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사자, 코끼리, 황소로 묘사된 부처님

황령산산지기 2018. 12. 15. 18:25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우월한 신체적 특징에 대하여 사슴, 사자, 황소 등 동물로 비유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브리흐마유의 경을 보면 부처님의 32상에 대한 묘사에서 동물이 등장합니다.

 

32상과 관련하여 사슴에 대해서는 여덟 번째 특징으로서 존자 고따마는 사슴과 같은 장딴지를 갖고 있습니다.”(M91)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슴의 비유는 이 경이 유일합니다. 또 부처님에 대하여 열일 곱 번째 특징으로 사자와 같은 윗몸과 스물 두번째 특징으로 사자와 같은 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사자가 두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자의 강인한 신체적 이미지라 볼 수 있습니다.

 

소와 관련해서는 서른 번째 특징으로 황소와 같은 속눈썹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소는 부처님의 성씨인 고따마(Gotama)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말, 호랑이도 비유의 대상이긴 하지만 거의 한번에 그칩니다. 그렇다면 어떤 동물의 비유가 가장 많이 나올까? 단연 사자와 꼬끼리와 황소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육식동물이고 황소와 코끼리는 초식동물입니다.

 

사자후(獅子吼), 최상의 지혜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

 

첫째, 부처님을 사자로 비유한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제1편 근본오십편을 보면 사자후의 품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교도들을 대할 때 그대들은 사자후를 올바로 부르짖어야 한다.”(M11)라고 당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후(獅子吼 : sīhanāda)는 최상의 소리, 두려움 없는 소리, 논박할 수 없는 소리를 말합니다.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에 대하여 사자의 외침처럼 보고 있습니다. 이는 사자후의 큰 경’(M12)에서 여래십력으로 사자후를 토하며 하느님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소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사자의 경’(S22.78)에 따르면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모두 두려움에 떤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설법하면 사자후와 같습니다. 특히 영원히 살 것 같은 천신들에게 무상의 진리를 설 했을 때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 했습니다. 이러한 사자후는 최상의 지혜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입니다.

 

부처님을 사자로 묘사한 것으로 잠자는 자세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S4.7)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습니다. 잠을 잘 때도 알아차리며 자고, 잠을 깰 때도 알아차리며 깸을 말합니다. 큰대자로 하늘을 보고 누워 자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여 자는 것에 대하여 사자처럼 잠을 잔다고 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여래들은 행동이 사자와 같다.”(Vism.16.63)라 하여 부처님의 행동을 사자처럼 비유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이교도들의 행동은 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사자는 화살이 날아오면 그 화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수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개는 곤봉으로 때리면 사람을 향하지 않고 곤봉을 물어 뜯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행동이 사자와 같은 것은 원인과 결과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자처럼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원인만 중요시할 뿐이지 결과를 중요시 하지 않기 때문에 개처럼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육식동물로서 부처님을 사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호랑이로 묘사된 것을 보면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Sn3.1)에서 ‘대왕이시여, 그 수행승은 빤다바 산 앞쪽에 있는 굴속에 호랑이나 황소처럼, 그리고 사자처럼 앉아있습니다.”(Stn.416)라 했습니다. 게송에서는 호랑이, 황소, 사자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을 호랑이로 묘사된 것으로는 이 경이 유일합니다. 육식동물에서는 사자가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그대들이여, 눈이 있는 자,

말씀하시는 것에 경청하라.

화살을 뽑아버린 위대한 영웅이

사자처럼 숲속에서 포효한다.”(M92)

 

 

나가(nāga)를 왜 코끼리라 하는가

 

두번째, 부처님을 코끼리로 비유한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을 코끼리로 비유한 것은 무수하게 많이 나옵니다. 숫따니빠따 싸비야의 경에서 유행자 싸비야가 부처님에게 어째서 코끼리라고 부릅니까?”(Stn.518)라며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세상에 있으면서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온갖 족쇄와 속박을 잘라버리고, 해탈하여 어떠한 곳에서든 집착이 없다면,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를 코끼리라고 합니다.”(Stn.522)라고 답합니다.

 

초기경전에서 코끼리라는 말은 나가(nāga)를 번역한 것입니다. 나가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보면 ‘a cobra, an elephant; the iron-wood tree; a noble person’라 되어 있습니다. 나가는 코브라나 코끼리, 고귀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코브라라는 말 대신 용()이라고도 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주로 코끼리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나가는 부처님의 제자인 수행승을 의미하기도 하고 부처님에게도 쓰인 말입니다.

