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스트레스 해소를
한숨 잘 자고 나면 몸도 마음도 평안합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와 같습니다. 이때 파문이 일어납니다. 누군가에 의해 자극 받았을 때 동요됩니다. 순간 마음의 평정이 깨집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쾌와 불쾌를 경험합니다. 즐거운 일과 괴로운일은 무작위로 일어납니다. 살다보면 이득과 손실,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은 다반사입니다.
몇 일 전 고객과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거의 일년 쫓아 다닌 프로젝트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납득할 수 없는 평가기준 때문이라 합니다. 몇 일 전 재가운동하는 법우님으로부터 개인 카톡을 받았습니다. 존경하는 스님을 비난하는 글에 마음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이 비난 한 것입니다. 어제는 부산 법우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과 논쟁하다 욕설을 듣고 퇴장당했다고 합니다. 모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쾌(快)와 불쾌(不快)를 경험합니다. 즐거운 일과 괴로운 일은 무작위로 일어납니다. 살다 보면 이득과 손실,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은 다반사입니다. 화가 난다고 하여 화만 내고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화가 났을 때
상대방은 한손에는 똥을 들고 또 한손에는 시뻘건 숯불을 들고 모욕 줄 준비를하고 있습니다. 똥을 던지는 것은 거친말을 하고 욕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숯불을 던지는 것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리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맞받아 칠 수 없습니다. 똥으로 범벅이 되고 불에 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어찌 할 바를 모른다면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며. 그러면 신기하게도 거기에는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은 신통스런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라네.
진리를 수호하는 힘 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면
자신을 위하고 또 남을 위하고
둘 다 이익을 위한 것이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네.”(S11.5)
제석천이 읊은 게송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잘 읊어진 시에 의한 승리의 경(S11.5)’에 실려 있습니다. 선신 제석천이 악신 아수라에게 시로서 말한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악신 아수라는 폭력적입니다. 아수라에게 있어서 힘은 곧 정의입니다. 그래서 “제어하는 자가 없으면, 어리석은 자들은 전보다 더욱 화를 내네. 그러므로 강력한 처벌로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눌러야 하리.”(S11.5)라 합니다. 마치 5공 시대 캐치프레이즈였던 ‘정의사회구현’을 연상케 합니다.
제석천은 힘이 있는 자는 자제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힘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 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S11.5)라 한 것입니다.
제석천의 리더십
밟으면 밟을수록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종교를 핍박하면 할수록 더욱더 번성합니다. 마찬가지로 민초를 짓밟으면 밟을수록 더욱더 거세게 일어납니다. 역사적으로 4.19나 6.10항쟁, 가장 최근에는 작년 촛불항쟁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민초들은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에게는 바싹 엎드립니다.
풀은 밟아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눕습니다. 이에 대하여 공자는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라.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 했습니다. 백성은 풀과 같은 것이라 덕으로 다스리면 바람의 풀처럼 눕지만, 폭정하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일어나는 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힘이 곧 정의의 시대인 때가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은 강력한 처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아수라의 논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결코 어리석지 않습니다. 덕으로 다스리는 자에게는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와 관용과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자에게 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제석천의 게송을 보면 오늘날 통치자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제석천의 리더십은 어느 시대에서나 통용됩니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의 오피니언 리더, 즉 의사결정권자들에도 해당됩니다. 아니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힘 있는 자가 인내 하는 것이라 합니다.
자비무적(慈悲無敵)
어리석은 자의 힘이 있습니다. 조폭과도 같은 힘을 말합니다. 아수라처럼 싸우기 좋아하고 화내기 좋아하는 자의 어리석은 자의 힘은 사실 알고 보면 ‘힘없는 자의 힘’이라 합니다. 진정한 힘은 ‘진리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힘입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면 지혜로워집니다. 지혜가 생겨 나면 자연스럽게 자비로워집니다. 지혜로운 자는 동시에 자비로운 자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싸움을 걸어 와도 싸움에 말려 들지 않습니다.
