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도 밝혓지만 백제와 신라의 건국은 한반도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저명한 역사학자들 역시 온조 백제와 위구태의 백제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가 백제는 북부여로 부터 분리된 소서노의 아들 온조 백제와 위구태의 백제를 동일시 하는데서 부터 역사의 물줄기가 전혀 엉뚱한데로 흐른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백제 해석과 백제를 거론한 수많은 중국의 백제 건국과 백제의 성장 과정은 온조 백제와 위구태의 백제가 처음 부터 같은 백제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며 백제의 대륙 역사와 한반도 백제를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부터 백제의 흔적을 찿아 보자. 溫祚 扶餘 우리 역사가 잘못 해석하는 부분이 온조가 세운 나라를 "百濟"라고 부르는 것에서 부터 잘못된 역사 해석이다. 온조의 나라는 백제가 아니라 "扶餘"이며 이것을 온조가 분리 하여 나온 (北)扶餘와 구분하기 위해 "南扶餘"라고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온조의 남부여는 유물과 같은 증거는 없는 나라이다. 묘하게도 백제의 유물이나 건축물등 모든 사적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이 서울 방이동의 백제 고분이다. 그 이전의 한반도에서 온조 부여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방이동의 백제 고분은 묘하게도 북방계 종족에서만 나타 나는 형태의 무덤 군이며 이와같은 무덤군은 이전에는 한반도 어디 에도 발견된 적이 없는 무덤군이라는 것이다. 방이동 백제 고분 방이동의 무덤군은 4세기 초반 부터 6세기 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의 백제 유물은 3백년대 초 부터 시작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주류 사학은 우리 고대사를 믿지 않는다. 4세기 이전의 고구리 백제 신라의 역사 유물은 없는 것이 한반도 역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방이동에 북방계 무덤군이 갑자기 발견 되는가? 이것을 이도학 교수 같은 분들은 온조 백제와 갈라져 대륙으로 흘러 들어간 비류 백제와의 결합일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비류 백제=대륙백제라는 말이며 강성해진 비류 백제와 비류 백제의 결합의 결과로 한반도에 대륙 무덤군이 갑자기 나타 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존재 한다. 비류 백제가 존재 햇는지도 불명확 하지만 혹여 비류 백제가 존재햇다고 믿는다 해도 그들의 뿌리가 같다면 무덤의 형태도 같아야 하는 것이며 온조 백제(부여)가 한반도에 존재 햇다면 어디엔가 부여의 무덤이 존재해야 하는것 아닌가? 다시 말해서 온조 백제(부여)의 흔적은 기록으로만 전해 질 뿐 그 흔적은 없는 것이며 그 기록의 무대가 한반도라는 분명한 증거 없이 그렇게 추정 할 뿐이다. 公孫氏와 尉仇台 <三國史記>는 신라 건국과 백제 건국을 각각 기원전 57년과 기원전 28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오히려 <三國志>는 백제 건국은 명확하게 년도 까지는 빍히고 있지 않지만 238년 이후에 백제가 건국 되엇음을 알수 잇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五胡十六國 時期 요동 태수 공손도는 曹魏와 맞짱을 뜬다. 하지만 공손도에게는 曹魏 보다 급한 불이 北魏와 고구리 였다. 고구리와 북위는 공손도의 요동을 호시 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공손도는 이들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왕 위구태에게 자신의 딸을 주며 결혼 동맹으로 고구리와 백제의 위협으로 부터 벗어 나고자 했다. 이 부분에서 동아시아 역사는 중화사관으로 흘러 들수 밖에 없는 것이며 중원의 역사가 확대하고 과장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漢이 멸망하면서 五胡十六國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이며 이후 南北朝와 북위에 의한 남북조 통일 그리고 隨 唐으로 이어지는 북방민족의 역사는 고구리와 백제 신라 그리고 북위의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백제와 신라는 오호십육국 시대에 건국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호십육국 시대를 정확하게 이해 하지 못하고서는 우리 고대사를 절대로 찿을 수 없다는 것이며 한반도에서 우리 고대사를 찿으려 한다면 우리 주류 사학이 왜 우리 고대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위구태의 나이나 출생 그리고 부여의 왕이라지만 부여의 정확한 위치를 알수가 없다. 