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책!책!

[스크랩] 똥처럼, 꽃처럼, 꿀처럼 말하는 자, 앎(知)과 봄(見)에 대하여

황령산산지기 2018. 1. 7. 05:39


똥처럼, 꽃처럼, 꿀처럼 말하는 자, ()과 봄()에 대하여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제천참사가 가슴 아프게 합니다. 29명이 사망한 참사 상당수는 여성들입니다. 참사가 일어나면 대개 서민이나 소시민 등 힘 없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용산참사, 세월호참사 등 잊을 만 하면 비극적 소식을 접합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 세계는 불안정합니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세상에서 똑바로 알고 똑바로 보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폭류에 휩쓸려 윤회의 바다로 떠 밀려 내려가기 쉽습니다. 그래서일까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을 보면 출가이유로서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라 했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12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앎과 봄에 대하여 주로 들었습니다. 앎과 봄은 지()와 견()이라고도 합니다. 아는 것뿐만 아니라 볼 줄도 알아야 하고,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알 줄도 알아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똥과 꽃과 꿀의 비유와 관련된 꽃처럼 말하는 자의 경(A3.28)’을 독송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똥처럼 말을 하는 사람, 꽃처럼 말을 하는 사람, 꿀처럼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누가 똥처럼 말하는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공회 가운데서나 군중가운데서나 친족 가운데서나 조합원 가운데서나 법정가운데서나 증인으로 소환되어, ‘이 사람아, 와서 자네가 말해 보게!’라고 추궁받으면, 그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말하거나,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보지 못하면서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보고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또는 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이 똥처럼 말하는 사람이다.

 

수행승들이여, 누가 꽃처럼 말하는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공회 가운데서나 군중가운데서나 친족 가운데서나 조합원 가운데서나 법정가운데서나 증인으로 소환되어, ‘이 사람아, 와서 자네가 말해 보게!’라고 추궁받으면, 그는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알면 ‘안다’고 말하며, 보지 못했다면 ‘보지 못했다’고 말하거나, 보았으면 ‘보았다’고 말하며,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또는 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이 꽃처럼 말하는 사람이다.

 

수행승들이여, 누가 꿀처럼 말하는 사람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거친 말을 버리고 거친 말을 삼간다. 그는 온화하고 듣기에 좋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와 닿고 상냥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그러한 말을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이 꿀처럼 말하는 사람이다.”(A3.28)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똥처럼 말하는 자, 꽃처럼 말하는 자, 꿀처럼 말하는 자입니다. 이 중에서 최악은 똥처럼 말하는 자입니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납니다. 똥처럼 말하는 자는 한마디로 거짓말 하는 사람입니다. 경에서는 법정을 예로 들었습니다.

 

똥처럼 말하는 자

 

법정에서는 거짓말이 난무합니다. 변호사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거짓말 하는 곳이 법정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법정에서는 증인들에게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하게 합니다. 이런 선서장면은 청문회에서도 볼 수 있고 영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제 본 영화금발이 너무해에서 재판관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이렇게 증인선서를 하게 하는 것은 법정에서는 거짓말이 일상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경에서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또는 어떠한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 (A3.28)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고대인도에서 형벌은 매우 가혹한 것이라 합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삼십명의 경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도둑질뿐만 아니라 타인의 아내를 겁탈하다가 붙잡혀 목이 잘린 경우도 많다고 했습니다. 오계를 어겨서 목이 잘릴 정도로 가혹했음을 말합니다.

 

법정에서는 가혹한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고의로 거짓말을 합니다. 이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말하거나,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보지 못하면서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보고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결국 앎()과 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일삼는 자에 대하여 똥처럼 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꽃처럼 말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자는 똥처럼 악취가 나는 자입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자, 거짓의 삶을 사는 자는 마치 똥구덩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 차듯, 부정한 자는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stn279)라 했습니다. 반면에 꽃처럼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진실만을 말하는 자입니다. 경에서는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알면 ‘안다’고 말하며, 보지 못했다면 ‘보지 못했다’고 말하거나, 보았으면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정직한 자입니다.