화내는 이에게 화를 내어서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더욱 악해 집니다. 자신과 남 양자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는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한다.”라 했습니다.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자에게 분노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지혜가 있으면 자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는 자에게 분노의 마음이 일어 날 수 없습니다. 탐욕의 자리에 관용이, 분노의 자리에 자비가, 어리석음의 자리에 지혜가 있습니다. 관용과 자비와 지혜를 겸비한 자에게 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비무적(慈悲無敵)입니다.
분노를 먹고 사는 사람
분노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용모가 추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랜 옛날에 어떤 추악하고 왜소한 야차가 신들의 제왕 제석천의 보좌에 앉았습니다. 이에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사람들은 싫어하고 분노했습니다.
선신들에게서 싫어 하는 마음과 분노라는 불선법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분노하면 할수록 선신들의 용모는 점점 추악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욕을 먹은 야차는 용모가 점점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S11.22)라 했습니다,
분노하는 자의 모습은 악마의 형상입니다. 분노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본다면 틀림 없이 악마일 것입니다.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면 악마처럼 용모가 추악해집니다. 자신 보다 열등하고 보잘 것 없는 자를 무시하고 경멸하거나, 자신보다 우월하고 탁월 한 자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역시 용모가 추악해질 것입니다. 불선한 마음을 내면 낼수록 절세미인이라도 추악한 형상이 됩니다. 분노를 먹고 사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자신의 보좌에 앉아 있는 야차에게 갔습니다. 본래 추악한 모습의 야차는 시기와 질투를 받음으로 인하여 용모가 아름다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석천은 정반대로 야차에게 “나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라며 공손히 말했습니다.
제석천이 공손하게 하면 할수록 야차의 모습은 추악하게 변해 갔습니다. 야차는 본래의 추악한 모습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이에 제석천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습니다.
“나는 쉽게 마음을 상하지 않고
쉽게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네.
그대들에게 화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고,
분노는 나에게 생겨나지 않네.
결코 화를 내어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덕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한가를 살펴서
나는 자신을 잘 제어할 뿐이네.”(S11.22)
상대방에 대하여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최악은 맞받아 치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라 하듯이 화를 화로 앙갚음 하는 것입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응한다는 아수라의 논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면 낼수록 자신의 용모가 추악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분노는 악한 사람을 부수어 버린다
잠을 잘 자고 나면 몸과 마음이 평안합니다. 이런 마음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을 걸어 올 때 평정은 깨집니다. 호수와 같은 잔잔한 마음에 파문이 일어납니다. 대응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말려 듭니다. 이럴 때 멈추어야 합니다. 그가 던진 똥에 맞아서 구린내가 진동하고, 그가 던진 숯불에 몸과 마음이 불타 오릅니다. 그래서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대들은 분노를 극복하고
우정을 상하게 하지 말라.
꾸짖을 가치 없는 자를 꾸짖지 말고
모함하는 말을 지껄이지 말라.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분노는 악한 사람을 부숴버리네.”(S11.24)
꾸짖을 가치 없는 자를 꾸짖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한손에는 똥을 들고, 또 한손에는 숯불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꾸하지도 않고 상대하지도 않는다면 똥을 든 그의 손에서는 구린내가 날 것이고, 숯불을 든 그의 손은 타 들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악한 사람을 부숴버리네.”라 한 것입니다.
글쓰기로 스트레스 해소를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풀어 버려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글쓰기입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풀어 집니다. 경전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특히 초기경전에서 게송을 읽는 것입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한 게송을 접하면 신통하게도 분노가 눈녹듯이 사라집니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분노하면 용모가 추악해집니다. 분노하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립니다. 부글부글 끓는 물과 같은 분노가 멈추려면 시간이 좀 지나 가야 합니다. 또 조건을 바꾸면 분노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각자의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경전읽기와 글쓰기도 그 중에 하나 일 것입니다.
“분노가 그대를 이기게 하지 말고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
분노가 없고 해침이 없는 자는
항상 거룩한 님 가운데 사네.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분노는 악한 사람을 부숴버리네.”(S11.25)
2017-12-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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