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치우천왕 군사기

황령산산지기 2016. 9. 18. 09:59



치우천왕 군사기

 

치우천왕 군사기 1장 치우천왕의 기무

임금마다 '삼일신고'를 앞장서서 강론하고 삼법수행을 독려하던 때이기에 임금 자신이 어느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배달나라 때에도 한나라와 같이 임금이 세습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한나라에서 임금을 뽑을 때와 같이 득도의 정도가 고려된 상태에서 화백으로 임금을 뽑았을 것이기 때문에, 임금은누구보다도 기무의 단게가 깊었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치우천왕의 신령스러운 이적과 불가사의한 용맹은 가능하다고 할수 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치우천왕이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불변하지 못하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치우천왕은 만고의 무신용강의 조상으로서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불을 부리며 또 만세의 도술의 근본이 되어 바람과 비를 부려 일으키고 만신을 불렀다."

호풍환우 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 기후를 변화시키고 신을 부릴 수 있는 정도라면 그 경지가 어는 정도임을 짐작할수 있다.

치우천왕에 관한 이 신기한 얘기는 신화가 아니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백년도 채 안되는 구한말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이야기는생소하지 않았다 서양문명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을 서양사람의 척도로 인식하는등 의식이 바꼈기 때문이다 기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수련을 통하여 어느 수준의 도에 이르면 바람과 비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온 백성이 삼법수행을 하도록 제도적으로 독려하던 사회에서의 기무수준은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런 정도에 이른 백성을 이끌고 가야하는 임금의 무예경지는 천하가 인정하는 정도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신을 부리는 경우와 신에 부림을 당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게 영계와 접하는 길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그하나는, 정상적인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그 심도가 깊어지는 만큼 점차적으로 영계와 연결되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고 신이 내려 영계와 접하게 되는접신의 경우가 있다.

앞의 경우는, 기의 수련을 통하여 영력을 키워 신과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극복하면서 영계를 드나드는 상태이기 때문에 신을 부릴수 있고 뒤의 경우는,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이 부리기에 까다롭지 않는 사람을 골라서 쓰기 때문에 신이 부리는 대로 따라하기만 하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기를 통하여신과 연결될 수 있다 정상적인 기의 수련을 통하여 그 심도가 단계적으로 깊어지지 않으면 신을 부릴수 없다 따라서 치우천왕은 삼법수행을 통하여 기무와 예무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군무에 연결시켜 초능력을 행한 대표적인 영걸인 것이다.

치우천왕 군사기 2장1절 공상전투와 탁록전투의 시대배경

치우천왕은 배달나라 제14대 자오지 환웅(B.C 2706~B.C 2598)이다. 환웅천왕 보다 약 1천1백년 후에 태어났으며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기 2백60여년 전에 있었던 분이다.

우리 역사에서 전쟁과 무기에 관한 본격적인 기록이 보이는 것은 이때부터 이다. "환웅천왕의 행차에 운사가 많은 군사로 호위하니 그 의장과 위세가엄숙하였다." 등 기록은 있으나 자세한 전쟁기록은 역시 지금의 중국대륙을 누비며 영걸스러운 용맹을 떨쳤던 치우천왕 때부터 이다.


치우천왕에 관한 기록은 여러 사서들에 있으나 [환단고기]만큼 자세하지 않다. [환단고기]에 있는 치우천왕의 전쟁기록은 전쟁뿐만 아니라 그때 사람들이 펼쳐내는 생생한 역사이다. 당시 배달나라 강역은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중국대륙의 동쪽까지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서쪽은 문명을 모르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았다.

제5세 태우의 환웅 임금(B.C 3511~B.C 3419) 때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막내 아들인 복희씨를 비롯하여 수인씨와 유소씨를 서쪽 제후로 임명하여 문명한정치를 하게하였다.

그후 복희씨가 다스리던 나라는 그의 여동생인 여와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며 여와의 뒤를 이어 소전의 아들인 신농씨가 다스렸다. 제10세 갈고 환웅(B.C 3070~B.C 2971)때에 이르러서는 신농씨가 다스리던 나라의 경계를 공상서쪽으로 정하였다.

그뒤 신농씨의 나라는 제14세 환웅인 치우천왕때에 이르러 유망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유망은 정치를 어지럽게 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많아 백성들이 흩어지는등 혼란하였다. 이 영향이 배달나라에서 경영하던 다른 제후들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때 서쪽에는 동이겨례인 헌원이 토착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치우천왕 군사기 2장2절 공상전투

이같은 주변정세를 보다못한 치우천왕은 유망을 토벌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불안한 서쪽땅을 모두 안정시키기로 하였다.

