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로서 겪는 가장 위대한 도전은
‘지금 여기가 되는 것’,
상황을 꾸며내길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pre-sent 순간(너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보낸” sent 순간)에 대해 생각하길 그만두어라.
그 순간 속에 있어라.
기억하라,
너희는 이 순간을, 엄청난 진실의 씨앗을 품고 있는 그 순간을 하나의 선물로 자신에게 보냈다는 걸.
너희가
기억해내고 싶어 하던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도 그 순간이 도착하면 너희는 당장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속에 있는 대신, 너희는 그 순간 밖에 서서 그것을 판단하고 한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다시 반응한다re-acted. 다시 말해 너희는 예전에 했던 식으로 행동한다.
이제 이 두 단어를 잘 살펴보라.
REACTIVE (반응하는)
CREATIVE (창조하는)
이 둘은 같은 단어이다.
단지 “C”만 움직였다!
그러니 너희가 매사에 정확하게 “C”를 놓을 때 너희는 ‘반응하지’ 않고 ‘창조하게’ 될 것이다.
정말 현명하시군요.
음, 신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어쨌든, 보다시피 내가 지적하려는 바는,
각각의 순간을 그에 대한 사전 생각 없이 깨끗한 상태로 만날 때,
너희는 예전의 자신을 재연(再演)하는 대신 지금의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삶은 창조 과정이다.
그런데 너희는 줄곧 그게 마치 재연 과정인 것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느 누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자신의 이전 체험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에 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불러내고,
그에 따라 대응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정상normal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자연스러운natural 것은 아니다.
“정상”이란 건 일상적인 것을 뜻한다.
“자연스러운” 건 애써 “정상”이려고 하지 않을 때의 너희 상태이다.
자연스러움과 정상은 같은 게 아니다.
특정 순간에 너희는 정상인 일을 할 수도 있고, 자연스런 일을 할 수도 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떤 것도 사랑보다 더 자연스럽지는 않다.
사랑에 차서 행동한다면 너희는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고 화내고 분개하면서 반응한다면,
너희는 정상으로 행동할 수는 있지만, 결코 자연스럽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제 모든 이전 체험들이 특정 “순간”이 고통스러울 거라고 비명을 지르는 판에
제가 어떻게 사랑에 차서 행동할 수 있습니까?
네 이전 체험을 무시하고 그 순간 속으로 들어가라.
‘지금 여기’에 있도록 하라.
자신을 새로이 창조함에 있어 지금 당장 할 일이 무엇인지 살피도록 하라.
기억하라,
이것이 너희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임을.
너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되고자 하는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이런 식으로, 이 순간, 이곳에. 모든 삶의 목적이 이것이다.
삶이란 끝없이 계속되는 재창조의 과정이다.
너희는 가장 고귀한, 다음 단계의 자신에게 대한 관념을 그려보면서
계속해서 자신을 재창조해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자기가 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고층빌딩에서 뛰어 내린 사람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의 “이전 체험”과 “남들을 관찰한 체험”을 무시하고 빌딩에서 뛰어내렸지요.
떨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나는 신이다!” 외치면서요.
이건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는데요.
그렇다면 네게 말해주마.
인간은 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결과들을 이루어냈다.
인간은 병을 고쳤으며, 인간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웠다.
한 사람만 그랬죠.
너는 단지 한 사람에게만 물질 우주를 지배할 그런 권능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느냐?
단 한 사람만이 그런 권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지 않다.
홍해를 가른 건 누구였는가?
신이요.
사실이다.
그런데 신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건 누구였느냐?
모세요.
맞다.
그러면 병자를 치유해주고, 죽은 자를 일으켜 달라고 내게 부탁한 사람은 누구냐?
예수요.
그렇다.
그런데 너는 모세와 예수가 한 일을 너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그들이 그런 일을 한 게 아니죠!
그들은 당신에게 청했어요. 그건 다른 문제죠.
좋다.
우선은 네가 세운 틀을 따라가보자.
자, 너 자신은 이와 똑같은 기적을 내게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요청들을 들어줄 것 같으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너와 모세의 차이다! 그게 바로 너와 예수의 다른 점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청한다면
당신이 자신의 청함을 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그들은 자신에게는 아무 권능도 없지만 예수의 권능은 보았다고 믿는다
(혹은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을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청한다.
예수가 “왜 그렇게 놀라느냐?
너희 역시 이런 일, 아니 이보다 더한 일들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너희 모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희는 예수의 이름으로 청한다.
