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bay!!!

[스크랩] 라그나뢰크

황령산산지기 2016. 4. 22. 08:49

 

겨우살이 이야기 ③-②

 

 

 

노르네 여신들이 자아내던 운명의 실이 갑자기 끊어졌다. 여신들은 세계의 운명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세계의 앞날은 이제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되었다. 아서 레컴의 그림에서. 1911년 / 『안인희의 북유럽신화』(웅진 지식하우스, 2009년) p.199

 

 

오딘과 프리크 여신의 아들 발더(발데르, Balder, Baldr, ‘왕’, 또는 ‘주인’이라는 뜻)는 아름다움과 선(善), 정의의 신이고, 빛의 신이며, 봄의 신입니다. 투명하고 하얀 피부에 하얀 속눈섭,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졌습니다. 그가 나타나면 마치 온몸에서 광채를 발하는 것 같았지요. 단지 그 생김새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아제의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지혜와 선량한 마음을 지녔으며, 공정했고, 늘 아름답고 좋은 말만 하여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발더는 명실 공히 발할(Walhal) 궁전의 보석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인간들은 그를 태양과 빛의 신으로 숭배하였죠.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부터인가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고 불길한 예감으로 수심이 깊어갔습니다. 빛의 신 발더에게서 점점 빛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스런 발더에게 죽음의 운명이 내려진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 프리크 여신은 아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먼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존재로부터 발더를 해치지 않겠노라는 맹서를 받아냈습니다. 신들은 물론, 물과 불, 쇠와 돌, 흙, 눈, 비, 나무, 벌레, 사납거나 길들여진 짐승, 새와 뱀, 풀, 독(毒), 질병 등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발더를 해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내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발할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프리크 여신은 단 하나, 발할 동편에 사는 작고 가냘픈 겨우살이에게서만은 그 약속을 받지 않았습니다. 존재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너무 작고 연약해서 아무도 해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리크 여신이 돌아오고 아제의 신들 사이에 전에 없던 놀이가 유행했습니다. 발더를 해치지 않겠노라는 서약에 따라 어떤 무기도 발더를 맞히지 못하고 비껴간 까닭에 신들이 둘러서서 활과 돌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즐거워했지요. 신들의 이러한 놀이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발더를 향한 일종의 경의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신들은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고, 아무리 위협을 가해도 발더가 안전하다는 사실에 대해 진정으로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은 아닙니다. 불의 신 로키는 발더가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쾌하고 못마땅했습니다. 정작 신들의 궂은일은 자신이 도맡아 하고 있는데 사랑은 발더가 독차지 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는 짜증이 나 있었습니다. 로키는 노파로 변장을 하고 프리크 여신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교묘한 문답을 통해 여신으로부터 겨우살이의 비밀에 대해 알아내죠. 발더의 약점이 노출된 것입니다.

 

로키는 겨우살이를 잘라가지고 발할 궁전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신들의 놀이에서 소외되어 한쪽 구석에 외롭게 서 있는 눈먼 신 회두르에게 다가갑니다. 회두르는 오딘과 프리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발더의 형제였습니다.

 

“나는 발더를 볼 수가 없으니 쏘고 싶어도 쏠 수가 없고 아무런 무기도 없어.” 회두르가 신들의 놀이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자, 작은 나뭇가지를 그의 손에 쥐어주며 로키가 꼬드깁니다. “그가 어디 있는지 내가 가르쳐 줄 테니 함께 가자. 발더의 명예를 높여주어야 하지 않겠어!”

 

결국 회두르는 놀이에 동참하여 로키가 가르쳐 주는 대로 겨우살이 가지를 힘껏 던졌고, 작고 연약한 가지는 공중을 날아 발더의 가슴에 깊이 박혀버렸습니다. 발더는 곧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맙니다.

 

 

눈먼 신 회두르가 던진 겨우살이가 발더의 가슴에 "벼락"처럼 꽂혔다. 아서 레컴의 그림에서. 1900년경

 