이에 임금은 내치부터 튼튼히 하기 위하여 백성과 더불어 잘못된 제도를 개혁하여 하늘을 받들어 삶을 알게하고 땅을 일궈 삶의 법칙을 알게 하는등 사람을 깨우쳐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안으로는 병사를 양성하여 용맹스럽게 키우고 밖으로는 정세의 변화를 살피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약해지자 드디어 군사를 출정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 임금의 형제와 친척중에서 장수 될만한 자 81명을 뽑아 모든 군사 를 나누어 지휘하게 하고 이들을 데리고 갈로산에 들어가 광석을 캐내어 청동으로 칼.투구.창, 그리고 활촉을 만들었다.

청동제 무기로 무장한 치우천왕의 군대는 일제히 탁록부터 공격하여 승리 하니 그 기세가 질풍과 같았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한 해 동안 아홉 제후의 땅을 평정하였다.

임금의 군대는 다시 옹호산에 들어가 수금과 석금을 캐내어 아홉개의 야금소를 설치하고 거기에서 예과와 옹호극을 만들어 무장을 강화하고 군대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임금은 군대를 이끌고 드디어 유망을 토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양수를 거쳐서 유망이 도읍하고 있는 공상으로 물밀듯 쳐들어갔다. 이때 유망은 소호를 시켜 항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천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크게 싸워 이기니, 소호는 크게 패하여 항복하였으며 유망은 도망하고 말았다.


이 해에 열두 제후의 나라를 굴복시켜 합병하였다. 이때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으며 서토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가서 숨지않는 자가 없었다.


치우천왕 군사기 2장3절 탁록전투

공상전투에서 승리한 치우천왕은 하늘에 제사지내면서 천하가 태평하기를맹세하고, 다시 군사를 진격시켜 탁록으로 향하였다.

이때 동이겨례면서 서토사람들의 우무머리가 된 헌원이라는 자가 있었다. 헌원은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자기도 천자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여 왔다.

천왕은 공상전투에서 항복한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고 처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헌원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이에 천왕은 친히 전쟁에 나서기로 하고 9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9군중 8군은 2군식 나누어 4방향으로 포위.진격하게 하고 천왕은 나머지 1군(보병과기병 3천) 을 직접 거느리고 헌원의 진의 중앙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천왕의 군대는 헌원을 향하여 사방에서 조여들어갔으나 굴복하지 않자, 크개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에 적군은 두려움에 떨며 목숨을 걸고 도망치니 백리 사이에는 병마를 볼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기주.연주.희대땅이 모두 평정되어 탁록에는 성을 쌓고 희대에는 집을 짓자 헌원의 족속들이 모두 신하라 하고 공물을 바쳤다. 치우천왕이 군대의 진용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지 10년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뒤로 물러설줄 몰랐다.

그러나 후에 헌원이 여러 차례 싸워 천왕에게 패하고도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천왕을 본받아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거를 만들어 감히 백번이고 싸움을 걸어왔다. 천왕은 불같이 노하여 장수들에게 크게 싸워 위력을 보이도
록 하였다. 천왕의 군사는 헌원이 다시는 싸울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판 큰 싸움을 벌여 한 개의 진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이때 비석 박격기(돌을 날리는 무기 발석차를 가리키는 것 으로 생각됩니다)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 무기로 진을 이루어 진격하니 헌원의 군대는 끝내 저항하지 못하였다. 이 후에야 싸움이 그쳤다.

전쟁에 패한 헌원은 치우천왕을 뵈러가는 길에 당시 명성이 높았던 자부선인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는 치우천왕의 영걸스럽고 불가사이한 전법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이다. 자부선인은 헌원에게 [삼황내문경]을 주면서 공연히 싸움을 좋아하지 말고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하며 가르쳤다.

[삼황내문경]에는 옛부터 내려오던 동이겨례의 심신수련으로 치신득도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고유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에 관한 내용이 담겨져있는 경전이다.

헌원은 이를 자부선인으로부터 배우고 익혀 서토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이것이 우리 문명, 곧 동이문명이 처음으로 서토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계기인 것이다.