다만 <三國志演義>에 위구태는 동부여의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위구태의 생존 시기를 알 수 있는 인물이 公孫度(탁)이다. 공손도는 204년에 죽는 인물이기 때문에 적어도 위구태의 생존은 204년 이후까지 되는 것으로 추정 하는 것이며 공손도의 손자 公孫淵은 淵王을 자처 하다가 司馬懿의 토벌을 받아 238년에 멸문과 함께 죽는다. 이때 마사의는 "공손씨의 영역애서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이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모두 철수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손연이 죽은후 위구태는 百家와 함깨 나라를 세웟으며 그 이름이 백제라는 것이 <삼국지>의 기록이다. 즉, 백제 건국의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지만 238년 이후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며 그 토대는 멸문한 위구태의 妻家의 영토로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 백제의 흔적은 하남과 산동성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아시아의 역사 과대 해석을 발견 할 수 있다. 공손도 영토의 허구성 그런데 공손도는 지금의 산동반도 및 하남까지 영토를 확장햇다는 것이 삼국지의 기록이다. 이런 이유로 또 엄청난 역사의 뻥튀기를 하는 아래와 같은 지도가 그려 진다. 그런데 위 지도와 같이 한반도 평안도와 지금의 요녕성 그리고 하북과 하남과 산동성 일부 까지 공손씨 가문의 영토 엿다는 대단한 나라인 공손씨 가문은 사마의에 의해 토벌 당하면서 일거에 멸문을 당하는 때가 238년 이다. 그런데 사마의가 아무리 신출 귀몰한 능력을 지녔다 해도 위 지도의 공손씨를 한 순간에 괴멸 시키고 저 넓은 지역의 16세 이상의 남자를 모두 도륙 낼 수 있는 건가? 이런 역사 해석의 바탕위에 현재의 역사는 위초오의 지도를 아래 그림 처럼 나타 낸다. 이때의 역사 해석을 믿는다 해도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서 철수를 한 曹魏의 영토를 공손씨 영영을 조위의 영토로 그려 넣고 있는것 아닌가? 그야말로 뻥튀기 그림이다. 이런 역사 해석에 따라서 고구리는 지금의 블라디보스톡 정도에 밀려나 있다. 결국 중원은 曺魏에 의해 평정되고 사마의의 손자인 司馬炎에 의해 曹魏가 멸망을 하고 司馬炎은 나라 이름을 晉이라 칭한다, 晉 역시 春秋戰國時代에 존재하던 나라 이다. 그런데 고구리와 北魏의 협공으로 北魏에게 멸망하는 前燕의 지도를 한번 보자. 五胡十六國 가운데에 가장 큰 나라처럼 그려 놓았다. 왜 이렇게 前燕을 큰 나라로 비정하는가 하면 이때의 고구리가 만주의 구석에 있었다는 믿음 때문이며 고대 요동이 현재의 요동 반도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전연의 전성기는 묘하게도 백제의 近肖古王의 시기와 거의 겹친다. 근초고왕 때의 백제는 北魏와 전쟁을 하기도 하고 고구리의 故國原王을 遼西에서 전사 시키기도 한다. 우리 국사가 말하는 만주 고구리는 그렇다고 치고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에 잇었다면 백제는 어떻게 北魏와 전쟁을 하엿다는 것일까? 이때 북위의 위치를 보자, 위 지도는 日本에서 그린 지도이며 北魏가 前燕을 멸망 시키고 난 후의 영토다. 그런데 百濟가 요동반도에 있다. 어찌하여 한반도에 있어야 하는 백제가 이때 쯤이며 요동 반도에 있어야 하는 고구리의 영토위에 백제가 살정되는 것일까? 아마도 북위와 백제 전쟁의 기록 때문에 백제를 요동 반도에 넣은 것 같다. 그야말로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백제의 모든 흔적은 山東半島와 河南에 존재 한다. 山東半島를 기점으로 遼西 까지 진출하면서 故國原王을 죽이고 北魏를 작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국 역사에서 백제는 90만 대군을 운용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의 역사 해석들은 백제는 이시에 흔적 조차 없는 것이며 전연이나 북위등의 영토를 백제의 영토와 고구리의 영토위에 덧 씌우는 뻥의 역사 해석으로 일관 하는 것이다. 이 시기의 고구리를 요동국왕이라고 칭햇으며 平壤城의 또 다른 이름이 遼東城이다. 이것을 아무 생각 없는 우리 사학에 의해 고구리는 지금의 요동반도 북쪽으로 비정하는 중국은 확대 해석하고 우리는 축소로 일관하는 역사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지금의 北京은 고구리의 중심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遼東의 위치를 지금의 요동반도로 옮겨서 해석하기 때문인 것이다. 