갑작스런 상황에 신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넋이 나간 듯 한동안 서로 멍하니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한참 뒤에야 의식을 찾은 신들은 발더를 잃은 슬픔에 겨워 격하게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들의 울음소리가 발할 궁전 안팎에 넘쳐흘렀습니다. 당연하게도 모든 신들 가운데 아버지 오딘과 어머니 프리크의 슬픔이 가장 컸습니다. 오딘은 발더의 죽음으로 인해 머지않은 미래에 신들과 인간들의 세계에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아들의 죽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발더는 빛의 신이었습니다. 빛을 잃은 세계는 어둠과 사악한 기운에 지배되기 마련입니다. 선이 사라지고 지혜가 몰락한 세상은 종말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예언이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신들도 정해진 운명은 피할 수 없었지요. 발더의 죽음은 “라그나뢰크(Ragnarök)!”, 신들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첫 징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어둠(冬至)은 기실 새로운 날들(新年)의 첫 시작이죠. (어둔 날을 보내고도 새로운 날이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깊은’ 어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전쟁이 끝난 후 신들도, 거인들도, 인간들도 모두 사라진 세상, 축축한 안개와 검은 연기 사이로 삭막한 바람만 불던,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세상이 한참 지나고 기적처럼 바다에서 새로운 땅이 솟아오릅니다. 녹색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땅입니다. 하늘에선 새로 태어난 해와 달이 빛나고, 발더와 그의 아내 난나, 그리고 결백한 눈먼 신 회두르가 죽은 자들의 나라(冬)에서 살아 돌아와 들판을 거닙니다.(春) 오딘과 토르의 아들들, 한 쌍의 인간 남녀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봄날의 들판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라그나뢰크는 다음번 순환을 위해 꼭 필요한 전 단계 과정일 뿐이었어요.

 

북유럽신화는, 신과 인간의 적들이 모두 전투대형으로 정렬하자 거대한 물푸레나무가 흔들리고 아주 큰 가지들이 부러져 내렸으며, 하늘과 땅 가운데 두려움에 떨지 않는 존재가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겨우살이가 발더 신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고대 유럽민족들, 특히 인도유럽어족 아리아인들의) 세계수에서 잘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발더는 (이그드라실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지탱하는 긍정원리, 곧 세계수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 신화에서 발더는 빛의 신이며 동시에 수목의 신이기도 한 거지요. - 겨우살이가 자라는 세계수, 바로 참나무(Oak)를 말합니다.

 

 

 

겨우살이는 발더 신(세계수=참나무)의 심장이고 영혼이었습니다. 이를 테면 삼손에게 있어서 "결코 잘라서는 안 되는" 머리카락과도 같은 것입니다. 심장이 훼손된 자의 생명이 온전할 수 없듯, 신적 생명력을 간직한 나무의 영혼 겨우살이가 베어지고 나면 그 나무 또한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고대 유럽 선주민들(물론, 그들도 훨씬 오래 전에 이주해 와서 정착한 민족들이었습니다.)의 사고였습니다. -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프리크 여신께서 비밀을 너무 쉽게 누설하셨다는 점. 따지고 보면 몰락의 단초가 여신의 신중하지 못한 처신에 있다는 것인데, 게르만 신화는 최고의 여신을 그런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네요.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여성에게 덮어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들과 변덕스럽고, 질투심 많고, 이간질에 능한 못된 말썽꾸러기 로키 신의 특질들이 오버랩되어서 "이게 우연인 건가?" 하는 의혹이 들기도 합니다. 로키신이 암말이나 연어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살짝 걸리는 부분이고요. (라그나뢰크 때에 신과 인간들의 적이 되어 싸우는 로키 신의 세 자식들의 면면은 또 어떤가요?)

 

겨우살이(나무의 심장, 생명에너지의 원천)가 훼손되지 않고 공중 높은 곳, 세계수 가지에 그대로 달려 있는 동안에는 곧, 신성이 훼손되지 않는 동안에는 (J. G. 프레이저는 공중의 겨우살이가 잘라져 지상으로 내려진 것을 신성의 훼손으로 해석했습니다.) 발더의 목숨(=세계를 지탱하는 긍정원리)도 온전했고, 따라서 세계의 평화도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수의 심장인 겨우살이가 베어지자 세상은 폭력이 지배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끝내 우주적 대재난이 초래되고 말았던 거지요.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두려움에 떨었다.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아르보의 그림 中 부분. 1872년

 

 

 

[용어 설명]

 

• 오딘(Odin): '보탄(Wuotan)'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바람의 신.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던 티르를 몰아내고 북유럽 최고신의 지위를 획득한다. 지혜의 신이기도 하다. 전쟁터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결정하고, 마법에 능하다.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에서 늑대 펜리스에게 잡아먹힌다.

 

• 프리크(Frigg, ‘여자’, ‘아내’, ‘애인’이라는 뜻.) : 아제 신들의 어머니. 다산의 여신이며 결혼의 수호신이다. 오딘과 지상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가정에 행운을 가져다준다. 오딘과의 사이에 발더와 회두르를 낳았다. Friday(금요일)은 그녀의 이름에서 비롯된 요일명.

 

• 아제 신들(Asen, Aisir, '기둥‘이라는 뜻): 전투적인 신들의 일족. 중요한 아제 신들로 오딘, 토르, 발더, 프리크, 난나 등이 있다. 이둔 여신이 제공하는 사과를 먹고 젊음을 유지한다. 농부와 어부와 뱃사람들을 수호하며 풍요를 가져다주는 바네(Wanen) 신들과 싸운 다음 평화조약을 맺고 회니와 미미르를 볼모로 내준다.

