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우리가 몸으로 있는 동안에는 왜 시간이 존재하는 겁니까?

황령산산지기 2018. 12. 22. 15:52




개인 현실의 창조는 생각의 조절, 혹은 기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기도요?

 

기도의 최고 형태가 생각의 조절이다.

그러니 오직 좋은 것, 바른 것만을 생각하라. 부정과 어둠 속에 머물지 마라.

그리고 상황이 암울해 보이는 순간들이라도, 아니 특히 그런 순간들일수록,

오직 완벽만을 보고 오직 감사만을 표현하라.

그런 다음에는 너희가 다음번에 드러내고 싶은 완벽이 무엇일지만을 상상하라.

 

이 공식 속에 차분함이 있고,

이 과정 속에 평온함이 있으며,

이 깨달음 속에 기쁨이 있다.

 

이건 정말 굉장하군요. 정말 굉장한 정보입니다.

이걸 절 통해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걸 보내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네가 다른 때보다 더 '깨끗한' 때가 있고,

다른 순간보다 더 많이 열린 순간이 있다.

이제 막 헹궈낸 체처럼 그것은 더 넓게 '뚫려 있다'.

더 많은 그물눈이 열려 있는 것이다.

 

아주 멋지게 표현하십니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럼 다시 재생시켜보자.

 

몸에서 벗어난 영혼은 자신의 생각을

아주 조심스럽게 제어하고 조절하는 법을 재빨리 기억해낸다.

그가 뭘 생각하든, 바로 그것을 창조하고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혼들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다만 대체로 그 결과가 즉각적이 아니란 사실만 빼고.

 

자기가 상황을 벌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상황이 벌어진다는 환상,

그 문제에서 자신이 원인임을 잊게 만드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생각과 창조간의 이 '시간' 간격 - 며칠이나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될 수도 있는 - 이다.

 

내가 이미 여러 번 서술했듯이, 이 잊어버림은, '그 체계 속에 심어져' 있다.

그것은 과정의 일부다.

'자신이 누군지' 잊지 않고서는, 너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으니,

잊음을 불러오는 그 환상은 일부러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니 몸을 떠났을 때,

생각과 창조 사이의 공공연하고도 즉각적인 연결 관계를 보는 건

너희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충격적인 놀라움이겠지만,

그러고 나서 자기 체험의 창조에서

자신이 그 결과가 아니라 원인임을 기억해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대단히 즐거운 놀라움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는 생각과 창조 사이에 그런 지연이 있는데,

왜 죽고 나면 아무런 지연도 없는 겁니까?

 

너희가 시간이라는 환상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몸을 떠나면 시간이라는 매개변수에서도 떠나게 되니,

생각과 창조 사이에 어떤 지연도 있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그토록 자주 말씀하셨듯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군요.

 

너희가 이해하는 식으로는 아니다.

'시간'이라는 현상은 실제로는 관점perspective의 작용이다.

 

우리가 몸으로 있는 동안에는 왜 시간이 존재하는 겁니까?

 

그것을 있게 한 것은 너희가 지금 관점 속으로 들어오고, 지금 관점을 가정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관점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체험들을 단일 사건이 아니라

개별 조각들로 나눔으로써, 그것들을 훨씬 더 충분히 탐구하고 검토할 수 있게 만든다.

 

삶은 단일 사건, 지금 이 순간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 모두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 모든 곳에서.

지금 말고는 어떤 '시간'도 없고, 여기 말고는 어떤 '공간'도 없다.

여기와 지금이 존재하는 전부다.

 

그럼에도 너희는 여기와 지금의 장대함을 낱낱이 체험하고,

성스런 자신을 바로 지금 여기서 그 현실을 창조하는 자로서 체험하기를 원했다.

너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단 두 가지 방식,

단 두 가지 체험 영역이 존재했으니, 시간과 공간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너무나도 멋진 생각이어서 너희는 말 그대로 기뻐서 폭발했다.