면접을 하면 이것 저것 물어 봅니다. 취업을 앞두고 면접특별지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촌형의 친구가 모그룹 인사과장이었는데 형의 소개로 찾아 갔습니다. 면접을 어떻게 하면 잘 할 것인지에 대하여 조언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인사과장과 독대했습니다. 과장은 대뜸 집에 가훈있습니까?”라며 물어 보았습니다. 면접연습이지만 그래도 잘 보여야 하기에 ,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가훈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있다고 하면 좋은 이미지를 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인사과장은 그럼 가훈 내용은 무엇입니까?”라며 두 번째 질문을 날렸습니다. 여기서 막혔습니다.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정직하게 답변하는 것이 면접을 잘 하는 요령입니다.”라며 포인트를 알려 주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부정직한 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스펙이 좋아 겉만 번지르르 한 자가 거짓을 일삼는다면 결국 회사에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가훈을 물어 보았을 때 거짓으로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이어서 내용을 물어 볼 것이고, 또 거짓말을 하면 누가 지었느냐고 물어 볼 것입니다. 몇 번 물어 보면 거짓이 들통납니다. 그래서 사기꾼은 하나의 거짓말을 하기 위하여 열 가지 거짓말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일삼는 자는 조직이나 단체에서 필요치 않습니다. 면접을 볼 때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릅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경에서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알면 ‘안다’고 말하며, 보지 못했다면 ‘보지 못했다’고 말하거나, 보았으면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앎과 봄에 대하여 솔직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말하는 자에 대하여 꽃처럼 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꿀처럼 말하는 자

 

똥처럼 말하는 악취가 나는 자이고, 꽃처럼 말하는 자는 향기가 나는 자입니다. 그런데 경에서는 꿀처럼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과 봄()을 다 보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지와 견을 다 보는 사람이라면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앎āa: )과 봄(dassana: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실제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실제를 알고 보는 지혜에 대하여 여실지견(如實: yathābhūta ñāadassana)’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현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자에 대하여 꿀처럼 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넘어 자비를 실천하는 자에 해당됩니다. 경에서는 거친 말을 버리고 거친 말을 삼간다. 그는 온화하고 듣기에 좋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와 닿고 상냥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팔정도에서 정어(正語: sammāvācā)’에 해당됩니다.

 

팔정도에서 정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는 것”(S45.8)을 말합니다. 팔정도가 완성된 자는 꿀과 같이 말하는 자라 볼 수 있습니다.

 

(puppha) 보다 꿀(madhu)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똥(gūtha), (puppha), (madhu)로 비유했습니다. 똥은 악취가 나는 것, 꽃은 향기가 나는 것, 꿀은 달콤한 것입니다. 똥에 대해서는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아주 소량만 있어도 똥은 악취를 풍긴다. (A1.348) 라 하여 정어가 안되어 있는 자에 대한 최악의 비유입니다.

 

꽃에 대해서는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이 빼앗기고”(Dhp.48)라 했습니다.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하는 것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특히 향기에 빠진 자에 대하여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도둑이네.”(S9.14)라 했습니다. 꽃 향기를 맡는 행위가 욕망에 따른 것임을 말합니다. 욕망을 멸해야 하는 수행자가 향기에 빠져서 반복적 행위를 했을 때 해탈과 열반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초기경전에서 꿀은 꽃 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꽃 보다 꿀입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은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 오직 꿀만 따서 나르듯, 성자는 마을에서 유행한다.”(Dhp.49)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꿀벌을 성자에 비유한 것입니다. 성자가 탁발 나갔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필요한 만큼의 밥만 얻어 오는 것에 대하여 꿀벌이 꽃을 건드리지 않고 꿀만 가져 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꿀과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8)’이 있습니다. 삼사화합에 따라 어떻게 희론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꿀과자(madhu piṇḍikā)’에 비유했습니다. 기력이 쇠했을 때 꿀과자를 먹으면 달콤하고 유쾌한 맛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법문에 대하여 차츰 알아 의미를 탐구하면 재미를 얻고 기쁨을 얻고 마음에 확신을 얻는 것에 대하여 꿀과자로 비유한 것입니다.

 

거센 견해의 물결에 휩쓸렸을 때

 

부처님 가르침은 꿀 또는 꿀과자 같은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나 냄새로 맡는 것을 넘어 맛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가르침의 맛을 본 자에게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지혜입니다. 여실지견입니다.

 

있는 그대로 앎과 봄이 있는 자에게는 괴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정신이 있어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게 살아갑니다. 앎과 봄이 없으면 사고가 일어날 수 있고 견해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갈 수 있습니다.

