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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잘못된 견해(邪見)를 가지면, 오역죄가 아니라 육역죄(六逆罪)인 이유

황령산산지기 2017. 2. 19. 12:41

 

 

잘못된 견해(邪見)를 가지면, 오역죄가 아니라 육역죄(六逆罪)인 이유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집과 일터를 매일 걸어 다니면서 보는 것이 있습니다. 치킨집에서 어느 여주인은 숯불에 닭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굽고 있습니다.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계절이 바뀌어도 그 자리에서 숯불구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족발집이 있습니다. 어느 청년은 족발을 썰고 있습니다. 써는 모습이 매우 진지해 보입니다. 몇 년 째 보는 광경입니다. 아파트와 주택이 어우러져 있는 시장통입니다.

 

닭을 굽고 족발을 써는 것을 업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계수단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시장통에서 골라 골라소리치는 사람들도 생계를 위한 일입니다. 기술자가 기계를 고치는 것도 생계를 위한 것입니다. 학생을 가리치는 것도 정치를 하는 것도 생계를 위한 것입니다. 자주 반복하는 일입니다. 매일매일, 매달매달, 매년매년 반복 했을 때 습관이 될 것입니다. 생활의 달인처럼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매우 익숙하게 되어 내생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수 많은 생계수단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생계를 위해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를 직업(職業)’이라 합니다. 한자어에 업()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여기서 업은 행위를 뜻합니다. 똑 같은 일을 매번 반복하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반복 했을 때 내생에도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업의 원칙

 

직업 중에는 오계를 어기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불자라면 가져서는 안될 직업으로 초기경전에 따르면 칼장사(satthavanijja), 사람장사(sattavanijja), 고기장사(mamsavanijja), 술장사(majjavanijja), 독약장사(visavanijja)라 합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면 현생에서도 고통 받고 내생에서도 고통 받을 것이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이 이끌려 집니다. 그래서 파아옥 사야도는 업과 윤회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업의 원칙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해롭고 유익한 업은

과거에도 지어졌고,

현재도 짓고 있으며,

아라한이 되지 않는 한

미래의 생에서도 지어질 것이다.”

 

 

 

 

 

과거에 지은 어떤 해롭거나 유익한 업은 해롭거나 유익한 결과를 과거에 맺었습니다. 과거와 금생에 지은 해롭거나 유익한 업은 현생에 그것들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결과를 만듭니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 생에 지은 해롭거나 유익한 업은 유익하거나 해로운 과보를 미래 생에 받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아라한만이 업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과거에 지은 업 때문에 행복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앙굴리말라가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내생을 결정할 중대한 업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언제 받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임종순간에 그 많은 업 중에서 내생을 결정할 중대한 업은 어떤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설명합니다.

 

 

1) 무거운 업 (garuka-kamma)

2) 습관적으로 지은 업 (āciṇṇa-kamma)

3)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āsanna-kamma)

4) 이미 지은 업 (kaattā-kamma)

 

 

순서는 무거운 업, 습관적으로 지은 업,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이미 지은 업입니다. 일상에서 행위가 모두 임종 순간 내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가장 무거운 업이 내생을 결정합니다. 이를 무거운 업(garuka-kamma)’이라 합니다.

 

무거운 업은 다른 것보다 먼저 익기 때문에 이렇게 부릅니다. 무거운 업이 없을 때는 습관적으로 지은 업이 뒤따를 것입니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지은 업에 대하여 직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직업이란 매일, 매달, 매년, 평생 똑 같은 일을 반복 하는 것입니다. 평생 도살장에서 가축을 죽이는 일에만 종사했다면 그 직업과 관련된 업의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임종 직전에 짓는 업이 있습니다. 평생 인색하게만 살던 자가 죽음을 앞두고 재산을 기부 했을 때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만약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등 무거운 업 등이 없다면 아마 임종직전에 선한 행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내생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평생 자기자신만 위해서 산 사람이 기부를 하는 등 선행을 했을 때 저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나?”라고 말하는 것도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지은 업이 무르익어 내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한 가르침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한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외도스승들은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났을까요? 이에 대하여 파아옥 사야도의 책 업과 윤회주석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붓다는 다른 (종교지도자) 스승들이 업의 작용에 관한 완전하지 못한 지식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을 편다고 설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 바에 의하면 업이라는 것은 필요치 않다고 하는데 이는 재생연결식을 만드는 업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업과 윤회, 378번 각주)