그 기쁨의 폭발로 너희 부분들 사이에 공간이 창조되었고,

너희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아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 너희는 자신의 조각들을 바라보기 위해 그야말로 너희 자신을 찢었다.

너희라면 아마 너무나 행복해서 '펑 터져 버렸다'고 말하겠지만.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너희는 그 조각들을 주워들고 있다.

 

제 삶이 완전히 그래요! 전 그냥 그 조각들을 함께 모으고 있는 겁니다.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보려고 애쓰면서요.

 

그리고 너희는 소위 시간이란 장치를 써서,

조각들을 떼어내고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

자신이 뭔가를 창조하는 동안, 그것을 좀 더 충분히 이해하고 체험하려고 애써왔다.

 

너희는 단단한 물체란 게 기실 전혀 단단하지 않고, 사실 백만 가지 다양한 결과들

- 모두가 한꺼번에 벌어지기에 더 큰 결과를 빚어내는 다양한 상황들

덩어리임을 알면서도 현미경을 통해 그것을 살펴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시간을 너희 영혼의 현미경으로 사용한다.

바위의 우화를 생각해보라.

.....

 

그러니까 내가 '죽더라도', 나는 전혀 죽는 게 아니군요.

단지 '시간'이나 공간, 지금과 그때, 전과 후가 전혀 없는,

거시우주에 대한 인식으로 바뀌는 것뿐이군요.

 

맞다. 이해했구나.

....

 

그리고 소위 '죽을', 우리가 돌아가는 의식이 이 거시현실이고요?

 

그렇다. 하지만 너희가 돌아가는 거시현실조차도 훨씬 더 큰 거시현실의 미시현실일 뿐이다.

그리고 그 거시현실은 다시 더 큰 현실의 소부분이고....

또 그것은 다시....말하자면 끝없이 계속되는 영원한 세계다.

우리가 더 이상 그것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면서, 끊임없이 지금의 우리가 되고 있는 신, '존재' 자체다.

 

.....

 

이 모든 설명은, 제가 '혼이 몸에서 벗어났을 때는

'시간'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몸으로 있는 동안에는 왜 시간이 존재합니까? 라는

단 한 가지 물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씀하시는 건, 사실 '시간'이란 관점이다,

하지만 영혼이 자신의 관점을 바꾸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궁극의 실체를 체험한다는 것인 듯합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다. 너는 이해했다.

 

그리고 당신은, 거시우주에서는 영혼이 생각과 창조,

다시 말해 발상과 체험 간의 직접적인 연결 관계를 깨닫는다는 더 큰 측면을 지적 하셨구요.

 

 

그렇다 - 거시차원에서 그것은 바위를 보고 바위 내부의 운동을 보는 것과 같다.

분자 운동과 그것이 창조해내는 바위라는 외관 사이에는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도, 바위는 그냥 '있다'.

아니 사실 운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바위는 있는 것이다.

이 원인과 결과는 즉각적이다.

운동은 일어나고 있고, 바위는 '존재하고' 있다. 완전히 '동시' .

 

소위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깨닫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그냥 관점의 변화다.

너희는 더 많이 보기에 더 많이 이해한다.

 

죽고 나면 너희는 더 이상 자신의 이해로 한정되지 않는다.

너희는 바위도 보고 바위 안도 본다.

그때 너희는 지금이라면 삶의 가장 복잡한 측면처럼 보였을 것을 보고도

'당연하지' 라고 말할 만큼, 그 모든 것이 너희에게 너무나 명확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너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새로운 수수께끼들이 나타나리니,

우주 수레바퀴를 따라 돌면서 너희는 훨씬 더 큰 현실들, 훨씬 더 큰 진리들을 만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자신의 관점이 생각을 창조하고 생각이 만사를 창조한다는

이 진리를 기억해낼 수 있다면,

몸을 떠난 다음이 아니라 떠나기 전에 이것을 기억해낼 수 있다면,

너희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

출처 : 파라다이스 테라 (Paradise Terra)
글쓴이 : 파라다이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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