[사기]를 비롯한 중국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들에는 치우천왕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황제헌원을 높이기 위하여 횡설수설하며 당시의 전사를 바른대로 기술하지 않았다. 치우천왕에 관한[사기]의 기록을
옮기면 이렇다.

"신농씨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낣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이때 헌원이 무력으로 제후 들을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염제는 제후들을 쳐서 복종시키려 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헌원에게로 돌아갔다. 헌원은 이에 덕으로 다스려 병사들의 전력을 떨쳤으며 오기를 다스리고 오곡을 심게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졌다....... 판천들에서 염제와 세번 싸운 후에야 이길 수 있었다. 이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 헌원은 여러 제후들을 불러모아 탁록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제후들이 헌원을 높이므로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큰 오류를 범하였다. 신농씨는 B.C 3100년경 사람인데 그 300년 후인 B.C27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하던 헌 원이 신농씨와 전쟁을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신농씨의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렸던 유망과 싸웠다고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치우천왕은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청동으로 갑옷과투구와 칼과 창을 만들어 사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는 사실이 중국 사서들에는 거의 공통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치우천왕을 잡아 죽임으로 탁록전투에서헌원이 승리하였다고 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치우천왕을 죽였다고 하는것은, 치우의 장수인 치우비가 급히 공을 세우려고 하다가 진 중에서 죽은 것을 두고 말하는 억지이다.

[사기]의 {집해}.{색은}.{정의}에는 여러 고서들을 인용하며,

"치우는 옛천자"라고 하는가 하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며 몹씨 사나워 천자가 될 수 없다"

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엇갈린 주장을 담고 있다.

또 "치우는 형제가 81명 있었는데 몸은 짐승이나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있으며, 모래를 먹고 산다. 오구장.도극.태노 를 만들어사용하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고 하였다.

치우천왕이, 당시에는 엄두도 못냈던 청동제 투구와 갑옷과 칼과 창등 무기를 사용한 문명인임을 스스로 밝히면서도 모래를 먹는 짐승으로 치부하였다는것은, 그 기록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치우는 무도하게 사람을 죽이므로 그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며 황제 또한 인의로 치우를 막을 수 없어 하늘을 향하여 탄식하였다."는 것은, 황제는 의롭고 치우는 무도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부선인이, 가르침을 청하는 황제에게 삼황내문을 주면서, "제발 마음을 씻고의롭게 살라." 고 충고한 것을 보면 오히려 황제가 얼마나 무도하였는가를 알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옛 중국사가들은 치우천왕에 관한 기사를 아예 빼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중국은 황제헌원을 중국 역사의 첫 머리에 놓으려고 하다보니 워낙 유명했던 치우천왕과의싸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데 고층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신해경]을 인용하며, 황제가 응용( 이 응용 이라는건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를내리는 일을 맡은 용이라고 합니다.)을 시켜 치우를 죽였다는 등 신화와 같은애기를 하며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 사서들은 사실을 완벽하게 가리우지는 못하고 왜곡의 흔적이크게 남아있어 후세 사람들이 비판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잘못 인식되어온 동양사를 바로 잡는데 좋은 근거로 활용 될 수 있어
다행이다.


치우천왕 군사기 2장4절 공상.탁록전투가 남긴 것...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치우천왕의 전사는 우리 역사는 물론, 중국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동양 최초의 전사 기록이다. 비록 그 내용이 전혀 상반되는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전쟁기록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동북 아시아에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이때 치우천왕이 처음으로 청동제 무기를 만들어 실전에서 사용하였다, 아직 돌과 활만 의지하던 때에 청동제 칼과 창과 투구의 등장은 지금의 전자유도무기와 같은 첨단무기 보다 오히려 더 놀라운 무기일 수도 있다. 때문
에 이런 무기의 등장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동양문화사에서 새로운 획을 긋는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둘째, 이 전사에 처음으로 군사편제와 진법이 소개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구군편제와 5방진법 이다.