 

앎과 봄이 없는 자는 주의(主義)나 이즘(ism)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견해의 거센물결입니다. 역사적으로 수천만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꿈만 있고 이상만 있을 때 공허한 것입니다. 말과 이론은 그럴싸 하지만 사회를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면 견해의 거센물결에 휩쓸려 희생되기 쉽습니다.

 

물질만을 강조해도 제대로 알고 보지 못한 것이 됩니다.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유물론이나 공산주의는 모든 것이 물질위주입니다. 반면 모든 것은 인식작용에 불과하다는 정신우선주의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명색(名色)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파니샤드 철학에 따른 것입니다. 명색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본다면 모든 것을 개념화 된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꿈깨라식의 말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환상이라거나 꿈속과 같은 것이라 합니다. 심지어 요새 유튜브에서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본 것처럼 시뮬레이션된 가상현실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명색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설명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엄연히 실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조건에 따라 생멸할 뿐입니다. 명색은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용에 따른 것이라고 알고 본다면 제대로 본 것입니다. 거센 견해의 물결에 휩쓸리면 윤회의 바다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앎과 봄에 대한 신호등의 비유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앎과 봄이 일치하지 않으면 불행을 당할 확률이 매우 높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신호등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 신호등이 있습니다. 파란불일 때 건너야 하고, 빨간불일 때는 멈추어야 합니다. 이런 상식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봉사인 자에게는 불이 보이지 않습니다. 파란불일 때 건너야 한다는 앎은 있지만 눈이 멀었기 때문에 봄이 없어서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서너살 아이에게는 파란불과 빨간불을 식별할 수 있는 봄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건너야 하는지에 대한 앎은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건널목에 섰을 때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고 보는 것일까요? 숫따니빠따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에도 어리석음이 없고,

그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앎과 봄을 지니고

최후의 몸을 가지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이처럼 최상의 청정함을 얻었으니,

이렇게 오신 님은 헌과를 받을 만합니다.” (Stn.478)

 

 

여기서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앎과 봄을 지닌 자(sabbesu dhammesu ñāadassī)’는 일체지자로서 세존의 증득을 말합니다. 일체의 현상에 대한 앎과 봄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맹인에게는 붉고 푸른 신호등에 대한 앎이 있어도 봄이 없기 때문에 소용이 없고, 유아에게는 붉고 푸른 색을 구별하더라도 신호등에 대한 앎이 없으므로 봄이 소용없다. 앎과 봄을 모두 갗추어야 한다.”라고 설명됩니다.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알고 볼 줄 알아야

 

봉사에게는 앎은 있으나 봄은 없고, 아이에게는 봄은 있으나 앎이 없습니다. 앎과 봄 중에 한쪽이 결여 되었을 때 사고 나기 쉽습니다. 앎과 봄이 일치해야 사고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위험은 어리석은 자에게서 나오지 슬기로운 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A3.1)라 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알면 세상 사는 것이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는 악마의 유혹에 대하여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1.20)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의 경(Sn3.1)’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의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러 가는 것입니다.”(Stn.424)라 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했을 때 재난을 당할 것이라 합니다. 이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알기만 하고 봄이 없다면, 봄만 있고 아는 것이 없다면 재난을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삶의 거센물결에 휩쓸려 윤회의 바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알고 또한 보는 사람에게서 번뇌가 소멸한다고 말한다.”(S22.101)라 하여, 알고 볼 줄 알아야 번뇌가 소멸함을 말씀 했습니다. 오온에 대하여 발생과 소멸을 알고 볼 줄 알아야 함을 말합니다.

 

윤회의 바다에서 벗어나려면

 

제천참사에서와 같이 죽고 사는 것은 일상입니다. 그리고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이 세상은 꿈속과 같다느니 마음자리를 보았다느니 하는 말은 세상을 살아 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앎과 봄이 일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앎만 있고 봄이 없으면 봉사처럼 맹목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봄만 있고 앎이 없어도 눈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앎과 봄이 일치 하지 않을 때 사고 나기 쉽습니다. 세상은 탐욕으로, 성냄으로, 미혹으로 불타고 있는데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면 거센 물결(暴流)’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S4.9)라 했습니다. 현실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앎이 있어야 보이고, 보여야 앎이 있다.”라고 습니다. 앎과 봄이 일치해야 윤회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2017-12-24

진흙속의연꽃


출처 : 진흙속의연꽃
글쓴이 : 진흙속의연꽃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