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그림자에 압도 되었을 때, 임종의 침대에 누운 자에게
이곳 저곳 강연을 찾아 다닙니다. 인터넷이나 모바일에 웹포스터가 뜨면 유심히 봅니다. 흥미가 당기면 먼거리라도 찾아 가서 경청합니다. 그런데 강연장에 가면 종종 보던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러려니 하지만 자주 부딪치게 되면 인사를 나눕니다. 강연장 친구라 볼 수 있습니다.
강연자는 준비해온 열과 성을 다해서 알려 줍니다. 듣는 사람은 편안한 자세에서 경청하면 됩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려 주고, 듣는 사람은 힘들이지 않고 그 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흡수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잘 듣는 것이야말로 남는 장사입니다. 말을 하는 것 보다 잘 경청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이득이라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정보를 술술 풀어 놓습니다. 듣는 사람은 힘들이지 않고 정보를 취득합니다. 그것이 사업정보일수도 있고 사적인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좋은 강연을 듣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수 년, 아니 일생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을 불과 몇 시간 만에 빨아 들이는 것입니다.
잘 듣는 것이 남는 장사
잘 들으면 남는 것이 많습니다. 그 사람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인생을 통째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을 때 뿐입니다. 듣고 나면 잊어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더라도,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 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수강생에게 요청되는 자세일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립니다.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고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기억을 넘어 더욱 더 요구합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하더라도,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 했습니다.
강연이나 강좌를 들었을 때는 기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억한 것을 사유해야 합니다. 사유하고 탐구 했을 때 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의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부처님당시에는 오로지 기억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필기구가 있어서 받아 적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녹음까지 할 수 있습니다.
‘누각의 경’(A3.105)에서
12월 첫번째 니까야강독모임이 전재성선생의 삼송테크노벨리 서고에서 열렸습니다. 연말이어서일까 자주 보던 얼굴들이 빠졌습니다. 아무래도 연말이라 이런 저런 행사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배움의 열망에 가득 찬 사람들은 먼 길을 마다 하지 않고 저녁 시간에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이번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세 개의 경을 독송했습니다. 그 중에서 ‘마음을 수호하지 않으면 신체적언어적정신적 행위가 부패한다’라는 주제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누각의 경’(A3.105)입니다.
왜 ‘젖는다’라 했을까?
누각의 경에서 핵심문구는 “장자여, 마음을 수호하지 않으면, 신체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고 언어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고 정신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신, 구, 의 삼업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는, 불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입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Citte gahapati arakkhite kāyakammampi arakkhitaṃ hoti. Vacī kammampi arakkhitaṃ hoti. Manokammampi arakkhitaṃ hoti.
Tassa arakkhitakāyakammantassa arakkhitavacīkammantassa arakkhitamanokammantassa kāyakammampi avassutaṃ hoti. Vacīkammampi avassutaṃ hoti. Manokammampi avassutaṃ hoti. Tassa avassutakāyakammantassa avassutavacīkammantassa avassutamanokammantassa kāyakammampi pūtiyaṃ hoti. Vacīkammampi pūtiyaṃ hoti. Manokammampi pūtiyaṃ hoti. Tassa pūtikāyakammantassa pūtivacīkammantassa pūtimanokammantassa na bhaddakaṃ maraṇaṃ hoti. Na bhaddikā kālakiriyā.
“장자여, 신체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고 언어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고 정신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으면, 그의 신체적 행위도 젖고 언어적 행위도 젖고 정신적 행위도 젖는다. 신체적 행위도 젖고 언어적 행위도 젖고 정신적 행위도 젖으면, 신체적 행위도 부패하고, 언어적 행위도 부패하고, 정신적 행위도 부패한다. 신체적 행위도 부패하고, 언어적 행위도 부패하고, 정신적 행위도 부패하면, 그의 죽음은 행복하지 않고 그의 임종은 행복하지 않다.” (A3.105)
부처님이 아나타삔띠까 장자에게 설한 경입니다. 부처님 당시 최고의 갑부에게 신, 구, 의 삼업에 대하여 청정하게 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부자들은 언제든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 구, 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지 않으면 ‘젖는다’고 했습니다.
경에서 ‘젖는다(avassutaṃ hoti)’라는 말은 ‘약한 것에 노정된다’라는 뜻입니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 오는 물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젖음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번뇌와 관련된 말이라 했습니다. 번뇌를 뜻하는 빠알리어 아사바(āsava)를 말합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that which flows’의 뜻이고 한자로는 ‘루(漏)’라 합니다.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행위를 수호하지 않으면 빈틈이 생겨서 물이 들어 오는 것처럼 번뇌가 일어날 것이라 합니다.
