 나타난 것을 보지 못했는가?”(M130)라며 추궁했다. 이에 어떤 사람은 대왕이여,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야마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나 태어나 팔십 세나 구십 세나 일백 세가 되어 늙고, 허리가 서까래처럼 구부러지고, 지팡이를 짚고, 몸을 떨며 걷고, 병들고, 젊음을 잃고, 이빨이 빠지고, 머리가 희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대머리가 되고,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나고, 사지가 얼룩이 진 것을 보지 못했는가?”(M130)

 

 

전형적인 노인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도 백세가 다 된 노인이다. 요즘 이런 노인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왠만하면 구십대이고 조만간 세 자리를 찍을 것이라고 한다. 야마왕은 이런 노인에 대하여 천사(天使: devaduta)’라고 했다.

 

천사를 뜻하는 ‘devaduta’라는 말은 천상의 사절을 말한다. 죽음의 신 야마왕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는 천사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저승사자로 번역했다. 천사의 경은 맛지마니까야뿐만 아니라 축약된 형태로 앙굿따라니까야 천사의 경(A3.36)’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천사는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네 종류로 설명되어 있다. 1천사는 똥과 오줌으로 분칠된 아기이고, 2천사는 아주 늙은 노인이고, 3천사는 타인의 부축으로 사는 병자이고, 4천사는 형벌을 받는 범죄자이고, 5천사는 시체가 된 죽은 자를 말한다. 이 중에서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은 보살(고따마 붓다)이 궁전에 살면서 세속적인 생활의 매력을 부수고 해탈의 길을 추구하려는 결단을 불러일으킨 존재들이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천사는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천사를 보았음에도 애써 외면 했을 때 악한 과보로 나타난다. 세 번째 천사는 병든 사람에 대한 것으로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병들고 괴로워하는데 중태이고, 스스로 똥과 오줌으로 분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일으켜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앉혀 주어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M130)라고 표현 되어 있다. 요즘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누워 있는 노인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천사를 보았음에도 애써 외면하거나 피한다면 젊음의 자만과 건강의 자만으로 살기 쉽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즐기는 삶이 된다. 즐기는 삶을 살게 되면 감각적 쾌락의 위험에 대한 재난에 빠질 수 있다. 요즘 재벌2세나 3세들이 마약에 빠지는 것과 같다.

 

죽음의 왕, 야마왕은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의 위험에 대해 말했다. 형편 없이 늙어 버린 노인을 보았을 때 나도 늙어야만 하고 늙음을 뛰어넘을 수 없다.”(M130)라고 젊음의 교만을 내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또 중병에 걸린 자를 보았을 때에는 나도 병들어야만 하고 질병을 뛰어넘을 수 없다.” (M130)라고 건강의 교만을 내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지 못하여 죽음의 신 앞에 불려 나와 추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천사의 경고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으로 한평생 살다보면 죽음의 신 앞에 끌려가 추궁받게 되어 있다. 1천사, 2천사, 3천사, 4천사, 5천사를 보았음에도 지나쳤다면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과 삶의 교만으로 산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방일하네.

비속한 몸을 받는 사람들

그들은 오랜 세월 슬퍼한다.

 

천사의 경고를 받고 나서야

이 세상에서 참사람들은

언제나 고귀한 가르침에

교훈을 찾고 방일하지 않는다.

 

집착에서 두려움을 보고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하고

태어남과 죽음을 부수었다.

 

안온에 도달하여 행복하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M130)

 

 

나이가 들수록 점점 밀려나는 것 같다. 예전에는 TV를 볼 때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았으나 갈수록 젊은 사람들이 많아진다. 더 나이가 들어 병들고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어갈까?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미래의 나의 모습이다. 늙어 가는 자의 얼굴에서 나 자신을 보고, 죽어 가는 자의 얼굴에서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 지금 이순간에도 천사들은 경고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일 때

 

교만으로 살면 모든 것이 시시하게 보인다. 건강한 자는 병든 자가 시시하게 보이고, 젊은이에게는 노인이 시시하게 보인다. 부자는 부자의 교만이 있어서 가난한 자가 시시하게 보이고, 많이 배운 자는 배움의 자만이 있어서 못 배운 자가 시시하게 보인다. 출가자는 태생의 자만이 있어서 재가자가 시시하게 보일 것이다.

 

중년의 남자가 숫돌에 칼을 가는 것이 시시하게 보이는 것도, 중년의 여인이 이삭쓸기 하는 것이 시시하게 보이는 것도 우월적 자만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자만은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한다. 대개 내가 누군데라는 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월적 위치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자만은 자기자신을 관찰할 때 깨진다.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일거수일투족에 대하여 제3자가 보듯이 객관적으로 관찰했을 때 행위와 관찰하는 마음만 있다. 행위가 일어나고 사라듯이, 관찰하는 마음 역시 일어나고 사라진다. 오로지 일어나고 사라짐만 있다. 여기에 나()가 끼여들 여지는 없다. 따라서 건강의 자만, 젊음의 자만, 삶의 자만이 일어날 수 없다.

 

숫돌에 칼을 가는 것이나 이삭줍기 하는 것은 반복적 행위에 따른 것이다. 좌선하는 것도 경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것이든지 반복적 행위를 했을 때 나가 끼여들 여지는 없다. 오로지 행위와 관찰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단순하게 반복적 행위를 하는 것은 시시한 것이 아니다. 행위에 집중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다.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일 때 단순 반복적인 행위를 하면 자만이 사라진다.

 

 

2019-06-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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