혹은 성모 마리아나 이런저런 “수호성인”이나 태양신이나 동방 신들의 이름으로.
너희는
항상 누군가의 이름을-그게 누구의 이름이든-내걸 것이다.
자신의 이름만 빼고!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빌딩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날 것이다.
공중부양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음,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벽을 걸어서 지나간 사람들도 있고, 자기 몸을 벗어난 사람들까지 있다.
그래요, 그래요. 하지만 저는 벽을 걸어서 지나간 사람을 실제로 본 적도 없다구요.
게다가 누구더러 그렇게 해보라고 하지도 않지요.
또 저는 우리가 빌딩에서 뛰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아마 당신 건강에도 그리 좋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이 떨어져 죽은 건그가 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올바른 존재상태였다면, 그는 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너희와 다른 존재로 과시하고자 했기에,
결국 신성(神性)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빌딩 위의 그 사람은 자신이
나머지 너희와 다르다고 상상하는 자기 망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나는 신이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거짓으로 자기 증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더 크고 더 많은 권능을 지닌 존재로 구별하고 싶어 했다.
이것은 자기애ego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각기 분리된 자기애로
본래 ‘하나’인 것을 복제하거나 증명할 수 없다.
빌딩 위의 그 남자는 자신이 신임을 증명하려 함으로써
만물과 자신의 통일이 아닌 분리만을 증명했다.
결국 그는 ‘신성 아님’을 증명함으로써 신성을 증명하려 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통일성을 증명함으로써,
또 그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나(그리고 바라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통일성과 전체성을 봄으로써 신성을 증명했다.
이 점에서 그의 의식과 내 의식은 하나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불러내는 건 무엇이나
그 ‘성스러운’ 순간에 그의 ‘신성한 현실’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을 이루려면 ‘그리스도의 의식’만 있으면 된다! 그게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사실 그렇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게 만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식을 이루었다.
나사렛 예수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가 되었다.
너 역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고자 하면,
그렇게 되길 선택하면.
하지만 그것은 네가 날마다 순간마다 내려야 하는 선택이다.
그것을 네 삶의 목적 자체로 삼아야 하는 선택이다.
사실 그것은 네 삶의 목적이다.
단지 네가 그것을 모를 뿐이다.
하지만 네가 그것을 안다 해도,
네가 자신의 바로 그 절묘한 존재 이유를 기억해낸다 해도,
네가 왔던 그곳에 이를 방법을 알게 될 것 같지는 않구나.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어떻게 해야 지금 있는 곳에서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나요?
내가 다시 말해주겠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저는 35년 동안 “구하고” “두드려” 왔습니다.
제가 그런 식의 설교를 지겨워해도 용서해주시겠지요?
환멸을 느낄 만큼은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사실 네가 애쓴 데 대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해야겠지만,
말하자면 “노력 A”라고 해야겠지만,
나는 네가 35년 동안 구하고 두드려왔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그 말에 동의하진 못하겠다.
네가 구하고 두드리는 걸
35년 동안 했다 말았다 했다는 데는-대개는 말았다 쪽이지만-동의해줄 수 있지만.
이전에 네가 아주 어렸을 때는,
너는 문제거리가 생겼을 때라야, 뭔가가 필요할 때라야, 내게 왔다.
나이 들어 성숙해지자 너는
그게 신과 맺는 올바른 관계가 아닐 성싶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더 의미 있는 것을 창조하려 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나는 대개 소일거리일 뿐이었다.
더 시간이 지나서
신과의 영적 교류로만 신과의 결합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너는
교류를 도와주는 것들을 실천하고 행했다.
하지만 너는 이것들조차 산발적이고 일관성 없이 시도하곤 했다.
너는 명상에 잠겼고,
의식을 거행했으며,
기도와 찬송으로 나를 불러냈고,
네 속에 있는 ‘내 영혼’을 깨웠다.
하지만 네 마음에 들 때만,
네가 영감을 느낄 때만 그렇게 했다.
이런 식이라도 나(神)에 대한 네 체험이 영광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너는 네 삶이 95%를 분리의 환상에 사로잡혀 보냈다.
궁극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으로 깜박이는 순간들을 간신히 여기저기에 가지면서.
너는 지금도 여전히 차 수리와 전화요금 청구서와
네가 인간관계들에서 원하는 것들에 헌신하는 걸 삶이라 생각한다.
