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삼십분전에 도착한다. 멀리서 다니는 사람일수록 약속을 잘 지킨다.
안양 명학역에서 삼송역까지는 1시간 반 가량 걸린다.
기다리는 시간과 버스 타는 시간을 합하면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삼십분 전에 도착하려면 4시 반에는 출발해야 한다. 니까야강독모임이 있는 날이다.
삼송테크노벨리 3층에 자리잡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사무실 겸 서고에 들어서면 전재성 선생이 반갑게 맞이 해 준다.
흰머리와 흰수염이 인상적이다. 그것도 장발이다. 왜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기르는 것일까?
아직 한번도 물어 보지 않았다. 어쩌면 바빠서일지 모른다.
번역에 몰두 하다 보면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단지 상상하는 것에 불과 하다.
율장 통합본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부수까지 번역이 모두 끝나서 이제 합본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총 3,300여 페이지에 달할 것이라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합본이 2,780여페이지인데 이 보다 무려 5백페이지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율장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가 단권으로 출간된 것만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최근 완역된 부기까지 합하여 모두 다섯 권을 합본화 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이 두께가 매우 얇은 것을 사용해야 하고, 폰트사이즈가 더 작아져야 하고, 2단 칼럼 배열을 해야 한다.
현재 해제까지 써 놓았다고 하니 올 여름에는 통합본 율장을 보게 될지 모른다.
윤회의 흐름과 네 종류의 사람
사월 첫번째 강독모임에서는 ‘윤회의 흐름과 네 종류의 사람’을 독송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흐름의 경(Anusotasutta)’(A4.5)에 해당된다.
법수가 네 개이므로 경에서는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
확립되어 서 있는 사람, 건너 피안에 도착하여 땅위에 있는 거룩한 님이라 했다.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서 악한 업을 저지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확립되어 서 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완전히 부수고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확립되어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에 도착하여 땅위에 있는 거룩한님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번뇌를 완전히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른 앎으로 실현하여 성취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건너서 피안에 도착하여 땅위에 있는 거룩한님 사람이라고 한다.”(A4.5)
네 종류의 사람 중에 첫번째 부류로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Anusotagāmī puggalo)’은 범부를 말한다.
욕망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서 사는 사람이라 했다.
욕망대로 살면 필연적으로 악업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
영원히 윤회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
두번째 부류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paṭisotagāmī puggalo)’이다.
마치 연어가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것 같다. 그 과정은 쉽지 않다.
피투성이가 된 연어가 마침내 자신이 태어난 곳에 도착하여 알을 낳는다. 그리고 연어로서 일생을 마감한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 역시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탐, 진, 치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아 간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흐름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탐, 진, 치를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했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에 대하여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라는 표현이 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에게 물어 보았다.
선생은 “빠알리 원문을 보아야 알겠지만 전생의 업보에 따른 고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assumukho'pi rudamāno”라 되어 있다.
빠알리어 ‘assumukha’는 ‘with a tearful face’의 뜻이고, ‘rudamāna’는 ‘crying’의 뜻이다.
그래서 “assumukho'pi rudamāno”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도”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을 보았다.
초불연 번역서에는 “얼굴이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면서도”라고 번역했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에 대하여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또는 “얼굴이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면서도”라는 표현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이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전재성선생은 전생의 업보에 따른 고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억울함’에 대하여 설명했다.
왜 사기당하는가?
사람들은 기분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분 나쁘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요즘은 카톡시대라 기분 나쁘면 탈퇴해 버린다. 어떤 사람은 카톡소리가 싫어서 탈퇴한다.
심지어 카톡에 불 들어 오는 것이 거슬려서 탈퇴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 억울한 일이 닥치면 어떻게 될까? 아마 홧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다.
시간 지나면 해결되는 것도 있지만 일생동안 걸머지고 가야 하는 것도 있다.
금전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돈을 떼인 경우가 대표적이다.
돈 냄새를 맡은 자가 접근하여 돈을 갈취해 가는 것을 말한다. 사기당한 것이다.
이럴 경우 분노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홧병으로 일찍 죽기도 한다.
금전적으로 사기 당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 탓이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지혜가 없어서 당한 것이다.
바탕에는 탐욕이 깔려 있다. 더 근원적으로는 어리석음이 있다.
그래서 탐욕과 어리석음, 성냄과 어리석음은 항상 페어로서 함께 한다.
탐욕과 어리석음이 결합되어 사기를 당하고, 사기 당하고 난 다음에 성냄과 어리석음이 결합되어 고통받는다.
젊은 시절 학생운동으로 인하여
전재성선생은 학생시절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바 있다.
전재성 선생은 대불련 의장을 지내기도 했고 민중불교운동에 대한 이론을 발표한 바도 있다.
