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불확실한 삶 속에서

황령산산지기 2017. 6. 11. 19:46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불확실한 삶 속에서

 

 

경전을 읽다 보면 강한 쾌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맞아 떨어졌을 때입니다. 생각했던 것이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앙굿따라니까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경입니다. 경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한적한 숲에 사는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여기 단지 홀로 숲에 산다. 그런데 내가 홀로 숲에 사는 동안, 뱀이 나를 물고, 전갈이 나를 물고, 지네가 나를 물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 , 나는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진을 도모해야 겠다.’라고 관찰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는 이와 같은 첫 번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관찰함으로써, 한적한 숲에서 수행승은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실천한다.”(A5.77)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백년 천년 살 것 같지만 길어야 백년 안팍 삽니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밤이 최후의 밤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 경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수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청년기 출가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임을 알려 줍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들

 

경에서는 모두 다섯 가지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뱀이 나를 물고, 전갈이 나를 물고, 지네가 나를 물지 모른다.

2) 넘어져 떨어질지 모르고, 먹은 음식이 나를 해칠지 모르고, 날카로운 고통이 나를 변조시킬지 모른다.

3) 사나운 맹수, 사자나 호랑이이나 표범이나 곰이나 승냥이를 만날지 모른다.

4) 도적질 하러 가거나 도적질하고 오는 도적을 만날지 모른다.

5) 야만적인 귀신이 있어서, 그들이 나의 목숨을 빼앗을지 모른다.

 

 

다섯 가지 항목을 보면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각종 사고사(事故死)에 대한 것입니다.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탈것으로 인한 사고는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멀쩡한 간판이 떨어져서 즉사할 수 있습니다. 체육관 천정이 무너져 죽을 수 있고 지하도 환기통이 무너져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피해 가려면 깊은 산중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숲에서 홀로 살아갔습니다. 그런 숲에서도 죽음의 위험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다섯 가지 사항입니다.

 

정진하는 이유

 

수행승이 숲에서 수행하다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 이는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라 했습니다. 아직 수행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죽음이 급작스럽게 찾아 왔다면 난감할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찾아 올지 모르는 죽음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 빨리 도와 과를 이루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아라한이 되었을 때 안심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 나는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진을 도모해야겠다.”라며 다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예경지송에 형성의 경송이 있습니다. 경송에 따르면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나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느니라.”라 되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들 모두는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 세상에서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stn574)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십년후가 될지 일년후가 될지, 아니면 오늘밤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에서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A6:19) 라 하여 한호흡 동안일 수도 있음을 말합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듯이 전혀 죽음에 대하여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죽음이 오면 그제서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는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stn576) 라 했습니다. 죽는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이는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도현스님은 호스피스 봉사에 대하여 이야기한바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가면 매일 죽어나가는 사람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한사람 한사람 손을 잡아 주면 손을 놓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는 자들은 잘 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죄업이 많은 자일수록 죽음의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으로 산 자가 죽음에 직면 했을 때 자신의 죄업은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이는 죄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죄의식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에 따르면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 했습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죄의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가장 강렬한 인상이 떠 오를 때, 그 인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악처로 떨어질 것입니다. 살인을 하여 완전범죄에 성공한 자라 하여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기 때문에 늘 마음에 드리워져 있을 것입니다. 이를 경에서는 이를 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라 했습니다. 어둠이 내릴 때 산그림자를 중죄로 비유한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떠 오른 이미지가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악업이라면 살인, 강도 등 오계를 어긴 행위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선업이라면 선정수행에서 희열, 행복, 평온이 해당될 것입니다. 이를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는데 다음 생을 결정하는 마음이 됩니다.

 

만일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자가 사고사(事故死) 등으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를지 모릅니다. 평소 눈, 귀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산 자가 급작스럽게 죽으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에서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아 갑니다.

 

젊은 수행승들을 유혹하는 장면

 

초기경전을 보면 젊어서 출가한 젊은 수행승들을 유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대게 청춘을 즐기라고 합니다. 상윳따니까야 많은 수행승들의 경에 따르면 악마가 늙고 병든 성직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젊은 수행승에게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4.21)라고 유혹합니다. 시간에 매인 것이란 가르침을 말합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시간이 걸림을 말합니다.

 

부처님 제자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기억하여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인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S4.21)라 합니다. 시간에 매인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적 쾌락임을 말합니다. 쾌락을 즐기면 시간이 금방 지나감을 말합니다.

 

죽음의 시간은 알 수 없다

 

상윳따니까야 싸밋디의 경에서는 하늘사람과 수행승과의 대화가 게송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늘사람은 수행승이여, 그대는 향락없이 걸식하네.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지 않네.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시오.”(S1.20)라고 말합니다. 젊은 시절이 다시 오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즐기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행승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합니다.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춰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S1.20)

 

 

수행승이 말하는 시간은 죽음의 시간을 말합니다. 수행승은 그 시간은 감춰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라 했는데, 이 말은 죽음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승은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라 합니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수행해야 함을 말합니다.

 

한호흡 기간이라도 깨어 있는 삶을

 

게송에서 수행승은 죽음의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제 죽음이 들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A6.18) 라 했습니다. 오늘 밤 죽음이 올 수도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에 수행승이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이와 같이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 뱀이 나를 물거나, 전갈이 나를 물거나, 지네가 나를 물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A6.20)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죽음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숲에서 사는 수행자에게도 오늘 밤 뱀, 전갈이 해칠지 모르고, 넘어져 떨어져 죽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 사자나 호랑이를 만나 그들의 밥이 될지도 모르고, 도둑을 만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죽음은 늘 주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각종 사고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어도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한 것이라면 결국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의 불확실성입니다. 죽음이 불확실하다면 지금 이순간을 즐기는 삶은 대단히 어리석은 삶입니다. 더구나 이 젊음, 이 건강이 천년만년 유지될 것처럼 쾌락에 매여 있는 삶을 산다면 죽음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A6.19) 라며 한호흡 기간이라도 깨어 있는 삶을 살 것을 말했습니다.

 

“20대 때부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이른 아침 케이블채널에서 명불허전 1회를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방영된 것을 재방영한 것입니다. 명불허전 첫 회 출연자로 이어령교수가 나왔습니다. 나이 여든이 된 노교수는 매우 정열적입니다. 그 동안 쓴 책이 수 십권 됩니다. 이런 열정이 어떻게 나왔는지 묻자 “20대 때부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라 했습니다.

 

이어령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오늘밤까지만 살자.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하루를 일생처럼 오늘밤까지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지 모릅니다.

 

불확실한 삶 속에서

 

부처님은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뱀, 호랑이, 담즙, 도적, 귀신 등을 들며 삶의 불확실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삶은 불확실합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이 불확실한 것이라면 청정한 삶이 가장 유리합니다. 젊어서 출가하는 이유라 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공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수행해야 하는 이유라 봅니다.

 

청정한 삶을 산 자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오히려 축복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서는 이런 게송이 도처에 있습니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

 

 

2017-06-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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