古代 遼東의 위치는 전 글에서 충분히 고증을 했으므로 더 이상은 지면을 할해 하지 않겠다. 百濟의 領域 그후 백제는 近肖古王때 강성해 져서 90만 대군을 휘몰아 山西省의 북위를 작살내고 요서에서 고구리의 故國原王을 戰死 시키고 요서 진출을 완성 했다는 것이다. 근초고왕의 활동 시기가 346∼375로서 이때의 백제 영토는 월주(지금의 베트남 하노이 일대) 장강의 위 위 아래 하남과 산동 그리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를 잇는 해양국가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수록한 중국 사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에도 중국의 과대 포장된 역사위에 백제 역사는 대륙에는 끼지 못하고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반도에만 그려지는 것이다. 바로 한반도 부여는 근초고왕 시기에 백제 영토가 되는 것이며 방이동의 백제 븍방계 무덤군이 갑자기 한반도에 나타나는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有史로서의 한반도의 백제라는 이름은 방이동 고분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 시기로 부터 시작 된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한반도의 요서 진출이 아니라 대륙 백제의 한반도 진출이 옳은 것으로 판단 된다. 다음에는 백제의 중심이 韓半島가 아니라 山東半島와 河南 이라는 것을 <舊唐書 百濟傳>을 통해 하나씩 증명해 보자 百濟의 根本 9.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1 백제 또한 부여의 별종이다. 別種이라 함은 文化와 言語 風習은 같지만 種은 다르다는 말이다. 부여와 종이 다르다는 말은 초기 부여의 위치는 지금의 甘肅省 북쪽 사백리 弱水 부근에 존재 햇다는 부여의 위치로 볼 때 부여 사람들의 생김새는 지금의 오도로스 平原의 나라 사람들 처럼 西洋人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馬韓=長江 中,河流 嘗爲<馬韓>故地, 일찌기 마한의 옛 땅이다. 이 말은 백제의 영역이 옛 마한 즉 지금의 長江의 남북인 江南과 江北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오도로스 평원의 사람들의 이동 경로가 장강 물줄기를 따라서 장강 하류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장강 중하류는 古代 馬韓이다, 따라서 백제는 장강을 따라서 마한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在京師東六千二百里, . 장안으로 부터 6천2백리 떨어져 있다 6천 2백리를 지금의 거리 개념으로 계산하면 2400km가 조금 넘는다.
그리고 이 시기의 거리를 잰다는 것은 지금 처럼 위성에 의한 직선 거리가 아니엇을 것만은 분명하다. 더구나 6천 2백리라는 것은 막연한 거리 개념일 것이다. 더구나 백제가 韓半島에 있엇다면 西安에서 한반도 백제의 陸路 거리로는 2만여리에 달한다고 봐야 한다.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대해의 북쪽에 있으며 소해의 남쪽에 있다. 도데체 大海란 무엇이며 小海란 무엇인가? 중국 고대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海와 大海를 구분할 줄 알아야 중국 고대 기록들을 정확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해란 바다를 말하는 것이며 소해란 長江이나 黃河 또는 淮水를 지칭하는 것이다. 즉 고대의 대륙 사람들의 인식은 長江과 黃河의 본류를 海라는 인식으로 본것이다. 실제로 淮水를 "夏海"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대해는 지금의 한반도 남해인가? 더불어 小海란 지금의 漢江을 말하는가? 아무리 역사를 뒤집어 해석을 한다 해도 지금의 漢江을 海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대륙에 존재 한다면 백제의 남쪽의 대해는 어디를 말하는가? 이 대해를 두고 일부에서는 백제의 위치를 지금의 遼東半島로 해석을 하며 백제의 남쪽 대해를 지금의 渤海灣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渤海라는 말은 <史記>에서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만약 이때의 백제가 지금의 遼東半島에 있었다면 대해라 표현하지 않고 渤海라고 했을 것이다. 만약 지금의 랴오허를 소해라고 햇다면 랴오허는 북쪽 보다는 서쪽에 가깝다. 그런데 백제 중심 지역이 山東省과 河南省이라면 장강 중하류의 백제는 무엇인가? 