세째, 치우천왕이 헌원과의 싸움에서 안개를 일으켜 적이 방향을  분간할수 없게 하였다는 사실은 기무가 처음으로 군무에 활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기공무예의 수련으로 득도한 치우천왕은 호풍환우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이같은 초능력이 처음으로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넷째, 이 전쟁으로, 한나라로부터 시작되어 배달나라로 이어진 기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무예가 처음으로 서토, 곧 중국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다섯째, 이 전쟁은 한때 혼란했던 동이겨례를 새롭게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영향이 크게는 단군조선의 건국까지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섯째, 이 전쟁은 오늘의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그곳은 엄연히 동이겨례의 근거지라는 사실을 말해주며 유망과 헌원역시 동이겨례여서, 당시 전쟁이라야 동이겨례 끼리의 전쟁이었다. 동북아시아는 동이겨례 말고 이에
버금가는 족속이 없었으며 동이겨례, 곧 배달겨례의 독무대 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치우군사기 3장: 치우천왕의 진법과 군편제.

치우천왕이 황제헌원과 싸우던 기록을 참고하여 그때의 진법과 군편제를 추정해볼 필요가 있다.

치우천왕의 휘하에는 9군이 있었다. 황제와의 싸움에서 이중에 8군을 각각 2군씩 네 방향으로 진격시켜 포위하게 하였으며 나머지 한개의 군은 임금이 직접 지휘 하였는데,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렸다고 하였다. 이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9군 중에 1군은 임금이 직접 지휘하는 특수군이라 할수 있으며, 각군마다 아홉개의 예하부대가 있어 그중 한 부대는 임금처럼 군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인 것이다. 이것을 '1.8편제'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부대편제 역시 군편제와 같은 '1.8편제'라 할 수있다. 거기에 81명의 지휘관(장수)이 있었다고 하니81개 부대를 81명의 장수가 각각 맡아 움직인 것이다.

이같은 군편제에서 특히 눈에 뛰는 것은 1.8.9.81등 숫자이며, 적진에 진격하며 작전방향도 5방진법이다. 이는 역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수들로써 당시의 군편제등 국가행정조직이 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부경 으로부터 환역이 나왔으나 본격적인 역의 시작은 복희씨가 천부경에서 팔괘를 만든 때부터 친다고 하더라도 치우천왕은 복희씨보다 7백여년 뒤사람이다. 때문에 치우천왕 당시에는 이미 군편제등 여러 분야에서 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 증거로, 배달나라 국가조직에는 삼백.오사 조직이 있었다. 삼백은 풍백.우사.운사 이고, 오사는 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 이다.

이같이 국가 원형조직의 이름에 숫자를 붙혔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 그러나 삼신.오가.오사등 숫자는 우리 상고가에서는 수없이 등장되는 숫자이다. 3과 5 역시 삼극.오행등 역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숫자이다.

치우천왕 군사기 4장 치우천왕 때의 무기.

치우천왕은 81명의 장수들이 거느리는 군사를 ..... 이끌고 갈로산에 들어가서 쇠를 캐어 칼.투구.창.갈라 진창.활촉을 만들었다. 옹호산에서는 수금과 석금을 캐어 예과와 옹호극을 만들었다. 이밖에 돌을 날려 적을 치는 비석
박격기 라는 신무기도 만들었다.

당시 서쪽 사람들은 무기라고 해야 돌과 활 정도였는데 치우천왕이 투구와 갑옷을 입고 나타나자 구리머리와 쇠이마를 갖인 사람이라 하여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치우천왕은 청동기로 무기를 만든 최초의 동양인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양의 청동기문화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기록이기 때문에 앞으 로의 조사 발굴에서 사실여부가 가려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당시 치우천왕이 활동하던 무대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하남성.산둥성.강소성.안희성등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기록에 나타나 있는 당시 무기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검....................... 검
개....................... 투구
모....................... 창
극....................... 끝이갈라진 창
대궁..................... 큰활
예과..................... 짧은창
옹호극................... 갈라진창
비석박격기............... 돌을 날리는 무기


이밖에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오구장.도.극.태노를 사용하였다고 하였으며 [여씨춘추]에는, 과.극.수.추모.이모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무기들은 치우천왕의 아홉개 군이 각각 하나의 단위가 되어 광석을 캐는 일부터 쇠를 녹이는 야금소까지 차려놓고 만든 무기들이다. 아홉개의 군에 각각 아홉개의 야금소가 있다고 하여 구야 라고 하였다.


치우천왕 군사기 5장 치우천왕과 동양문화

중국대륙의 많은 부분을 찾이하고 있던 배달나라는 나라를 연지 천년이 지나면서 나라를 넘보는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치우천왕 때에 이르러서는 유망, 황제헌원등 세력이 고개를 들었다. 이들이 노리던 곳은 주로 서북쪽의
탁록지방, 서남쪽으로는 공상일대, 남쪽으로는 넓은 황회평야 였다.