즉 너는 자신이 창조한 드라마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 드라마에 헌신하는 것을 삶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계속해서 드라마를 창조해내는 까닭을 깨달아야 하는데도,
너는 그 드라마를 연기해내느라 너무 바쁘다.
너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는 네 깨달음대로 살지 않는다.
너는 신과 교류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는 그 방법대로 행하지 않는다.
너는 자신이 그 길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너는 그 길을 따라 걷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는 내게 와 자신이 35년 동안 줄곧 구하고 두드려왔노라고 말한다.
나는 네 환상을 깨뜨리긴 싫지만.......
이제 내게 환멸을 느끼는 건 그만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할 때가 왔다.
자, 내가 말해주마.
“그리스도가”가 되고 싶은가?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라.
(너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가 네게 그 방법을 보여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처럼 되라.
(너는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그가 네게 가르침들을 남겼다.)
네가 그것을 구하려고만 하면,
너는 이 점에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네게 지침들을 주고 있으니,
나는 네게 어느 쪽으로 돌아야 하는지,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돌려야 할 방향과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대답과 행해야 할 행동과 해야 할 말들,
즉 네가 진실로 나와 교류하고 결합하려고만 하면,
어떤 현실을 창조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작고 조용한 내면의 소리이다.
그냥 내게 귀 기울이기만 하라.
전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은데요.
천만에!
지금 이 순간에도 넌 그렇게 하고 있다!
다만 이제부터는 항상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렇다고 항상 노란 종이철을 끼고 다닐 수는 없지요.
모든 걸 그만두고 당신에게 편지 쓰는 일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 멋진 대답들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기 바라면서요.
고맙다.그 대답들이 멋지다니!
그런데 여기 또 하나 멋진 대답이 있다. 아니다, 넌 할 수 있다!
내 말뜻은, 만일 누군가가 네게 신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고,
즉 직접적인 연결고리와 직접적인 연결선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해봐야 잊지 말고 종이와 연필을 항상 곁에 두는 것뿐이라고 한다면,
너는 그렇게 하겠느냐?
음, 물론 그렇게 하죠.
그런데 너는 방금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니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어찌된 일이냐?
너는 뭘 말하고 있는 거냐? 어느 쪽이 네 진실이냐?
그런데 이제 ‘좋은 소식’은
너는 종이철과 펜조차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함께 있다.
나는 펜 속에 살지 않는다.
나는 네 속에 산다.
그게 정말이죠?........ 제 말은 그 말을 진짜로 믿어도 되냐는 겁니다.
물론 너는 믿어도 된다.
그것은 내가 태초부터 너희에게 믿어달라고 부탁해왔던 것이고,
예수를 포함하여 모든 선각자들이 너희에게 해왔던 말이다.
그것은 중심되는 가르침이며, 궁극의 진리이다.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시간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이젠 믿습니다.
예전의 어느 때보다 더 그렇다는 얘깁니다.
좋다. 그렇다면 나를 써먹어라.
종이와 펜을 꺼내드는 게 도움이 되면(그리고 네게는 그게 상당히 잘 맞는 것 같다는 말도 해야 하리라),
종이와 펜을 꺼내들어라. 더 자주, 날마다, 그래야 하다면 시간마다.
내게 가까이 오라.
내게로 가까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묵주 기도를 하고, 돌에 입맞추고, 동쪽을 향해 절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추를 흔들고, 근육을 움직여보라.
아니면 책을 쓰라.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너희는 각자 나름의 틀을 지니고 있다.
너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이해해왔고 나를 창조해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남자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여자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둘 다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느 쪽도 아니다.
너희 중 일부에게 나는 순수에너지이다.
또 일부에게는 너희가 사랑이라 부르는 궁극의 감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너희는 그냥
‘내가 ~ 이다’(I Am~.)고 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나는 ~ 이다.’
나는 네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이고,
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햇살이며,
네 얼굴 위에서 춤추는 비다.
나는 공기 속 꽃향기이고,
향기를 뿜어내는 꽃이며,
향기를 실어 나르는 공기이다.
나는 네 맨 처음 생각의 시작이고 네 마지막 생각의 끝이다.
나는 네 가장 멋진 순간에 반짝였던 아이디어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영광이다.
나는 지금까지 중에서 네 가장 사랑스런 일을 추진케 한 느낌이며,
그런 느낌을 몇 번이고 다시 갈망하는 네 부분이다.
네게 잘 맞는 일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예배든 의식(儀式)이든 논증이든 명상이든 생각이든 노래든 말이든 행동이든 간에,
네가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나를 기념하며 그렇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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