 

코끼리는 동물중에서 가장 큰 몸집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비유로도 사용됩니다. 맛지마니까야 코끼리 발자취에 대한 비유의 경을 보면 사리뿟따가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M28)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의 가르침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을 모두 다 포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코끼리발자국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잘 길들여진 코끼리는

 

코끼리는 길들이면 여러가지로 유용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사군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군대인 코끼리군(象軍)으로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Sn3.1)에서 빔비사라왕이 출가한 부처님에게 코끼리의 무리가 시중드는 위풍당당한 군대를 정렬하여 당신께 선물로 드리니 보십시오.”(Stn.421)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왕족출신인 수행승을 보고서 코끼리군을 이끄는 자신의 장군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코끼리를 길들이지 않으면 제멋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래서 코끼리 조련사가 필요합니다. 또한 잘 길들여진 코끼리는 사군중의 최상의 부대일 뿐만 아니라 왕들이 타고 다녔습니다. 이는 마침 꼬쌀라 국왕 빠쎄나디는 코끼리를 타고 코끼리로 갈 곳까지 가고, 코끼리에서 내려 걸어서 존자 아난다가 있는 곳을 찾았다.”(M88)라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코끼리는 지위의 상징입니다. 이는 대왕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지상에서 수레에 오르고 수레에서 말의 등에 오르며 말의 등에서 코끼리의 어깨에 오르고 코끼리의 어깨에서 궁전으로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S3.21)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잘 길들여진 코끼리는 부처님 제자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조련사에 의해 잘 길들여진 코끼리는 오로지 한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코끼리 조련사에 의해서 훈련된 코끼리는 달리더라도 한 방향,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으로 달린다.”(M137)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를 용상(龍象)이라 하는 것은

 

코끼리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로서는 열가지 능력을 갖추고 삼매에 든 위대한 코끼리를 이 세상의 최상의 승리자들 갈애는 그들에게 찾아볼 수 없네.”(S22.76)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열 가지 능력이란 팔정도에 올바른 지혜와 올바른 해탈을 더한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입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능력을 갖춘 자에 대하여 위대한 코끼리라 했습니다.

 

부첨님 제자들은 잘 훈련된 코끼리와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이와 같이 두 분의 위대한 코끼리는 훌륭하게 말하고 훌륭하게 대화하며 서로 기뻐했다.”(S21.3)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위대한 코끼리(mahanaga)는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지칭합니다. 나가는 용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큰 스님을 지칭할 때 용과 코끼리라는 뜻으로 용상(龍象)’이라고도 합니다. 동아시아 개념으로 따진다면 사리뿟따와 목갈라는 두 분의 큰 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두 분의 위대한 용은이라 번역되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을 코끼리로 묘사한 장면이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에서도 보입니다. 바라문 셀라는 부처님에게 설법을 듣고 제자가 되기로 합니다. 셀라의 제자들도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에 셀라는 이들 삼백 명의 수행승은 합장하고 서 있습니다. 영웅이여, 발을 뻗쳐주십시오.”(Stn.573)라 합니다. 여기서 삼백 명의 제자를 코끼리들이라 했습니다.

 

코끼리는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

 

코끼리는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하늘사람이  세존이시여, 수행자 고따마는 참으로 코끼리입니다.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이미 생겨난 몸의 고통을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코끼리처럼 상처받지 않으며 참아냅니다.”(S1.38)말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의 대명사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깃자꾸따 산에서 바위를 굴려 뜨렸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바위는 중간에 다른 바위에 멈추었으나 그 충격으로 돌조각이 부처님 발에 날아 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에 대하여 이와 같이 사람 가운데 코끼리, 사람 가운데 사자, 사람 가운데 준마, 사람 가운데 큰 소, 사람 가운데 황소, 사람 가운데 길들여진 자를 존경하지 않으면, 그는 눈먼 자가 아니고 무엇이랴?”(S1.38)라 했습니다. 부처님을 코끼리, 사자, 준마, 황소로 비유한 것입니다.

 

코끼리로서의 부처님은 최상의 예우를 받습니다. 학인 멧따구는 부처님에게 설법을 듣고 나서 코끼리시여, 그럼 당신 가까이 가서 예배드리겠습니다.”(Stn.1058)라 합니다. 또 유행자 싸비야가 부처님에게 어째서 코끼리라고 부릅니까?”(Stn.518)라며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말합니다.

 

 

세상에 있으면서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온갖 족쇄와 속박을 잘라버리고,

해탈하여 어떠한 곳에서든 집착이 없다면,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를 코끼리라고 합니다.”(Stn.522)

 

 

싸끼야 족의 황소

 

세번째, 부처님을 소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성씨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성씨 고따마(gotama)에서 고(go)는 소(ox)를 뜻합니다. 고따마는 소중에서도 최상의 소를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아시따선인은 부처님이 탄생했을 때 가슴에 안아 보고서 싸끼야 족의 황소를 안고 인상을 살피더니 기쁜 마음으로 이 분은 위없는 님,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 났습니다!’라고 환성을 질렀다.”(Stn.690)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에 대하여 싸끼야 족의 황소(sakīyapugava)라 했습니다. 황소로서 부처님은 32상에서 서른 번째 특징으로 황소와 같은 속눈썹을 지니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황소로서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돌조각의 경에서도 부처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참으로 큰 소입니다.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이미 생겨난 몸의 고통을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코끼리처럼 상처받지 않으며 참아냅니다.”(S1.38)라 했습니다. 깃발의 경에서는 인간 가운데 황소인 깨달은 님을 생각할 수 없으면, 그 때는 해탈로 이끄는 잘 설해진 가르침을 생각하라.”(S11.3)라 했습니다.