이같은 주변정세의 변화에 직면한 치우천왕은 삼법수행으로 닦은 높은 기무의 능력을 군무에 활용하면서 이에 연관되는 새로운 문화를 태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전쟁으로부터 발달된 이 새로운 문화는 동양사를 전혀 새로운 단계에 진입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열거 할수 있다.

첫째, 치우천왕에 관한 기록은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전사인 동시에 동양사에서도 보기드문 전사중의 하나이다. [사기]등 중국사서들에도 있는 이 생생한 전사는 본격적인 전사기록의 시작인 것이다.

치우천왕 이전에 있었던 군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8세 환웅안부련 임금 73년(갑술, B.C3167)에 신농씨의 아버지인 소전이 임금의 명을 받아 강수에서 군사를 감독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아니다.

둘째, 기무를 군무에 처음 활용하였다. 전쟁중 적의 저항이 거샐때 안개와 비바람을 일으킨 것은 기무를 병법에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표적인예이다. 이는 기무가 군무에 실제로 활용된 최초의 기록이며, 당시의 전쟁양상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므로 우리 무예는 동양전사에 큰 획을 그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는 치우천왕의 기무에 자극받아 지부선인을 찾아가서 기와 도에 관한 배움을 청하지 않을수 없었다. 황제가 지부선인으로부터 받은[삼황내문] 은 후에 중국의 도교를 일으켰고 오래된 고전중의 하나인 [황제내경]의 뿌리가 되었다.

셋째, '9군 1.8편제'라는 새로운 군편제가 형성되었다. 임금 밑에 9군이있고, 9군 밑에 각각 아홉개씩의 예하부대, 도합 81개의 부대가 있었다. 9군중한 군은 임금이 직접 지휘하고 각 군사령관은 예하 9개 부대중 한 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1개 군에는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3천명 정도였다. 이같은 군조직은 무기를 만드는 일에도 투입되어 아홉개의 야금소에서 무기를 만들게 하는등 전쟁 아닌 국가의 큰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 군의 공격진법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적을 포위하고 한개의 진이 중앙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오방진법이 처음 등장하였다.

넷째, 돌.활.주먹이 고작이던 때에 치우천왕에 의하여 최초의 청동제무기가 등장하였다. 문헌상으로는 동양의 청동기문화의 기원이라고 할수있다. 이때 가 서기전 2천6백년 대이므로 고고학적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동양에서의 청동기 사용 연대도 꾸준히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결론은 후대에 밝힐 일이라고 생각한다. 치우천왕은 청동제 무기뿐만 아니라 비석박격기 까지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안개를 일으켜 황제의 군대에게 방향을 분간할 수 없도록 만들자, 황제는 이를 계기로 지남거를 만들었다고 한다. 십여년 계속된 이 전쟁은 동양의 무기체계를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다섯째, 작은 활만 있던 때에 큰활과 화살이 등장되었다. 큰활과 화살은 동이족의 대표적인 무기이며 그 위력 때문에 중국인들이 오랜 세월동안 탐을 내던 무기이다. 잘 알려진바와 같이 동이는 동쪽의 큰활을 갖인 민족이라는 뜻
이다. 화살 또한 촉이 특수한 돌로 되어있어 쇠를 뚫을 수 있다. 이 특수한 돌은 백두산 근처에서만 난다고 한다. 이 활과 화살을 오랜동안 중국에서 수입해 갔다. 우리 겨례의 이름이 될 정도로 유명했던 이 활과 화살은 긴세월 우리 동이 겨례의 주력무기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공자가[춘추]를 지으면서 이라는 이름이 오랑캐라는 이름과 더불어 더러운 뜻으로 되고 말았다.


치우천왕 군사기 6장 동이문명을 배운 황제

기가 없는 무예는 동양무예가 아니다. 기는 동양무예의 바탕이며 요체이기때문이다. 한나라로부터 전해진 기무는 치우천왕 때에 이르러 군무에 도입되면서 당시의 병법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하였다.

황제헌원은 10년동안 치우천왕과 73회나 싸웠다. 그러나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치우천왕의 높은 기무의 법력과 당시 첨단병기라고 할수있는 청동제무기 큰활 앞에서는 속수무책 이었다.