누각의 비유로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입니다. 몸과 입과 생각을 단속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누각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장자여, 예를 들어 누각이 잘 세워지지 않았다면, 용마루도 수호되지 않고 서까래도 수호되지 않고 벽도 수호되지 않는다. 용마루도 수호되지 않고 서까래도 수호되지 않고 벽도 수호되지 않으면, 용마루도 젖고 서까래도 젖고 젖고 벽도 젖는다. 용마루도 젖고 서까래도 젖고 젖고 벽도 젖으면 용마루도 부패하고 서까래도 부패하고 벽도 부패한다.” (A3.105)
누각은 여려 건축자재로 이루어진 집을 말합니다. 누각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용마루, 서까래, 벽으로 구성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마루나 서까래, 벽이 엉성하게 되어 있다면 비바람이 들이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누각의 비유는 법구경에서 “지붕이 잘못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듯이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Dhp.13)라는 게송을 연상케 합니다.
마음을 수호하지 않으면(citte arakkhite)
초막의 지붕이 잘못 이어져 있다면 비가 샐 것입니다.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감각기관이 잘 수호 되지 않으면 마치 다섯 가지 성문이 열려 있어서 도둑이 들어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장자여, 이와 같이 마음을 수호하지 않으면, 신체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고 언어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고 정신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는다.”(A3.105)라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말은 “마음을 수호하지 않으면(citte arakkhite)”라는 말입니다. 결국 키워드는 마음(citta)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수호하라고 했습니다. 눈, 귀 등 다섯 가지 감각의 문으로 들어 온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새로운 업을 짓지 않으려면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만일 알아차리지 못하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로 인하여 업을 짓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임종에 대하여
업에는 선업과 불선업이 있습니다. 일생동안 선업을 많이 지었다면 편하게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선업이 더 많다면 죽음이 두려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불선업을 지은 자에 대하여 “그의 죽음은 행복하지 않고 그이 임종은 행복하지 않다. (na bhaddakaṃ maraṇaṃ hoti. Na bhaddikā kālakiriyā.)”(A3.105)라 했습니다.
죽음과 임종은 비슷한 말 같지만 다릅니다. 빠알리어로는 죽음에 대하여 마라나(maraṇa)라 했고, 임종에 대해서는 깔라끼리야(kālakiriyā)라 했습니다. 둘 다 죽음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마라나는 일반적 죽음을 뜻하고, 깔라끼리야는 마지막 죽음의식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존재의 임종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재생연결식과 관련하여 설명했습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죽음의식은 바왕가의 마지막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존재의 최초의 마음이 재생연결식이고 한존재의 최후의 마음이 죽음의식입니다.
임종한다는 것은 이 생에서 마지막 죽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임종순간에 다음 생을 위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재생연결식이 니까야에는 보이지 않지만 연기법적으로 추론 가능합니다. 십이연기에서 행위를 조건으로 발생하는 의식이 바로 재생연결식이라는 것입니다.
돼지 도살업자 쭌다의 임종순간
누각의 경에 따르면 행복한 죽음과 행복하지 않은 죽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 게송이 법구경 15번에 있습니다. 게송에 따르면 한평생 불선업만 지어 온 자에 대하여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 슬퍼하고 사후에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Dhp.15)라 했습니다.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은 ‘돼지 도살업자 쭌다와 관련된 이야기(Cundasukarikavatthu)’로 전해져 옵니다.
돼지 도살업자 쭌다의 임종순간은 비참합니다. 한평생 선업이라고는 지어 본 적이 없는 그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괴이한 행위를 합니다. 인연담에 따르면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기어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한 것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어느 날 그는 병이 들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는데, 대아비지옥의 불길이 일어났다. 대아비지옥의 불길이 돼지 도살업자 쭌다의 앞에서 타오르자 그의 행동이 과거의 업에 일치하도록 변했다.”(DhpA.I.125-128)라 되어 있습니다.
도살업자 쭌다는 죽음에 이르러 마치 돼지처럼 꿀꿀 거리며 괴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업을 지은 자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법구경 16번 게송 인연담에 따르면 한평생 보시로 살아온 재가의 여신도는 임종순간은 행복했습니다. 인연담에 따르면 임종의 순간에 “여섯 천상계에서 온갖 장식으로 치장한 천 마리의 씬두 산 준마가 이끄는 백 오십 요자나 길이의 여섯 수레가 다가왔다.”(DhpA.I.151-154)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임종순간에 지은 업에 따라 미래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담마비자야(Dhammavijaya)
불교에서는 내생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생의 지옥이나 천상이야기만 한다면 현실은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수학자는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하더라도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단멸론적 주장을 합니다.
