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음악

[스크랩]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 중에서 ~ 김훈

황령산산지기 2015. 2. 18. 16:08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 中에서 / 김 훈 사랑은 형체가 없어, 정의할 수도 한데 가둘 수도 없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사랑이라 말하고, 언제부터 사랑이 시작됐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품어왔으나 여전히 홀연한 사랑,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 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바다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닿는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너머의 밀물과 썰물이 이 내륙 하천을 깊이 품어서 양안의 갯벌은 늘 젖어 있다. 밀물을 따라서 내륙으로 향하는 숭어 떼들이 수면 위로 치솟고 호기심 많은 바다의 새들이 거기까지 물을 따라 갯벌을 쑤신다. 그 작은 물줄기는 바다의 추억으로 젖어서 겨우 기신기신 흐른다. 보이지 않는 바다가 그 물줄기를 당겨서 데려가고 밀어서 채우는데, 물 빠진 갯벌은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와도 같이 젖어서 질척거린다. 저녁 썰물에 물고기들 바다도 돌아가고 어두워지는 숲으로 새들이 날아가면 빈약한 물줄기는 낮게 내려앉아 겨우 이어가는데. 먼 것들로부터의 기별은 젖은 뻘 속에서 질척거리면서 저녁의 빛으로 사윈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풍경에도 사랑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었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출처 : 시인의 파라다이스
글쓴이 : 울민들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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