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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
<군주론>은 500여 년 전 르네상스 후기,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 피렌체의 실무 외교관 마키아벨리가 쓴 자기소개용 팸플릿이다.
이 책이 21세기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재해석되는 이유는 바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 삶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고전이 드러하듯 <군주론>역시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기에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 '머리말' 중에서
●<군주론>의 진면목을 이해하자
마키아벨리는 백면서생 학자가 아니었다. 엄혹한 현실에서 약소국 피렌체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선 외교관의 경험으로 군주론의 뼈대를 세운 것이다.
군주론은 팸플릿 정도의 분량이지만 당시의 특정한 시대적 사건들을 언급하는 부분이 많고 구성이 산만하여 실제로 통독하면 이해되지 않는 대목들이 많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사고방식도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 케케묵은 유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바로 고전(古典)이다. 왜냐하면 시대가 아무리 변할지라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어>, <사기> 등이 끊임없이 재해석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공감대를 확장해 나간다.
보통 고전이라면, 읽기도 전에 좋은 인상을 갖고서 출발한다.
소위 지식인들이나 유명 인사들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책'이라는 홍보성 멘트가 수반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군주론>의 경우는 다르다. 읽기도 전에 비난부터 한다.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피아 철학' 정도로 폄하한다.
입으로는 정의와 진리를 내세우면서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한 이중적인 존재들에게는 <군주론>이야말로 통렬한 아픔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에게 정의롭고 공정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허례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16세기 유럽에서 절대권력을 누렸던 부패한 가톨릭교회는 불편한 진실이 담긴 <군주론>을 포함,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작물을 금서(禁書)목록으로 지정했다.
책은 <군주론> 원본의 순서에 따라 주요 내용을 발췌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저자 김경준은 현재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로 재직 중이며, <시사저널>에 '시대를 열어간 역사의 리더십'을 연재 중이고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과 잡지의 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를 포함, KBS1과 SBS CNBC 등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자국보다 선진국을 공략하는 법 자신들의 법에 따라 자유롭게 생활하던 국가를 점령했을 경우, 그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나라에 군주가 이주해 사는 것이며,
셋째는 그들에게 예전의 법에 따라 계속 살도록 허용하면서 공물을 바치게 하고 지속적으로 당신에게 우호적일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과두정치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피사사람이 문 앞에 와 있는 것보다 차라리 저승사자가 찾아오는 것이 반갑다"
이는 피렌체의 속담이다. 이들이 이처럼 피사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에게 피사의 사탑이라는 건축물로 익숙한 피사는 이탈리아 반도 북쪽 서지중해에 면한 인구 9만여 명의 소도시이다. 12~13세기엔 피사 공화국이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와 함께 이탈리아 4대 도시국가 중 한 곳이었다.
기울어져 있는 피사의 사탑
그런데, 당시 항구로부터 80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피렌체는 바다로 나가는 통로를 확보하는 게 필요했다. 이에 1406년 피렌체는 피사를 무력으로 점령해 속국으로 편입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자부심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피사인들을 통치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피사는 끊임없이 피렌체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마침내 1494년, 피사는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피렌체가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렸던 것이다.
이에 피사의 탈환이 당면과제가 되어버린 피렌체는 1499년 6월 용병대장 파울로 비텔리를 총사령관으로 고용 영입해 피사의 공략에 나서 함락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지만 효과는 커녕 출전한 용병들이 피사를 무자비하게 약탈함에 따라 피사인들의 피렌체에 대한 반감만 더욱 고조되는 불이익만 증대되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외부 용병의 무용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나라는 소규모라도 자체 군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확립했었다.
피사처럼 과거 선진국이었던 현재의 후진국을 다스리기는 어렵다.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좋은 제도와 가치, 자부심과 역사가 타인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하드파워'로 공략을 했다 하더라도 '소프트파워' 부분에서 도저히 공략이 불가능할 경우라면 차라리 '소멸시키라'고 주장한다.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뤘던 카르타고를 소멸시킨 것처럼 말이다.
●한번 적은 영원한 적이다
일개 시민에서 행운으로 군주가 된 자는, 쉽게 군주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자리를 유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쉽게 자리를 얻었기에 그 과정에서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 자리에 도달한 후 많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타인의 호의나 돈으로 국가를 얻었을 경우 발생하게 됩니다.