간난아기론과 같은 단멸론적 주장은 법구경 게송을 보면 무너집니다. 법구경에 따르면 평생 불선업을 저지른 자는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이번 생에도 고통을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죽음에 이른 자가 자신의 더러운 업을 보면서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 슬퍼하고 사후에도 슬퍼한다.” (Dhp.15)라는 구절로도 확인됩니다.
평생 선업을 짓고 살았다면 두 세상에서 행복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선행을 행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Dhp.16)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보시는 바보가 하고 현자는 받는다.”라 합니다. 이는 단멸론적 사견입니다. 이와 같은 사견을 가지고 산다면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서 살 것입니다. 그러나 보시공덕이 수승함을 아는 자는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임종순간에 나타나는데 극과 극입니다.
선업을 하면 이 세상과 저 세상, 두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가르침의 실천과 관련 있습니다. 아소까왕은 비문에서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라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저 세상의 행복도 보장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행복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담마비자야(Dhammavijaya)라 합니다.
마음의 그림자에 압도 되었을 때
불선업을 지으면 저 세상에서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도 불행한 삶을 살기 때문에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설령 그가 완전범죄를 저지르고 숨어 산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양심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원초적 불안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서는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 라 하여 ‘산그림자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림자가 점점 커져서 자신을 압도하게 되었을 때 그림자에 짓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살인을 하여 세상사람들을 감쪽 같이 속였을지라도 문득문득 떠 오르는 끔찍한 장면은 떠오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업에 대하여 부처님인 해질녘 짙게 드리워진 산그림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임종의 침대에 누운 자에게
평생 불선업을 지은 자는 이 세상에서도 괴롭고 저 세상에서도 괴롭습니다. 그가 죽음에 이르러 임종의 순간에 미래 태어날 곳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산그림자의 비유를 들어 악업에 따른 원초적 불안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우선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좋은 곳에 있으면서 악업을 지닌 자에게는 “그것들은 그때 마다 그에게 걸린다.”라는 등의 말이 있는 까닭에 임종의 침대에 누운 자의 정신의 문에 그가 쌓았던 그대로의 악업이나 악업의 인상이 나타난다.”(Vism.17.136)
이 문장은 욕계선처에서 악처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자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살다가 악처에 떨어질 운명을 가진 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경전의 문구를 인용하여 “그것들은 그때 마다 그에게 걸린다.”라 했습니다. 이것은 시시때때로 엄습하는 악업의 그림자를 말합니다.
악업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났을 때
악업의 그림자는 임종의 순간에 짙게 드리워지는데 마치 해질녘 산그늘이 짙게 드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악업의 그림자에 압도 되었을 때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악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을 조건으로 생성되어 등록이 끝나는 통각의 인식과정의 직후에 존재지속의 고리를 대상으로 삼아 죽음의 마음이 생겨난다. 그것이 소멸할 때 거기에 나타난 업이나 업의 인상을 조건으로 아직 끊어지지 않은 오염의 힘에 의해서 향하는 나쁜 존재의 운명에 속하는 결생의 마음이 생겨난다. 그것이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죽음의 마음 직후에 일어나는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결생의 마음이다.”(Vism.17.136)
임종의 순간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재생케 하는 마음의 오염원이 있는 한 어떤 존재로든지 태어날 수밖에 없는데, 이전에 행위를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남을 말합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그가 악업을 지었다면 악업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가 때문에 악처에 태어날 것입니다. 만일 선업을 지었다면 선업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선처에 태어날 것입니다. 누구든지 행위에 따라 과보를 받는 연기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흔히 말하기를 고이면 썩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 ‘누각의 경’에서는 ‘젖으면 썩는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집을 제대로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붕을 얼기설기 대충 엮었다면 비가 줄줄 셀 것입니다. 비가 세면 젖게 되고 젖게 되면 썩게 될 것입니다.
다섯 가지 감각의 문을 수호하지 못했을 때 비가 세는 것과 같습니다. 다섯 가지 도둑이 들어 오는 것을 막지 못하다면 도둑에게 지배당할 것입니다. 이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도둑을 허용하는 것은 감각의 문을 지키지 않은 것도 큰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문(意門)’입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것입니다. 강한 대상이 들어 올 때는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비교해 보아 좋고 싫은 느낌이 발생합니다. 접촉에 따른 느낌입니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를 하는데 업을 짓는다고 합니다.
행위는 반드시 과보를 냅니다. 다만 익는 조건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업이 달리 익는다고 하여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 합니다. 이처럼 업의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과보로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마음을 수호하지 않으면, 신체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고, 언어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고 정신적 행위도 수호되지 않는다.”(A3.105)라 했습니다.
“초암은 지붕이 이어졌고,
바람이 들이치지 않으니, 쾌적하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마음은 잘 집중되어 해탈되었고,
용맹정진하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소서.”(Thag.1)
2018-12-18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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