긴 전쟁에서 지칠대로 지친 황제는 치우천왕의 불가사의한 병법의 비밀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자부선생을 찾아뵙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당시 배달나라의 대석학이며 선인 이었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황제의 청을 받은 자부선생은 [삼황내문경]을 주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바로 다스려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기무만 배우려들지말고 마음공부와 기공부를 함께하는 삼법수행, 곧
배달나라 정통무예를 배우라고 한 것이다.


치우천왕의 병법의 법력을 알려면 기무를 알아야 하고. 올바른 기무수련은 삼법수행으로 만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이렇게되어 황제는 자부선생으로부터 운기연공법등 체계적인 무예공부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황제는 공공.창힐. 대요.와 함께 수학 하였다.

황제헌원이 자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은 우리의 고유한 사상.철학.종교와, 이에 포함되어 있는 기.무.의.역 등의 체계적 이론과 실상이 처음으로 서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것이 동이문명이 중국문화의
시원이 된 경로인 것이다.

자부선생으로부터 [삼황내문경]을 받고 그 밑에서 공부한 황제는 자신이 배운것을 후세에 남겨 그 자취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국의 도교.무예.의학등을 들 수 있다. 황제의 가르침은 노자로 이어져서 도
교의 바탕이 되었으며 동양의학의 가장 오래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의서에 '황제'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이 [황제내경]이다. [황제내경]은 황제보다 훨씬 후대에 쓰여졌다는 주장은 여러면에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의서에 흐르고 있는 학문적 맥과 의학적 특색은 자부선생의 학문으로 집약되는 동이문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황제내경]은 황제에 가탁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이름을 붙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기에 관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기'라는 글자가 [황제내경]에서 처음 쓰여졌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삼일신고를 모르기 때문이다. 삼일신고가 어느 시대의 글이며 그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주장은 사라질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 들어간 동이문명의 유입경로를 정확히안다면 그런 주장은 저절로 없어질것이다.

동양문화는 무엇이든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막연한 인식은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은 말고라도 요.순.고조선(단군조선)이 지금의 중국대륙에서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이 몇천년 동안 동양문화를 발전 시킨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원과 바탕은 동이문명 이다. 이는 중국사람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황노사상은 동이 것이며 선교 또한 황노의 줄기가아니라고 [규원사화]등 여러 사서들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자부선생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아보자. 선생을 자부선인 이라고도 한다. 선생은 치우천왕 때의 대학자이며 기무에서는 선인의 경지에 이른 분이다. 선생이 [삼황내문경]을 지어 임금께 바치니, 임금께서 감복하여 대풍산 양지바른
곳에 삼청궁을 지어주며 그곳에서 더욱 학문에 힘쓰고 후학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선생은 거기에서 해와 달의 움직임을 살펴 오행의 수리 이치를 참고하여칠성역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천부경'에서 '삼일신고'가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복희씨는 팔괘를 만들었으며 환역을 완성하였다. 이 모두를 근거로 하여 자부선생은 [삼황내문경]을집대성하게된 것이다.

이렇듯 천부경.삼일신고.환역.삼황내문경등은 동양사상의 밑뿌리이며 바탕이다. 동이족에서 비롯된 이 근본이 오늘까지 수천년 이어지고 있는 동양의 정신세계는 물론, 의.무 까지 지배하는 요체가 되고있다.

[포박자]에서는 [삼황내문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선도서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삼황내문]이다. 이 책이 집안에 있으면 요사스러운 악귀.질병.재앙들을 피할 수 있다. 죽을 병이 걸린 사람도 이 도를 지극히 믿으면 이 신선도서를 갖게되어 절대로 죽지 않는다. 아기밴자가 기절하더라도 이 책을 가지면 아기까지 살 수 있다. 도사가 길이 살고 싶어 이 책을 갖고 산에 들어가면 범.이리.산귀신등 다섯가지 독과 백가지 사기가 감히 가까이오지 못하며, 사람이 강과 바다를 걸어갈수 있고 용을 물리치고 바람과 풍랑을 그치게 할 수 있다.

삼신이란, 신이 셋이 있는것이 아니라, 주체는 하나의 하느님이시고 작용하면 세 신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이 조화.교화.치화의 세 작용을 하기 때문에 삼신이라 하는 것이다.