 

 

주석에 따르면 외도의 스승들이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재생연결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진리(sacca), 중생(satta), 재생연결 (paisandhi), 조건(paccaya)에 대하여 “이 네 가지 법은 보기 어렵고 가르치기도 어렵다.(Vism.17.25)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법을 볼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붓다고사는 “전승된 가르침을 통달하거나 수행하여 법을 증득한 자가 아니면 연기의 주석은 불가능하다.” (Vism.17.25) 고 했습니다. 삼장에 통달한 삼장법사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룬 성자가 아니면 재생연결식과 같은 법을 설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요즘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은 재생연결식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을 부정하는 것은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재생연결식을 부정하는 것은 윤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당시 외도의 스승들은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한 것은 연기의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재생연결식을 부정하는 자들은 연기를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연기를 부정하면 상견이나 단견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외도스승들이 업의 작용에 관한 완전하지 못한 지식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을 편다고 했습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분석의 큰 경에서 부처님이 어리석고 생각 없는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어떻게 여래가 업에 대한 분석을 하는 것에 관하여 알 수 있을 것인가?”(M136) 라며 의문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견해(邪見)를 가지면

 

부처님은 외도스승들의 견해에 대하여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세상에서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참으로 악한 행위가 있고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도 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M136)라고 말씀 했습니다.

 

누군가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하여 동의한다면 오계를 어기는 행위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한다면 오계를 지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그 모두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안다면, 올바로 아는 것이다. 만약에 달리 안다면, 그는 잘못 아는 것이다. (M13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잘 아는 것과 잘못 아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악행을 하면 악처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업과 업의 작용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악행을 하고서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으면 외도의 견해입니다. 이는 사견입니다. 이와 같은 사견에 대하여 부처님은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M136) 라고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견을 가지고 있으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라고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육무간업(六無間業), 육역죄(六逆罪)

 

오늘날에도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견을 가지면 악처에 태어납니다. 사견을 가지고 있으면 무거운 업을 짓는 것이 되므로 지옥을 예약해 놓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견을 갖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요? 해로운 무거운 업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2)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3) 아라한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4)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여래의 피를 흘리게 한 경우

5) 승가를 분열시키는 경우

6) 견고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

 

 

해로운 무거운 업을 지으면 확실하게 지옥에 태어난다.”라 했습니다. 무거운 운업은 너무 강해서 어떤 다른 업이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다른 업도 내생의 그 과보를 멈출 수 없는 강력한 업입니다. 그 과보가 너무 무거워서 무거운 업이라 합니다. 그런데 모두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불자들은 오무간업 또는 오역죄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오무간업에 하나가 더 추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견고한 사견입니다. 사견을 가지고 있으면  확실하게 지옥에 태어난다.”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무간업이 아니라 육무간업(六無間業)이 되고, 오역죄가 아니라 육역죄(六逆罪)가 됩니다.

 

여섯 번째 무거운 업, 사견(diṭṭhi)

 

파아옥 사야도의 책 업과 윤회에서는 해로운 무거운 업이 여섯 가지로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다섯 가지로 소개 되어 있습니다. 붓다아비담마에서는 오무간업에 이어 고정된 사견도 무거운 업들 중 하나이다.”(260) 이라 하여 사견을 추가했습니다.

 

사견을 갖는 것도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무간업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파아옥 사야도는 기존의 오무간업에다 왜 사견을 추가했을까요? 그것은 경전적 근거를 갖기 때문입니다.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Bahu Dhātuka Sutta: M115)’이 있습니다. 경에서는 해로운 다섯 가지 무거운 업에 이어 사견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Aṭṭhānameta anavakāso: ya diṭṭhisampanno puggalo añña satthāra uddiseyya, neta hāna vijjatī'ti pajānāti. 'hāna ca kho eta vijjati: ya puthujjano añña satthāra uddiseyya, hānameta vijjatī'ti pajānāti.