그래서인지 시국사건이 터지면 검거 되어 투옥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더구나 사건은 조작되기 일쑤였는데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느 시대나 블랙리스트가 있다. 한번 블랙리스트에 오르자 시국사건이 있을 때 마다 수배되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삶이 십년 가량 지속되었을 때 도저히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을 떠나서 사는 것 외 방법이 없어서 독일로 도망가듯이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젊은 시절 학생운동으로 인하여 옥살이했을 때 억울한 것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부풀려지고 조작되었을 때 더욱 더 억울한 것이다.
어떤 이는 학생운동하다 간첩죄로 내몰려서 오년동안 옥살이했다고 한다.
결국 무죄로 판명 되었지만 젊은 시절 오년을 누가 보상해 줄 수 있을까?
정의로운 삶을 산 대가치고는 매우 가혹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억울함을 잘 극복하면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번역 하는 것을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삶을 산 자는
사무실 책장에는 전재성 선생의 번역서로 가득하다.
사부니까야는 물론 쿳다까니까야 일부, 그리고 율장, 논장에 이르기까지 한수레 되는 것 같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도 모두 갖추어 놓았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이 이와 같은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은 어떤 힘이 작용해서일까?
선생에 따르면 억울함을 극복하면 힘이 생겨난다고 했다.
마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억울함은 나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재가불교운동을 하고 있다. 뒤늦게 뛰어든 것이다.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인연이 계기가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재가불교활동가 중에는 학생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많다.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도 있다. 억울한 옥살이일 것이다.
그런데 억울함을 극복한 사람들은 파워가 넘쳐 난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지치지 않고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 힘은 억울함을 극복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억울함을 극복했다면 세상에 못할 일 없을 것이다.
전재성 선생도 젊은 시절 억울하게 당한 일과 억울한 세월 보낸 것이 번역하는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안락한 삶을 살았다면 이런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이제까지 열정적인 삶은 어려운 삶을 극복한 힘에 따른 것이라 했다.
눈물로 얼룩진 삶을 산 자는 강해지기 마련이다. 고난을 극복하면 더욱 더 강해진다.
왠만한 고통이나 괴로움은 견디어 낸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는 자는 상처 투성이의 연어처럼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 자라 볼 수 있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이다. 진리의 흐름에 들어 선 자이다. 그런 자를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라고 한다.
이 세상을 완전히 버려야
세번째 ‘확립되어 서 있는 사람(ṭhitatto puggalo)’이 있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 풀린 자이다.
오하분결이라 하여 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분노
이렇게 다섯 가지가 풀린 자를 말하는데 ‘돌아 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한 자’라 하여 ‘아나함(anāgāmī: 不還者)’을 말한다.
불환자에 대하여 이 세상에 돌아 오지 않는 자라 한다. 욕계의 세상에 오지 않는 자를 말한다.
그렇게 하려면 이 세상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욕계 세상에 대하여 넌더리칠정도로 버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미련 있으면 다시 돌아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S15.1)라는 표현을 했다.
또 오온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S22.9)이라는 표현을 했다.
부처님은 자신의 외동 아들 라훌라에게는 “세상을 아주 싫어 하여 멀리 떠나라”(stn340) 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라고 했다.
이를 빠알리어 세 단어로 묶는다면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라는 정형구가 된다.
한자어로는 ‘염오(厭惡)-이욕(離欲)-소멸(消滅)’이 된다.
세상을 염오한다는 것은 오원을 염오한다는 말과 같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재난임을 알게 된다면 오온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욕계에서 사라질 수 있다. 남은 것은 색계와 무색계뿐이다.
그래서 불환자가 되면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수명대로 살다가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다.
나홀로 사는 세상이 아닌 이유
이 세상을 완전히 버린 사람, 이 세상에 대하여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는 사람은 똥구덩이 같은 이 세상에 돌아 오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안락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완전히 풀어 낸 사람에게 해당된다. 그 중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有身見)’가 있다.
유신견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경전적 설명에 따르면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오취온이라 한다. 이와 같은 유신견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호흡’과 ‘먹는 것’으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매일 호흡하며 산다. 또 사람들은 매일 먹으며 산다. 호흡하는 것과 먹는 것이 없다면 죽음에 이를 것이다.
식물도 물을 주지 않고 산소가 없으면 시들해져서 죽을 것이다.
호흡을 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나홀로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호흡하는데 빨간 물감을 내뿜는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금방 세상은 온통 빨강색으로 변할 것이다.
나홀로 존재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곡식과 채소, 그리고 고기를 섭취할 때 온 우주를 먹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럴 때 어느 것을 개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하분결 중에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이 있다. 전재성 선생은 ‘우측통행’을 들어 설명했다.
생태하천 길을 산책하다 보면 요즘 사람들은 우측통행한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좌측통행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를 잘 모르는 사람은 좌측으로 걷는다.