발렌티노 공작이라 불리는 체사레 보르자는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 덕에 지위를 얻었지만, 아버지가 죽자 그의 지위 역시 잃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발렌티노 공작(1475~1507년)은 바로 <군주론>의 모델이다.
1502년, 당시 33세의 젊은 외교관 마키아벨리는 27살의 신흥 실력자 발렌티노 공작을 첫 대면한 후 3년 동안 총 세 번을 만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발렌티노 공작은 에스파니아 출신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 (후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됨)과 애인 반노차 사이에서 출생했다.
작은 할아버지 알폰소 보르자(1378~1548년)가 1456년 교황 칼릭스투스 3세로 선출되면서 집안이 급부상했다.
체사레 보르자
체사레의 황금기는 짧았다. 1503년 교황이던 아버지가 말라리아로 사망, 우호적이던 후임 교황 비오 3세는 26일간의 짧은 재임 끝에 사망하자 이후 보르자 집안의 숙적이었던 산 피에르 애드 빈쿨라(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 율리우스 2세로 선출됨에 따라 집안은 급속도로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체사레는 탁월한 군주였다.
특히 허를 찌르는 전술, 기회를 잡았을 때 놓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단성, 우아하고 신비롭게 자신을 인식시키는 기술 등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병에 걸리는 바람에 절정기에 운명의 버림을 받았다.
특히 부친인 교황의 사망으로 맞은 권력공백에서, 체사레는 자신이 확보한 로마냐 지방을 기반으로 차기 교황 선출에 있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적대세력이 화해를 요청하자 이들에게서 교황이 배출되는 것에 동조하였고 결국 배신당하여 철저히 파멸하고 만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서
마키아벨리는 '한 번 해를 입힌 자들은절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전한다.
●무력은 때론 신성하다
개인이든 국가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면 다른 능력은 무의미하다.
높은 문화수준도 최고의 경제력도 적군의 말발굽아래 짓밟히면 그것으로 끝이다.
무력은 혼란기에 권력을 획득하게 하는 핵심요인이고, 평화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권력을 뒷받침하는 기본요소이기도 하다.
외교관으로서 마키아벨리는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의 공허함을 현장에서 절실히 느꼈기에 군주의 군사적 역량을 더욱 강조한다.
이는 16세기 초반 이탈리아가 질서재편의 혼란였기 때문이다. 15세기 후반 프랑스, 오스트리아, 에스파니아 등 강대국들은 절대 왕정체제를 수립하면서 내부정비를 끝내고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었고, 특히 부유한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에 관심이 높았다.
당시 이탈리아는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확국, 밀라노 공국의 5대 세력에 페라라 공국, 우르비노 공국, 만토바 후국, 시에나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 군소세력이 각자들의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세속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던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세 2세가 도시국가 간 역학관계를 이용해 강대국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정세는 더 혼미해지고 있었다.
신하와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라
신하들을 선임하는 것은 군주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군주의 안목에 따라 그들은 훌륭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군주의 지혜는 그 주위에 어떤 인물들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군주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군주가 저지른 최초의 실수가 바로 그들을 인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신하를 "예우하고 부유하게 하며 친절을 베풀고 명예와 관직을 주는" 등 실질적 혜택과 함께 "군주 없이 홀로 설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군주와 신하가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고 갈파했다.
1976년 젠센과 맥클링이 주인, 대리인 문제를 주장하기 450년 전에도 마키아벨리는 핵심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리인 이론
기업과 관련된 이해관계자들의 문제는 기업내의 계약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이론이다.
복수의 사람들이 정해진 범위 내에서 의사결정권을 대리인에게 의뢰할 경우 감시의 불완전성이나 정보의 불균형 등으로 인한 도덕적 위험, 무임승차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이를 극소화히기 위해 대리인비용이 수반된다.
●용기 있는 통찰이다
<군주론>의 핵심은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냉혹한 현실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고차원의 현실론이자 진정한 이상론이다.
수많은 고전들이 이상(理想)에 그치는 선언이 대부분이지만
참된 모습에 대한 용기 있는 통찰은 의외로 드물다.
냉혹하고 불편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면 군주론에는 공감할 수 있는 통찰로 넘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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