백제의 이동 경로는 다시 장강의 중하류에서 지금의 산동반도 까지 이동하고 말갈계 소서노 세력과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왜와 백제의 친연성은 바로 이들의 이동 경로가 장강 유역을 다라서 이동하는 과정에서 야요이 문화를 이루고 있던 왜와의 결합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서 왜와 백제는 한반도 남부와 한반도 북쪽 루트를 다라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기록에 가장 근접하는 지역이 山東半島와 河南이다. 山東半島 북쪽에는 황하 하류(小海)가 흐르고 있으며 남쪽은 그야말로 大海다. 東北至<新羅>, 동북으로 가면 신라다. 만약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신라는 백제로 부터 동남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라의 위치는 백제의 동북쪽 이란다.(?) 나라의 위치를 말할 때는 그 나라의 수도를 기점으로 설명한다는 것을 이해 한다면 한반도 백제의 도읍지엿다는 부여로 부터 신라의 都邑地엿다는 慶州의 위치는 동남쪽인 것이다. 우리는 신라만은 한반도 경주에서 건국되고 한반도 경주에서 멸망햇다는 굳은 믿음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잇지만 이것은 착각이며 固定觀念이다. 대륙의 백제 중심은 지금의 河南의 泗水와 沘水 유역에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백마하라는 것을 중국 백과 사전을 찿아 보면 西南流经太平镇后进入微山县,于微山县鲁桥镇九孔桥村注入独山湖。 라고 한다. 더불어 독산호는 중국 역사학자 허광웨가 夫餘와 鴨綠의 근거지로 지목햇던 바로 魚台라는 곳이 위치한 지역이다. 魚台=微山湖=浿水 魚台의 위치를 살펴 보자 海内经〉:“东海之内,北海之隅,有国名朝鲜”。해내경:동해 범위내에 북해의 모퉁이에 있는 나라의 이름은 조선이다.여기서 동해란 학자들에 따라서 黃海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산해경이 쓰여지는 時期의 사람들은 바다를 모르는 內陸 사람들이며 古代 內陸에 살던 사람들은 黃河, 淮河, 長江과 같은 河川을 바다라 했다. 이런 표현을 증명하는 것이 진짜 바다를 "大海"라 하는 것이다. 黃河를 海라 표현 했으며 위 지도를 보면 황하의 하구는 산동 반도로 가는 중간에 泰山이 가로 막혀 있는 관계로 황하의 물줄기는 河北으로 흐르기도 하고 河南과 江蘇省까지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묘하게도 이런 강 흐름으로 인해서 山東省은 海의 內(안)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또한 隅라는 글자는 隅夷라는 기록의 그 글자이다.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渭)는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중국이 말하는 요순 시대는 단군 조선의 시기와 겹친다.
“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5D4E>嵎夷: 또는 욱이[郁夷])땅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 (卷1 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5D4E>夷)의 땅은 청주(靑州)” 라고 했다. 또한 隅는 浿水를 의미하기도 한다. 靑州는 현재의 산동반도다.
이 기록은 이 우이는 누구인가.
여기서 동이 구족은 환단고기에서도 설명되고 있는 내용으로 단군조선은 9개의 부족 또는 종족으로 구성되어있었다고 하는 것을 뒷바침해 주는 내며 영락제는 비문에서 동이 구족을 쓸어 버렸다고 기록하면서 북방 민족 모두를 통일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 "陽은 해를 뜻하고 谷은 해뜨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조선의 관계가 성립 하는 것이다.
즉 산동반도를 기준으로 볼 때 서쪽에 살던 漢族들의 눈에는 산동반도는 동쪽끝이 었으며 산동반도는 해가 뜨는 곳이 었기 때문이다. 山東이란 말 그대로 태산의 동쪽을 말하는 것이고 靑州의 靑이라는 글자는 동쪽 방위를 나타내는 글자이다. 예컨데 북쪽은 黑, 서쪽은 白, 중앙은 黃이며 중국인들이 黃金을 좋아 하는 이유가 자신들은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북해란 지금의 渤海灣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의 天津 방향으로 흐르는 황하의 물줄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천진 방향으로 흐르는 황하는 산동반도에서 보면 북쪽에 있는 북해가 되는 것이다. “조선은 열양 동쪽 연나라에 속한 고을이름이다." 열양 동쪽은 조선이며 조선의 위치는 유사 시작이래 산동 반도를 의미하는 것이며 조선을 포함하고 잇던 燕나라의 위치는 지금의 산동과 하북 하남의 일부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古朝鮮의 위치는 山東半島일 수 밖에는 없다. 西海至<越州>, 서남으로 가면 월주다. 한반도 백제의 서남쪽은 서해 바다 아닌가? 그런데 월주란 어디를 말하는가?