 

인도에서 왜 황소가 대접받을까

 

황소의 이미지는 늠름하고 기품있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육식동물에서 보기 힘듭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에서 육식동물은 최상위의 포식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라이언킹도 비참한 운명이 됩니다. 더구나 육식동물은 배고픔을 면하려면 초식동물의 어린 새끼까지도 공격하는 비굴함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초식동물은 풀이나 나뭇잎을 먹기 때문에 약육강식이 아닙니다. 더구나 코끼리, 소와 같이 몸집이 큰 초식동물은 늠름한 자태로 인하여 기품까지 갖추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코끼리나 소를 부처님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황소예찬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왕족의 경에서는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두 발 가진 자 가운데는 왕족이, 네 발 가진 것 가운데는 황소가, 아내 가운데는 젊은 부인이, 아들 가운데는 맏아들이 가장 낫네.”(S1.14)라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네 발 가진 동물 가운데 황소가 가장 수승함을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암소일 것입니다.

 

인도성지순례를 가면 길거리에 소가 자유롭게 돌아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인도답다는 바라나시의 번잡한 시내에도 소가 유유히 걸어 다닙니다. 이처럼 소가 우격(牛格)이 있어서 대접을 받는 나라로서는 인도가 유일할 것입니다.





왜 인도에서는 소를 도살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가이드는 소는 우유를 주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사람의 모유다음으로 중요한 우유는 사람들을 먹여 살립니다. 그리고 우유에서 나오는 각종 유제품은 최상의 음식재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중에서도 암소가 우대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배경 인연담을 보면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암소나 갈색의 황소를 보면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배고픈 민중에게는 우유를 주는 암소야말로 어머니 같은 존재라 볼 수 있습니다.

 

늠름하고 기품이 있는 황소

 

과거칠불중에 벳사부(Vessabhū) 부처님이 있습니다. 벳사부부처님은 비빳씬부처님과 씨낀부처님에 이어서 세 번째 부처님입니다. 과거24불 가운데 21번째 부처님으로 31겁 전에 출현했습니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태어날 때 황소처럼 승리의 외침을 냈으므로 벳사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과거 부처님도 황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승리자로서 부처님은 황소가 상징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약육강식의 육식동물이 아닌 풀을 뜯어 먹고 사는 몸집이 큰 황소입니다. 코뿔소도 일종의 소라고 볼 수 있는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35)라 하여 고독한 수행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황소는 늠름하고 기품이 있습니다.

 

 

 황소처럼 늠름하고 기품 있는 영웅,

위대한 선인, 승리자, 동요 없는 님,

목욕재계한 님, 깨달은 님,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릅니다.”(Stn.646)

 

 

사자, 코끼리, 황소로 묘사된 부처님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을 동물로 비유한 것에 대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 사자, 코끼리, 황소입니다. 이 밖에도 사슴, 호랑이, 준마 등이 있기 하지만 매우 드뭅니다.

 

사자로서 부처님은 위풍당당한 외관의 모습과 포효하는 목소리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전승되어오는 게송 중에 나라시하가타가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경전을 근거로 하여 예로부터 내려온 게송입니다. 모두 아홉 개로 구성되어 있는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바로 이분이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옵니다. (esa hi tuyha pitā narasīho)”라는 후렴구로 끝납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다음 처음으로 카필라성을 방문 했을 때, 야소다라왕비가 발코니에서 탁발하는 모습을 보고서 일곱살 난 아들에게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과 덕성에 대하여 사자의 비유를 들어 말해 준 것입니다.

 

부처님을 동물로 비유했을 때 사자를 제외하고 약육강식의 육식동물이나 개나 돼지와 같은 잡식동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코끼리나 황소에 대한 비유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가에 대해서는 용이 아닌 코끼리라 하여 잘 길들여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부처님이나 부처님제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을 때는 무소는 고독한 수행자를 상징합니다. 황소는 초식동물이지만 육식동물처럼 야비하지 않습니다. 황소의 늠름한 모습은 기품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자와 코끼리와 황소가 부처님을 상징하는 동물로 묘사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황소처럼 모든 속박들을 끊고,

코끼리처럼 냄새나는 넝쿨을 짓밟아,

나는 다시 모태에 들지 않을 것이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Stn.29)

 

 

2018-12-14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