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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카르마의 메커니즘 - 카르마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황령산산지기 2018. 10. 6. 15:01




카르마의 메커니즘

 

 

카르마의 작용이 고급계에 나타나는 모습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행위가 상호 작용하여 에너지 세포(또는 채널)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힘들이 그의 주변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그 힘들은 당사자가 작동시킨 에너지들을 통해서만 작용하고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렇게 계속 이 에너지 세포(채널)들의 수를 늘려 감에 따라 그에게 미치는 가능성 또한 계속 조정된다. 그리고 이 모든 무쌍한 변화를 다루고 대처해 가는 과정에서 카르마의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적응성과 융통성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카르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자기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또 다른 측면에서 카르마 작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사람이 겹겹으로 된 둥근 우주 한 가운데 홀로 있다고 상상하자. 그리고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구면(球面)을 향해 에너지 파를 송출시킨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에너지는 무수한 구체들 중 어느 하나의 내부 표면을 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반사되어 본래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때 어떤 구()로부터 반사될지는 발출된 에너지의 성질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시간도 자동적으로 결정되게 된다

 

어떤 행위들에 의해 생성된 에너지는 비교적 가까운 구()를 치고 빨리 반사되어 돌아오는 반면 다른 에너지들은 아득히 먼 곳으로 송출돼 몇 생 후에나 돌아오게 될 것도 있다. 그러나 언제가 되었든 본래의 출발 지점으로 돌아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구()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옆 사람이 발출한 에너지가 자신의 에너지들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다. 그것들은 마치 두 개의 등불에서 나온 빛처럼 간섭 없이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진공 상태의 매질 속을 운동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양은 발출된 양과 꼭 같다.

 

 

카르마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인도인들은 그것을 산치타(Sanchita), 프라라브다(Prarabdha), 크리야마나(Kriyamana)라 부른다.

 

첫 번째 산치타는 아직 소진되지 않은 카르마의 전체 총량이다. 좋은 것이 되었든 나쁜 것이 되었든 소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카르마이다. 우리는 그것을 총 카르마라 부른다

두 번째 프라라브다는 총 카르마의 일부분으로 이번 생에서 소진될 카르마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생의 운명이라 부른다

세 번째 크리야마나는 현재의 행위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카르마이다.

 

이것들 중에서 점성가들이 읽으려고 애쓰는 것은 두 번째 유형의 카르마이다. 하지만 점성가의 예측은 종종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카르마의 개입으로 무용지물이 되곤 한다. 분명한 것은 총 카르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본래 현생의 운명 속에 포함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날 수는 있다

 

한 개인의 프라라브다 카르마(, 권능자에 의해 현생에서 소진시키도록 선택된 카르마)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 중 하나는 육체에 시현돼야 하는 카르마로 데바라자들에 의해 조형 엘리멘탈(데바라자가 만든 상념체)에 주입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인생을 통하여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훨씬 더 큰 요소는 개인에 닥칠 행운과 불운의 카르마이다. 이 카르마는 또 다른 상념체에 주입되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계에 내려오지 않고 멘탈계 상에 남아 있는다

 

그 상념체는 멘탈 차원으로부터 사람을 내리 덮으며 조금씩 나누어 발출될 기회를 잡는다. 그것은 섬광(또는 손가락)같은 한 줄기 광선을 송출하여 아래에 닿게 한다. 때로는 물질계까지 깊이 내려오고 때로는 아스트랄계까지만 도달한다. 우리는 그것을 종종 멘탈계의 직사광선또는 멘탈계의 손가락이라 부른다

 

하계로의 그러한 발출 행위는 그 엘리멘탈(상념체)이 완전히 텅 빌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조형 엘리멘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결국 사라간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멘탈계의 질료로 분해, 환원되는 것이다.

 

카르마의 작용은 우리가 지금 끊임없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원인(즉 새로운 카르마)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새로운 원인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방금 말한 그 엘리멘탈은 본래 프로그램에 입력된 대로 내용물들을 방출하게 된다

 

이때 편리한 점성학적 시기와 주변 상황이 이용된다. 왜냐하면 그 작용을 보다 용이하고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천궁도가 상당히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충분히 진화하여 강한 의지를 소유하게 된다면 그 엘리멘탈의 작용은 많이 변경될 수 있고 결코 천궁도에 예정된 대로 운명이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때로 변경 요소들이 개입됨으로 인해 우리가 죽는 시점까지 엘리멘탈이 다 소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때 남겨진 것은 다시 총 카르마 속에 흡수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음 생을 위한 또 다른(그러나 다소 유사한) 엘리멘탈이 준비된다

 

투시가는 축적된 카르마 덩어리가 자아 위에 떠도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그것은 대개 유쾌한 광경이 아니다. 흔히 그렇듯 선과(善果)보다는 악과(惡果)를 더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인류의 발전 초기 단계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결코 해서는 안될 많은 일들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이 가장 저급한 계()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날 문명인들은 최소한 악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관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행악의 카르마를 만들 가능성 또한 적어졌다

 

우리는 때로 어리석은 짓도 하고 실수도 저지른다. 그러나 대체로 평균적인 문명인은 될 수 있는 한 악행보다는 선행을 하고자 노력한다. 결국 악업보다는 선업을 더 많이 만들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모든 선업이 그 동안 축적된 거대한 카르마 속에 들어간다 해도 악 카르마의 양이 훨씬 더 우세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가장 선한 생각, 선한 행위들은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을 발전시킨다. 그것들은 우리의 매체들(육체와 영체)을 고급한 힘에 맞춰 조화롭게 진동할 수 있게 만들며 우리의 내부에서 용기, 결단, 사랑, 헌신과 같은 고급한 성품을 발현해 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효과는 우리 자신 속에, 우리의 매체들 안에 나타나는 것이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축적된 카르마 속에서가 아니다.

 

한편, 만일 우리가 마음속에 명백히 보답을 바라고 어떤 선행을 한다면 그에 대한 선과가 돌아오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선과는 물질화되어 나타날 때까지 저장된 상태로 있다. 결국 이것은 악 카르마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지상에 묶어 놓게 된다. 선과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진보를 원하는 사람은 절대 결과를 바라지 않고 선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기라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했을 경우 일상적인 선행의 결과가 그를 묶어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악행의 결과를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행의 결과 또한 피할 수 없다. 만일 돌아올 보답을 생각한다면 바란대로 결과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완전히 잊고 온 마음을 다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에 한다면, 결과로 돌아올 모든 에너지가 성품을 발전시키는데 쓰여진다. 따라서 저급계에 묶어 둘 수 있는 에너지는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좋은 보답이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결과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완전히 잊고 오직 로고스의 힘의 통로가 되기만을 생각하는 자는 그 행위의 결과로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보다 나은 로고스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많은 이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선행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 타인을 행위에 대한 결과의 동참자로 만든다. 여기서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카르마의 작용에 개입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신지학도라면 마스터의 이름으로) 선행을 한다. 그런 경우 정의의 법칙 상 그 결과 중 일부는 그리스도(또는 마스터)에게 돌아가야 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결과를 만든 것은 그리스도(또는 마스터)에 대한 상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위대한 성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엄청난 원조의 마그네티즘이 그 성자들에게 계속 공급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의 결과는 결코 어떤 식으로도 그 위대한 성자들을 묶지 못한다. 단지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영적인 힘에 추가적인 힘만을 공급할 뿐이다.

출처 : 파라다이스 테라 (Paradise Terra)
글쓴이 : 파라다이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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