즉 <舊唐書>가 편찬된 시기가 940~945년 사이니까 이 때의 월주를 관리하던 곳은 지금의 廣西라는 말이다. 또한 越이라는 글자 자체가 지금의 장강 이남의 모든 지역을 의미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영역속에 월주를 포함햇다는 것이다. 南渡海至<倭國>, 남쪽 바다를 건너면 왜국이다. 우리는 왜국을 하면 지금의 일본을 연상하지만 이때의 왜국은 지금의 일본 열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왜는 長江 下流에 존재하던 部族이나 나라를 말한다. 즉 여기서의 바다란 장강을 말하는 것이며 이때에도 長江 南部에는 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야요이라는 倭의 근본 지역을 曹魏와 오가 싸 우던 적벽대전이 치뤄지던 적벽 근처라고 생각 한다. 왜냐하면 이때 야요이 즉 벼를 재배 하던 야요이라는 종족들이 전란을 피하여 대거 지금의 큐슈와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北渡海至<高麗>.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고려다. 역시 황하를 건너면 고구리라는 것이다, 반도사관적으로는 고구리와 백제 국경은 바다일 수 없는 것이며 漢江을 海(바다)라고 표현한 기록은 없다. 其王所居有東西兩城 그 왕은 동서 "양성"에서 거주하면서 다스린다. 이 문구를 일부에서는 지금의 부여와 대륙의 거발성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발성이 두개의 성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인지 또 다른 곳에 성이 존재 한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水의 秘密 古代 史書의 기록에 등장하는 고을 이름들을 보면 三水邊이 들어가는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물(水)이라는 것은 必須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중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그 글자 하나 하나에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固有名詞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河 : 黃河 下流만을 지칭하던 이름이다. 하남과 하북은 황하 하류의 남북쪽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江 : 長江의 지짗하는 고유한 이름이다. 즉 江이라고 표현 하면 長江을 의미하는 것이이며 江의 南北을 江南과 江北이라 하는 것이다. 淮 : 淮水의 고유한 이름이다. 淮水의 상고 시대 이름은 夏海이며 고대 중국인들을 지칭하는 화화족은 바로 회수 유역을 따라 형성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서 회수 남북을 華北과 華南으로 구분 하는 것이다,
漢 : 장강 최대 지류인 漢水를 지칭하는 고유한 이름이며 한수의 별칭이 은하수라는 의미의 星漢이다, 중국의 하천은 거의 이와 같이 漢字 그 자체에 그 하천의 위치를 나타내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백제 멸망 당시의 도읍지였다는 사비성의 비밀은 바로 그 이름 자체에 있는 것이다. 泗와 沘 河, 淮등은 그 글자 자체에서 그 강의 위치와 역사와 성격등을 나타내고 있으며 河川은 변함 없이 그 지역을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 역시 변하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百濟의 城이였다는 泗沘城의 泗와 沘라는 漢字를 옥편에서 찿아 보라. "泗"f라는 글자는 山東省 蒙山 ,에서 "沘"라는 글자 역시 고을 이름 漢代에 지금의 河南省에 둔 현(縣)이며 하남성에 있는泌阳县 东白云山에서 발원한 강 이름이라는 뜻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글자라는 것이며 다른 뜻으로는 쓰임새가 없는 글자이다. 즉, 泗沘라는 이름은 河南省 泌阳县 东白云山에서 발원하여 江蘇省을 거쳐 淮水로 흘러드는 강의 固有한 이름인 것이다. 중국의 江들은 대부분 西쪽에서 東쪽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 든다. 그러나 泗沘라는 강은 중국 河南에서 발원하는 泗水의 上流를 말하는 것으로서 西南쪽으로 흘러 沘水를 만나서 淮水로 흘러 드는 강이다. 즉, 浿水로 지목되는 沛縣을 나와 흐르는 방향이 서남쪽으로 흘러 옛 海의 표현인 夏海(회수)로 흘러드는 강이다.. 이것은 <史記>가 전하는 浿水에 대한 설명과 一致 한다. 중국 백과사전들은 泗水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泗水县在中国山东省中部偏南,泰沂山区南麓,泗河上游,是济宁市所辖的一个县 역사적으로는 泗水是泗河文化的发祥地,历史悠久。 商为卞明国,周秦为鲁卞邑。 泗沘城은 泗水가 흐르는 河南의 어는 곳에 위치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沘水에 대해서는 河流名,亦名泌水,源出河南泌阳县东白云山,西南流经县南, 又西南流经沘源县(即今唐河县)北,会北来之赵河,名曰唐河, 又西南流经新野,至湖北襄阳县入于白河。라고 설명하고 있다. 