 

 

• 발할(Walhal, ‘죽은 용사들의 집’이라는 뜻): 아스가르트에 있는 북유럽 최고신 오딘의 궁전. 벽이 황금으로 덮여 있다. 오딘의 명을 받은 발퀴레 여신들에 의해 전쟁터에서 죽은 영웅들이 모여들어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를 준비한다.

 

• 아스가르트(Asgard): 아제 신들이 사는 하늘의 영역. 인간들이 사는 중간계(미트가르트 Midgard)와 거인들의 세계인 요툰하임 위에 있다.

 

• 로키(Loki,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라는 뜻) : 불의 신. 몹시 변덕스럽고 이중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매, 암말, 연어로 변신이 가능하다. 지긴 여신이 아내. 거인 여인 앙그로보다(‘두려움을 만드는 여인’이라는 뜻)와의 사이에 거대한 늑대 펜리스, 세계바다에 머물며 인간들이 머무는 중간계를 한 바퀴 감싸고 꼬리를 제 입으로 물고 있는 미트가르트 뱀, 그리고 죽은 자들이 머무는 명부의 여신 헬(hel)을 자식으로 두었다. (헬은 유럽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지옥’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오늘날 ‘로켓’이란 말은 이 신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

 

• 토르(Thor, Donar, '천둥'이라는 뜻): 천둥과 폭풍과 풍요의 신. 농업을 수호하는 신. 인간의 삶을 힘들게 하는 사나운 거인에 맞서 인간을 보호하는 수호신이다. 강력하고 파괴적인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거인들을 제압하지만, 그 역시 자연의 힘이다. 토르의 망치 '묠니르'는 게르만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다.  

 

• 라그나뢰크(Ragnarökr): '신들의 황혼’이라고 번역된다.

 

 

※ 라그나뢰크와 영화 『반지의 제왕』

 

라그나뢰크를 알리는 세 가지 징조가 차례로 나타났다. 먼저 수탉 세 마리가 동시에 울기 시작하면서 온 세상이 그 소리를 들었다.  붉은 수탉은 우트가르트와 요툰하임에서 큰 소리로 울어 죽은 거인과 난장이들을 깨웠고, 두 번째 검은 수탉은 헬의 나라에서 죽은 자들과 저승 개 가름을 깨웠으며, 세 번째 황금벼슬을 가진 수탉은 아스가르트에서 발할의 전사들을 깨웠다. 이것이 첫 번째 징조다. 두 번째 징조는 전쟁과 타락의 연속으로 나타났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 서로를 배신하고 칼로 찌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탐욕과 거짓 맹세와 살인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된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세 번째 징조는 여름도 없이 삼 년 동안 계속된 겨울로 나타났다. 가장 길고 무시무시한 겨울이었다. 눈 폭풍이 계속되고 서리와 추위가 온 세상을 덮었다. 이러한 징조들이 지나간 후에 본격적인 라그나뢰크가 시작되었다. 

 

가장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해와 달이 늑대에게 잡혀버린 것이다. 구름이 피처럼 붉게 변하고, 산들이 흔들리고, 나무는 뿌리째 뽑혀나갔다. 유황가스가 갈라진 틈 사이에서 솟아오르고 사화산이 다시 불을 내뿜었다. 

 

대지가 깊은 어둠 속으로 잠기자 마침내 아스가르트의 파수꾼 하임달이 뿔나팔을 불어 온 세상에 라그나뢰크의 서막을 알린다. 이그드라실 아래로 신들의 회의가 소집되고, 형벌을 받던 로키와 늑대 펜리스가 속박에서 풀려난다. 땅이 뒤흔들린다. 미트가르트 뱀은 독을 내뿜고 해일을 일으킨다. 사방에 독이 넘쳐난다. 죽은 자들의 손톱과 발톱으로 만들어진 배 나글파리는 저승에서 적들을 실어오고, 저승 개 가름이 달려온다. 

 

그리고 해와 달이 늑대에게 완전히 먹혀버렸다. 별들도 궤도에서 떨어져 나와 헤매거나 바다 속으로 추락해버렸다. 말을 탄 불의 거인 주르트가 군대를 몰고 달려오는데, 그의 손에는 태양보다 밝게 타오르는 불칼이 번뜩이고 있다. 불의 나라 무스펠의 군대와 서리의 나라에서 온 거인들도 큰 군대를 형성하여 합류한다.

 

 

*. 북유럽신화가 이야기하는 이 최후의 전쟁 장면은  톨킨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반지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에서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 여기에 실린 3장의 그림은 『안인희의 북유럽신화』(웅진 지식하우스, 2009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출처 : 나무하나, 숲으로 가다
글쓴이 : 이 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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