 

그는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그는 ‘보통의 일반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M115, 전재성님역)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에 따르면 해로운 무거운 업은 모두 여섯 가지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오무간업이라 하지만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모두 여섯 개의 해로운 무거운 업이 있어서 육무간업이라 할 것입니다.

 

확실하게 지옥에 태어난다

 

여섯 번째 무거운 업은 사견(diṭṭhi)입니다. 경에서는 정견을 가진 자가 사견의 스승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불가능하다(neta hāna)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업과 업의 작용에 따른 연기의 법칙을 아는 자가 단견과 상견의 외도스승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음을 말합니다. 다만 업과 업의 가르침을 모르는 일반사람들이라면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견을 따르는 자들은 확실하게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파아옥 사야도는 즉 죽음의 순간에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 만약 살아가면서 위와 같은 6가지 업 가운데 하나를 지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생에 과보를 받는 업이 된다. 확실하게 지옥에 태어난다.”(339) 라 했습니다.

 

사견을 가지면 확실하게 지옥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해로운 무거운 업에 대하여 조정될 수 없는 업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섯 가지 해로운 무거운 업도 그 과보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머니살해, 아버지살해, 아라한살해, 부처님상해의 업은 한겁이 끝나기 전에 업이 소멸되어 지옥에서 나온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겁이라는 개념은 한우주기를 말합니다.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기간을 한겁으로 본 것입니다. 색계초선천까지 파괴 되는 기간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 승가를 분열시킨 업은 겁이 끝나야 지옥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우주가 괴멸할 때 까지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 사견은 임종 직전에 사견을 버리면 무간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견고한 사견을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견해를 버리면 무간업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무간업 또는 오역죄라 했을 것입니다.

 

불교에 오무간업이 있습니다.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큰 죄를 말합니다. 이를 오역죄라고도 합니다. 오종의 악업을 지으면 반드시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하나가 더 있습니다. ‘사견입니다. 무작론, 무인론, 단멸론과 같은 사견을 가지고 있으면 이는 무거운 업으로서 다른 업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임종시에 즉시 과보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종단멸론자의 간난아기론

 

신종단멸론이 있습니다. 물질에 기반을 둔 과학주의 불교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유전자 윤회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가 윤회함을 말합니다. 물질에 기반한 것이므로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신종단멸론자는 간난아기론을 말합니다.

 

간난아기론은  태어난 아이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가 참이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지옥에 태어난다고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니 나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태어나 고통받아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윤회가 참이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말합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최악의 단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신종단멸론자들은 간난아기론으로 업과 업의 작용을 무력화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견으로 인하여 현생에서 괴로운 과보를 받고 있다면 저 세상에서도 고통 받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하여 설하면서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지옥에 태어난다.”라 했습니다.

 

업의 교리(kamma-vādī)와 행위의 교리(kiriya-vādī)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진 자는 자신의 행위에 따라 선처나 악처에 태어납니다. 유익한 행위를 하면 천상에 태어나고 해로운 행위를 하면 악처에 태어납니다. 영원주의자도 보시하고 지계하는 등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최악은 단멸론자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자들은 악처에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자들은 왜 악처에 태어날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크게 효험이 없다는 견해(akiriyā-diṭṭhi: 無作論), 뿌리가 없다는 견해(ahetuka-diṭṭhi: 無因論),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an-tthika-diṭṭhi: 斷滅論)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무간업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착하고 건전하게 살면 그 과보로 인하여 현생에서도 행복하고 또한  내생에서 선처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사견으로 인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그 과보로 인하여 현생에서도 괴로운 삶을 살고 내생에서 악처에 태어납니다. 이것이 업과 업의 작용의 법칙입니다.

 

부처님이 외도의 스승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업의 교리(kamma-vādī)’행위의 교리(kiriya-vādī)’입니다. 이는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은 스스로 작론자(kiriya-vādīn)’라 했습니다.

 

 

Idha socati pecca socati,

Pāpakārī ubhayattha socati,

So socati so vihaññati          

Disvā kamma kiliṭṭham-attano.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dhp15)

 

 

 

2017-02-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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