비수의 또 다른 이름이 泌水인데 비수의 흙은 콘크리트 같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백제의 사비성은 바로 이 흙을 이용해서 쌓은 城이라고 한다. 즉, 泗水는 上流이며 沘水는 淮水로 흘러 들기전의 下流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비성은 바로 이 泗水와 沘水를 흐르는 어느 곳에 존재 했다는 것을 의미 한다. <隋書>는 백제의 도읍은 "거발성"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적어도<隋書>가 만들어 지는 시기는 백제가 건재하고 있던 當代임을 간과 하면 안된다. 중국 24사는 대부분 전해져 오는 이야기와 이렇게 이어져 오는 이야기로 쓰여진 역사서를 또 다시 기록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隋書>는 바로 그 當代의 기록을 담은 역사서인 것이다. 백제의 서쪽 國境 百濟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史書가 <魏書>다. <위서>는 北齊 사람 魏收가 저술한 역사서다. 이전 까지의 24史의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가 있으며 이들 史書에는 夫餘 沃沮 濊와 같은 그닥 중요할 것 같지 않은 부족 국가들이 등장하면서도 정작 백제나 신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北魏의 역사를 다룬 <魏書>에 백제가 처음 등장한다. 여기에서 백제는 스스로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북위가 고구리를 정벌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하는 대목의 기록으로서 백제를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북위에 사신을 보낸 시기는 北魏 高祖 연흥 2년(472년)때라고 한다. 위 지도는 499년 낙양으로 천도 하기 전의 북위가 존재 하던 지점이며 이때의 동북아시아 정세는 建興帝의 시기로서 고구리 최정성기 때 였다.
백제 개로왕이 죽기 2년전(473년)의 일인 것 같다. 이때 고구리가 건흥제의 아버지인 永樂帝때 부터 백제를 거의 멸망상태로 몰아 갔다. 왜냐하면 고구리와 백제는 원한이 있었다. 近肖古王에게 永樂帝의 할아버지인 故國原王이 戰死 하면서 고구리는 어렵게 마련한 영토인 지금의 山西省과 遼東을 버리고 다시 戎(지금의 감숙성 돈황)으로 돌아 가야만 햇던 아픈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백제가 사신을 통해 북위에게 보낸 國書의 내용을 보면 백제가 그동안 北魏에게 조공하지 않은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비정하는 북위 北魏와 百濟 사이에 고구리가 버티고 가로 막아서 북위에게 조공하지 못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비정하는 위의 북위의 지도가 사실이라면 백제가 해상으로라도 얼마든지 북위와 통교가 가능 할 것이다. 그러면서 백제의 서쪽 경계를 "臣西界<小石山>"라고 표현을 한다. 소석산의 위치는 아래 지도와 같다. 소석산의 위치는 현재 중국 운남성 邯郸(한단)市 永年县이다. 즉 이때의 백제의 위치는 山東半島를 말하는 것이며 산도반도를 영토로 하고 있던 백제의 서쪽 경계가 바로 소석산이며 이때는 北魏는 魏顯祖(465~471)때이며 고구리는 建興帝(장수)때 이며 백제왕은 개로왕( 455~475)때인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와 대만 그리고 베트남인들의 遺傳的 同質性의 비밀 바로 어제 우리나라와 대만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의 유전자가 거의 "같다"라는 것과 그 유전자가 북방 종족과 결합된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와 같은 遺傳的 同質性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고대 동아시아 역사 패러다임을 기존의 상식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설명할 수 잇는 방법이 없다. 기록에서 언급한 백제의 영역은 바로 동아시아 유전의 비밀을 풀고 그 유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할 수 잇는 유일한 키워드라고 필자는 감히 생각 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중국 동해안은 모두 해양 백제의 영역이엇으며 이후 백제를 통합한 통일 신라의 영역과 옛 백제의 영역에 따라서 한반도와 대만 그리고 越州 였다는 지금의 하노이의 베트남 유전자가 모두 같을 수 있는 역사가 존재 하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니며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한반도에 집착하는 한 우리 고대사는 진실의 언저리만 맴돌 뿐이다. 동아시아 역사는 모두 우리 민족의 역사이며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는 언제나 변방 역사 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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