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

아가야 / 천상병 外

황령산산지기 2019. 4. 27. 09:26


by 천상병    아가야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며 사직공원길을 간다.

행인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옷 바람의 앳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웬일일까?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자주 뒤돌아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을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 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



얼마전 공원근처에서였다.

 

여중생인지 여고생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쁜 여학생이 달기똥 같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내게 와서는-나는 얼핏 지갑을 잃었는가 했다- 오천원자리를 내밀며 천원짜리로 바꿔달라는 것이었다. 주머니를 뒤지며

“그래그래, 바꿔주든 어떻게든 해줄테니 울지마라...쪼옴 그쳐라”

 

돈을 바꿔주니 고맙다고 인사하며 표정이 좀 풀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하니 교통카드를 잊고 왔는데..버스기사가 바꿔줄 돈이 없다며 욕을 했는지 심한 소리를 한 모양이었다. 버스를 안 타본지 오래되어 요즘 시스템은 잘 모르지만 아무리 귀찮고 짜증난다고 어린 학생에게 더구나 아주 예쁜 여학생에게 폭언을 할 수가 있는 것인지 화가 치밀었다. 대체 몇 번 버스냐고 내가 경찰에 고발해버리겠다고 하자 ‘그럴 것까지는’하는 태도다.

 

어쩌면 다시 이삼십분을 기다려 버스를 타야 되어 ..그래서 학교든 학원이든 약속장소에든 지각하는 것이 억울해서 터진 눈물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급하면 내차로 태워줄테니 어떠냐’고 하니 괜찮다고 사양한다. 주변에 편의점도 있고 다른 행인도 많고 또래의 학생도 많은데 왜 하필 내게 와서 환전을 부탁한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서 알게 모르게 뭔 일인가 하고 가던 발걸음까지 멈추고 우리 쪽에 신경 쓰는 이들이 보인다. 냅킨으로 눈물을 닦아주고는 ‘이제 좀 진정되었니, 잘 가거라’하고는 보내주었다.

 

 

 

 

내 모자란 딸보다도 몇살은 어린 그 학생에게 더 해줄 무엇이라곤 없었다.

‘세상 살다보면 그보다 더 험악한, 억울한, 불공정한 일도 많다’고 겁을 줄 수도 없고

‘아무리 눈물이 나도 울진 마라. 네가 약해보이면 해꼬지하려는 나쁜 놈들이 꼬여든단다’라고 할 수도 없고..

'이 세상에 울어서 해결될 일이라곤 없단다. 캔디 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란 전설을 말할 수도 없고....'울면안되야, 산타할버지가 이늠맴매한다'고 사기칠 수도 없고..

'나처럼 불행하고 외로운 아저씨도 흘흘거리며 사는데...니가 임마....어쩌고 할 수도 없고........  

 

아아~ 이 세상 어린 천사들을 울리는 못된 어른들에게 저주 있을진저....

 

여인의 눈물은...흉기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하루가 지나서였다.

좀더 생각해보니 실제는 다를 수도 있는데 무조건 학생말만 믿은 것이 아닌가..

학생이 울지 않았어도 무조건 믿어주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그보다 더한 사연이라도...말도 안되는 소설일지라도 눈물을 흘린다면 역시 똑같이...

거부할 수 없겠다라는...사기일지언정 기꺼이 넘어가줄 수밖에 없겠다는.....

믓 미인들의 눈물에 신세 망친 영웅호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지..

 

좌우간...울지마라, 아가야.....

 

 

 

 

 

  

   

'비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름을 지우지 마라  (0) 2019.04.27
이별을 슬퍼하는 자들에게  (0) 2019.04.27
시간의 보복  (0) 2019.04.22
보고픔이 달이차면  (0) 2019.04.21
나 혼자만 아픈 줄 알았습니다  (0) 2019.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