[삼황내문경]은 하느님을 공경하여 제사하는 사람들의 경전이라는 뜻이되며 배달겨례의 사상과 종교가 담긴 책인 것이다. 이것이 황제헌원을 통하여전해지면서 배달나라의 체계화된 무예 또한 서토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치우천왕 군사기 7장 배달나라 무예강역과 서토

치우천왕 당시(B.C2706~2598) 의 배달나라 강역은 어디까지이며 황제의 근거지였던 서쪽땅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가 궁금하다.

배달나라 강역은 동이겨례의 무예강역이며, 서쪽 땅의 위치는 황제의 무력 관할지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황제의 혈통과 근거지, 그리고 그의 이동경로를 살펴볼 필요가있다. 우선 그의 조상에 관한 몇가지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기]에 염제가 강수가에서 자랐기 떄문에 성을 강씨라 하였으며 염제와 황제가 모두 소전의 자손이다. 황제가 소전국의 둘째 아들이며.....수구에서 나서 희수가에서 자랐기 떄문에 성을 희씨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대신선통감]에는, 염제신농의 아우 욱의 9대손 계곤의 아들이 황제이며 그가 희수 근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을 희씨라고 하였다는 기록이있다. 또 [제계사기]에는, 황제가 백민에서 났으며.....스스로 동이 사람이라고 하였다.

[환단고기]의 [삼한관경본기]에는, 안부련 환웅(B.C3239~3167)의 말년에 소전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강수에서 군사를 감독하였다. 그의 아들 신농씨는 일찌기 백가지 풀을 가지고 약을 만들고 그 뒤에 열산으로 옮겼다......소전의다른 갈래는 공손이라 하였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한다고 하여 헌구로 쫓아냈다. 헌원의 족속이 다 그 후손이라 하였다.

[환단고기]의 [신시본기]에는, 신농씨는 소전의 아들인데, 소전은 소호와함께 모두 고시씨의 방계후손이라 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여러 기록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황제헌원과 신농씨는 모두 소전의 자손이며 소전은 배달겨례인 고시씨의 후손인 것이다. 더구나 황제 자신이, 나는 백민(희고 환한백성, 한백성, 한민족)에서 난 동이겨례라고 하였
다. 이들이 자라고 활동한 곳을 살펴보면, 소전이 강수에서 군사를 지휘 하였으며, 신농씨는 열수로 옮겨 살았다. 황제헌원은 헌구에서 태어났으며 희수에서 살았다.

황제헌원의 이동경로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사기]에, 황제는 서방족의 여인인 유저를 아내로 맞았다고 하였으며, [산해경]에는, 황제가 서쪽지방에 있다가 동방족 임금인 치우천왕과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제는 고시와 소전의 혈통을 받은 틀림없는 동이 겨례이다. 그가 헌구에서 나서 희수에서 살다가 서방족 여인에게 장가들어 지금의 감숙성과 섬서성 지방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황제는 거기에서 군사를 일으켜 동북쪽으로
진격, 산서성을 지나 상하를 따라, 지금의 북경 서북쪽 탁록에서 치우천왕과싸웠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중국의 시조로 여기는 황제에 관한 기록을 흘터보면, 황제는 분명 동이겨례이면서 서쪽 여자와 결혼하여 그 쪽에서 힘을 키웠다. 그러나 당시 동이겨례는 중국대륙 깊숙히까지 들어가 활동하던 때이며 전쟁이라야 동이
겨례끼리의 싸움이었다. 중국사서들에도 그때 중국사람과 동이겨례가 싸웠다는 기록은 없다. 황제와 치우천왕과의 싸움도 동이겨례 끼리의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안호상은[배달.동이는 동아문화의 발상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마천의[사기]에서 황제헌원을 맨 첫머리에 싣고, 공자가 엮은[서경]에선 요임금을 맨 첫머리에 실었다...... 그러나 우리가 동아역사를 깊이 연구해보면 [사기]나 [서경]에서 황제나 요임금을 중국 역사의 시조라 하거나 혹은
중국사람의 시조라고 한적이 없다. 황제나 요임금이 모두 동이겨례의 후손이며한옛적엔 중국 종족이나 중국 나라란 것이 도무지 없었던 까닭이다. 만일 중국의 고유한 역사가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배달.동이인 동아의 가지역사(지파역사)요, 만일 중국사람의 시조가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 배달.동이 사람인 것이다. ......까만 한옛적엔 가운데 땅, 가운데 벌, 가운데 나라(중국)란 것이 모두 막연하고 모호한 관념과 억측으로써 된 이름이다. 그 땅에 있던
여러나라들의 경계.원종족.역사시조등만이 아니라, 중토.중원 자체의 위치와 범위까지도 똑똑하지 못하다.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여 한인들이 중토, 중원을 자기들의 땅과 나라라 하고, 또 자기들 중심의 역사를 꾸며냈다. 그러나 까만 한옛적에는 이 중토와 중원 전체가 배달.동이겨례의 땅인 것이다. 그때 만일 그곳에 이른바 하인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들은 양과 질로 보잘것 없었을 것이다."

