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의 눈은 요가 대수행자의 마지막 수행처인 아즈나 챠크라이며 선가(仙家)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상단전의 수행법’이다. 경혈상으로는 인당혈에 해당되는 것으로 모든 지혜와 통찰력이 여기에서 나온다. 나아가 부처님 지혜의 눈을 의미한다. 중국의 기공(氣功)에서는 제3의 눈에 대해 말하기를 이마 가운데의 염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정법과는 거리가 있다. 요가에서 명명하는 챠크라는 생명력의 근원지로 인체에는 7개의 차크라가 운용되고 있다고 한다. 챠크라는 경혈이론과 표현만 다를 뿐 그 위치가 거의 같다. 7곳의 챠크라는 장강혈·기해혈·중완혈·단중혈·인당혈·백회혈·뇌호혈 부근에 위치한다.
수행자의 맑음은 그 계제가 높아질수록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수행자의 생각이나 염원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결코 아니다. 맑음이 자연과 동화되면 차크라가 발달하여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인체의 3단전(하단전, 중단전,상단전)인 차크라에 꽃이 피는 신비한 현상을 경험할 수가 있다.
이들 중 이마 중앙의 아즈나 챠크라는 요기(요가의 스승)의 대수행자만이 개발될 수 있는 최고의 챠크라이다. 불가(佛家)에서 혜안, 법안, 불안으로 설명되는 것으로 계(戒)를 지켜 선정에 들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선가(仙家)에서도 이곳을 개혈하면 신선의 경지에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道)는 닦는 것이 아니라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다.‘라며 조사(祖師)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식이 아닌 지혜를 득해야 만이 진정한 불성의 발현이요 깨달음이라 했다. 그럼 지혜란 무엇인가? 지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삶의 방법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견해요, 선입관이며 한발 나아가서는 에고가 된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아상, 인상, 중생상, 숫자상‘을 버려야 만이 지혜를 얻어 깨달음에 이른다고 전한다. 지혜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는 안내자로 육신이 가지는 에고, 즉 모든 것을 버려야 만이 얻을 수 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 말을 바꾸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인위(人爲)가 개입되지 않은 그냥 그대로의 자연을 의미한다.
상단전의 중심혈인 백회나 인당혈의 개혈도 인위(人爲)가 아닌 무위법이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시중에서는 어이없는 엉터리 수행법이 난무하고 있다. 특히 백회나 인당혈을 의념과 자기최면으로 개혈하는 비법이 있다는 둥의 엉터리 소견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상단전의 경혈은 물론 인체의 경혈 중 어느 곳이나 그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개혈(開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수행의 탈을 쓴 자기최면술사가 되면서 접신이 되어 맹신자가 되기 쉽다. 물론 어떤 느낌이나 일시적인 감흥은 있을 수 있지만 의념이나 자기최면으로 경혈을 개혈하는 것은 접신(接神)에 의한 느낌임을 명심해야 한다.
대주천 수련의 완성은 곧 상단전의 개혈과 같은 시점에서 시작된다. 백회와 회음혈로 연결되는 기경팔맥의 충맥은 배꼽아래 하단전의 위치에서 온 몸이 단전화되는 경지에 들게 된다. 수행의 비법은 특별한 비기(秘記)가 전해 오는 것이 어떠한 인위도 개입되지 않은 무심의 정신통일뿐이다. 이것은 마치 동토의 겨울이 가면 생동하는 봄이 오듯이 자연의 흐름과 같다.
집중의 정신통일은 심신(心身)의 맑음을 선사하면서 자연의 파장인 기(氣)를 감지하고 증폭시킬 수 있다. 나아가 맑음의 고밀도는 기운의 상승세에 힘입어 온몸이 단전이 되는 대주천 수행자로 거듭난다. 깊은 침묵의 삼매는 그 다음 단계인 상단전의 혈들을 저절로 발달하게 한다. 수행자 본인의 의식과 관계없이 혹은 누구의 도움이나 인도 없이 마치 회귀본능의 연어처럼 저절로 상단전의 혈들을 두드린다.
초발심의 집중은 단전 부위의 기해혈이나 석문혈들을 개혈시키면서 점차 인체의 전,후면부에 소속된 모든 경혈들을 개혈시킨다. 그러나 상단전의 백회혈이나 인당혈은 수련이 일정이상 도달하지 않으면 전혀 움직임이 없다. 다시 말하면 상단전을 구성하는 혈들은 건물의 지붕과 같아서 모든 기초가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활동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제3의 눈은 통찰력과 지혜의 보고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계를 마치 맑은 시냇물의 바닥에 있는 자갈과 모래를 보듯이 훤히 볼 수 있는 맑음의 상징이다. 인당혈의 개혈은 대주천이 완성되는 어느 날 서서히 자연스럽게 맑음과 함께 나타난다. 동시에 신체는 애벌레가 탈바꿈하듯 천인합일의 환골탈태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간혹 이마의 인당혈이 열려 있는 이들이 있다. 졸저에 소개된 일화 중 무지한 고통을 호소하는 이가 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으로 빙의령의 침해를 받고 있는 현상이다. 마치 힘이 없는 아이의 손에 찬란한 보석이 쥐어진 것과 같아 쉬이 힘센 빙의령의 침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마구니의 표적물이 될 수 있다.
수행자는 무심을 목표로 힘써 꾸준히 나아가기만 할 뿐이다. 그렇지 않고 의념이나 자기최면으로 경혈을 개혈하듯 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에는 어떤 느낌으로 수련의 진척이 있다고 생각되겠지만 사실은 진척이 아닌 퇴보로 자칫 잘못하면 마구니의 농간에 놀아 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하지 말며 의지하지 말며 상을 짓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