그러다 보면 반대편에서 걸어 오는 사람과 충돌이 일어난다.
이럴 때 우측통행하는 사람은 한마디 한다. 이것도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에 해당될 것이다.
불교는 연기법에 기반한다. 여러가지 조건을 잘 이해하면 상황에 따라 달리 할 수 있다.
거짓말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하얀 거짓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남과 비교했을 때
네번째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이 있다.
번뇌를 완전히 부순 아라한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마음에 의한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이룬 자라 했다.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 풀린 자이다.
즉,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 비물질계에 대한 탐욕, 자만, 흥분, 무명을 말한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이중에서 자만과 흥분은 서로 관계가 있다고 했다.
자만은 비교에서 발생된다. 비교하면 우월과 동등과 열등, 동등으로 나뉜다.
남보다 우월해도 자만심이 생기고, 남보다 열등해도 자만심이 생긴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부순 불환자라도 자만심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불환자인데”라는 자만일 것이다. 비록 유신견은 부수어졌지만 ‘내가 누군데’라는 미세한 자만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 것이다. 아마 이것이 흥분 또는 들뜸일 것이다.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는 자만과 들뜸은 어리석음에 기반한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에서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뿌리 뽑혔지만 어리석음까지 뿌리 뽑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만을 뿌리뽑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자만을 뿌리뽑을 수 있을까?
상윳따니까야 ‘케마까의 경’ (S22.89)에 따르면 향기박스의 비유가 있다.
빨래 비누로 세탁한 옷에는 비누냄새가 배이기 마련이다. 옷의 때를 비누로 제거 했지만 비누 냄새까지 없앨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를 없애버립니다.”(S22.89)라 했다.
마찬가지로 자만이라는 번뇌도 향기박스에 넣으면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케마까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고귀한 제자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끊었다고 하더라도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가운데 미세하게 발견되는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경향을 아직 끊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 가운데 일어나는 생멸을 ‘물질은 이와 같고 물질의 발생은 이와 같고 물질의 소멸은 이와 같다.
느낌은 이와 같고 느낌의 발생은 이와 같고 느낌의 소멸은 이와 같다.
지각은 이와 같고 지각의 발생은 이와 같고 지각의 소멸은 이와 같다.
형성은 이와 같고 형성의 발생은 이와 같고 지각의 형성은 이와 같다.
의식은 이와 같고 의식의 발생은 이와 같고 의식의 형성은 이와 같다.’라고 관찰 해야 합니다.”(S22.89)
자만을 부수는 향기박스는 다름 아닌 ‘삼법인(三法印)’ 것이다.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여 그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개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만은 사라질 것이라 한다.
부처님은 오비구에게 ‘초전법륜경(S56.11)’을 설하고 난 다음에 ‘무아경(S22.59)’을 설했다.
꼰당냐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이 생겨나 수다원이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초전법륜경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게 하는 경이라 볼 수 있다.
다섯 명의 비구가 모두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자 부처님은 무아경을 설했다.
오비구는 무아경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전법륜경은 옷을 세탁하는 비누와 같고, 무아경은 비누 냄새 마저 제거하는 향기박스와 같은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 유신견이 제거 되고, 무아경에서 자만이 제거 되는 것이다.
자비심으로 번역한 노이만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대부분 세상의 흐름대로 산다. 흐름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흐름을 거슬러 살면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다. 세상과 부딪치기 때문이다. 정의를 부르짓다 감옥에 간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억울한 옥살이를 한다. 그런데 이를 잘 극복하면 세상을 살아 가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이십여년동안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이토록 오랫동안 오로지 한길로 갈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젊은 시절 방황과 좌절, 그리고 억울한 옥살이 등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남들처럼 편안함과 안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런 일을 해 내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독일에서 니까야가 번역된 것은 우리나라보다 백년 가량 빠르다. 맛지마니까야가 번역된 것은 1902년의 일이다.
독일의 번역가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이 번역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노이만이 자비심 때문에 번역했다고 말했다.
니까야에서 묘사된 지옥이 독일에서의 30년 전쟁에서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고통스러운 것을 알아야 눈이 열립니다.”라고 말했다.
평생 살아가는 동력으로
“하필이면 나에게”라며 운명을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억울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전의 행위에 대한 과보일 것이다. 이전 생의 과보가 익어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도저히 이해 되지 않는 것도 있다. 하필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당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억울하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고통을 극복한 자는 힘을 갖춘다.
이는 경에서 언급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면서도” 또는 “얼굴이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면서도”라는 번역어에서도 알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했던 사람이 이를 극복하면 엄청난 힘이 생겨난다.
그 힘은 평생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 억울한 일을 잘 극복하면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
2019-04-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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