치우천왕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대륙은 거의 동이겨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다만 서토라고 하는 지금의 섬서성과 감숙성등지에는 타림분지쪽에서 온  서쪽 족속들이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아직 모계사회였으며 사회적
규범이나 철학.종교등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때 동이겨례인 황제가 그곳에 들어가서 지체 높은 그곳 여인에 장가들었다. 그가 거기에서는 유일한 문명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명령을 듣고 따랐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황제는 그들을 훈련시켜 힘을 키운뒤, 배달나라의전략요충지인 탁록성을 공격한 것이다.

그가 서토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무예능력을 지닌 문명인이 었지만 그의 무기와 병법으로 치우천왕을 이긴다는 것은 역부족이 었다. 그는 서쪽땅을 전전하느라고 배달나라의 체계적인 정통무예를 배우지 못하였기 떄문이라고 봐지
는 것이다.

더구나 기무를 군무에 활용하여 바람과 비를 부르는등 초능력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에 놀란 황제는 자부선인을 뵙고 치우천왕의 무예인 정통 동이무예를 배웠다. 뿐만 아니라 [삼황내문경]을 통하여 무예도까지 배우게 되면서 득도의 길에 들어서게 된것이다.

[포박자]에는, 황제헌원이 동방의 청구땅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 자부선생 을 찾아뵙고 [삼황내문경]을 받아 배우고 온갓 신을 부르며 부렸다고 하였다.

이는 황제헌원이 자부선생으로부터 배운 배달나라 정통 기무의 수련을 통하여 신을 부리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정확한 기록이다. 사람이 삼법수행을 통한 기무수련으로 어느경지에 이르면 비바람을 부를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신도 부릴수 있게되는 것이다. 치우천왕이 황제와의 전투에서 안개를 일으켜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한 것이 좋은 예이다.


치우천왕 군사기 8장 배달나라 군사연표.

B.C
3897 제1대 환웅 거발한(환웅천왕)즉위.
*신시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움.
*환웅천왕 기무 수련으로 득도함.
*곰족의 딸(황후)이 기무 수련으로 득도함.
*'천부경'.'삼일신고'를 녹도문으로 옮겨 성문화함.
*백성들에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삼법수행을 독려함.

3803 제2세 환웅 거불리 즉위.

3717 제3세 환웅 우야고 즉위.

3618 제4세 환웅 모사라 즉위.

3511 제5세 환웅 태우의 즉위.
*백성들에게 묵념.청심.조식.보정을 가르침.
*복희씨 팔괘를 만듬.

3418 제6세 환웅 다의발 즉위.

3320 제7세 환웅 거련 즉위.

3239 제8세 환웅 안부련 즉위.
3167*소전이 명을 받아 강수에서 군사를 감독함.

3166 제9세 환웅 양운 즉위.

3070 제10세 환웅 갈고 즉위.

2970 제11세 환웅 거야발 즉위.

2878 제12세 환웅 주무신 즉위.

2773 제13세 환웅 사와과 즉위.

2706 제14세 환웅 자오지(치우천왕)즉위.
*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처음 청동제 무기를 만듬.
*1년 안에 9개 제후의 땅을 함락시킴.
*12제후의 나라를 병합함.
*탁록에서 황제헌원과 싸울때 안개를 일으켜 크게 이김.
*황제헌원의 무리가 와서 항복함.
*황제가 자부선인을 찾아뵙고 우리 정통무예를 배웠으며 [삼황내문경]을
받아감.
*배달나라 무예가 황제에 의해 처음으로 서토에 들어감.

2597 제15세 환웅 치액특 즉위.

2508 제16세 환웅 축다리 즉위.

2452 제17세 환웅 혁다세 즉위.

2380 제18세 환웅 거불단 즉위.
2333*배달나라는 역년 1565년으로 끝남.


출처 : 화 목 한 사람들
글쓴이 : 금다래 산머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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