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은 쉬운 것이다. 한 살이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스스로 깨닫겠다고 마음을 먹는 거다. 그러려면 일단 세상과 확실하게 각을 세워야 한다. 깨달음은 대칭을 쓴다. 세상의 맞은편에서 대칭시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관점의 획득이 깨달음이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선언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냥 보이는대로 본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깨달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겠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관점이라는 툴을 쓴다. 그 툴을 받아들여야 한다. 걸어서도 갈 수 있지만 오늘부터 폼나게 말을 타고 가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산 것을 죽이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극복해야 식당을 열 수 있다. 잡아온 미꾸라지를 죽이지 않으면 추어탕은 못 먹는다.
자신과의 약속을 하고 한계를 넘어선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경험을 말하면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의 방법을 쓰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 뻔하니 망설여졌다. 세상 사람들이 다 외눈박이라는건 납득하기 어려운 거다. 내 편이 필요하다.
석가나 혜능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 알아채니 용기가 생겼다. 한계를 넘어서기로 하고 넘어선다. 그것은 아기가 문지방을 넘어 마루로 나가볼까 고민하다가 마침내 그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만큼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한 번 그 문지방을 지나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이제부터 ‘천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관점이라는 연장’을 챙겨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깨달음에 단계는 없지만 단계를 정할 수도 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소승적 깨달음과 천하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승적 깨달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대승적 깨달음이 없이는 소승적 깨달음도 없다. 소승적 깨달음만 있고 대승적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사실은 조금 깨닫다 만 거다. 뭔가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더라.
그딴거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본인은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니 만족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거 누가 물어봤냐고? 안 물어본 대답 하는 사람은 스스로 사건의 원인측에 설 수 없는 자이며, 누가 문제를 가져오면 답이나 내는 사람이지 스스로 세상의 문제자가 될 수는 없는 위인이다. 전태일, 노무현, 김기덕, 권정생처럼 세상이 곤란해 하는 문제적 인간이 되어야 진짜다.
자기 내부에 에너지를 갖추어서 원하는 때 방아쇠를 격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다. 기승전결의 기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진짜다. 소설을 쓴다고 하면 자기 캐릭터를 얻은 사람은 소승적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 캐릭터가 단지 인물의 캐릭터에 불과하다면 아직은 멀었다. 공간의 캐릭터라야 진짜다. 소설을 쓴다는건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공간을 만나는 것이다.
이상한 사람을 얻으면 소승적 깨달음이고, 이상한 공간을 얻으면 대승적 깨달음이다. 대승은 토대가 되는 게임의 룰을 바꾸는 것이다. ‘여기는 고립된 섬이라서 이 바닥에서는 그런 식의 도시 룰이 통하지 않아.’ 하는 식이다. 이상한 공간의 획득에서 비로소 작품은 확장성, 보편성, 호환성을 얻어 무한복제가 된다. 큰 나무가 새로운 가지 하나를 일으킨 것과 같다.
스파게티 웨스턴에는 이상한 인물이 등장한다. 정통 서부극은 ‘정의의 사나이’가 악당을 죽이는데 스파게티 웨스턴은 일단 주인공이 악당이다. 이야기 공식이 비틀어져 있다. 서부에는 서부의 룰이 있어야 한다. 토대가 되는 게임의 룰을 ‘선과 악의 대결’에서 ‘고수와 하수의 대결’로 바꾼다. 개척시대 서부라는 공간이 일반의 룰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공간이라는 거다.
음악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패션이든 디자인이든 관점을 바꾸는 소승의 단계와 토대를 바꾸는 대승의 단계가 있다. 관점을 바꾸면 불행도 행복이 되고, 미움도 사랑이 되는데 이건 법륜이나 혜민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소승은 진짜가 아니다. 소승의 칼날을 함부로 휘두르면 사람이 다친다. 바꾸어야 할 룰을 제때 바꾸지 않으면 중요한 의사결정에 실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승적 깨달음은 깨달음의 맛을 살짝 본 것이다. 불행은 행복이 아니고, 미움은 사랑이 아니며, 일베충은 인간이 아니다. 진정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진짜다. 관점을 바꾸는 소승적 상대성의 깨달음은 과연 깨달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더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맛보기에 불과하다. 룰을 바꾸어 세상을 일으키는 대승적 절대성의 깨달음이 진짜다.
양현석이나 박진영이나 이수만과 같은 사람들은 음악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자기 캐릭터를 얻은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단지 인물 캐릭터를 얻었을 뿐 공간의 캐릭터를 얻은 사람은 아니다. 공간의 캐릭터를 얻으면 트렌드를 바꾸고, 유행을 바꾸고, 흐름을 바꾼다. 그것은 작심하고 의도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거기에는 대중들을 엿먹이려는 계산이 있다.
무리가 큰 길을 함께 가려면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가끔 지구를 흔들어서 정신 바짝 차리게 해줘야 한다. 가끔 대장이 새벽에 빵빠레를 울려 부대원을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시키는 것이 이유가 있다. 개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존재자임을 주지시키는 훈련이다. 정기적으로 룰을 바꾸고 토대를 바꿀 때 무리가 큰 길을 함께 가는 도중임을 알아챈다.
공유하는 토대를 흔들 수 있는 능력자들이 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배를 흔들어 우리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데 성공한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비법을 알아낸 사람은 겨우 캐릭터를 얻은 것이며, 맛에 대한 판단기준을 바꾸는 사람이 진짜다. 그래서 ‘허니버터칩 맛있다고 난리인데 사실은 그게 맛없는 것이야. 니들이 몰라서 그래.' 하고 우기는 자 있다.
맛에 대한 기준을 흔들지 못하면 미식가는 아니다. 음악에 대한 기준을 흔들지 못하면 음악가는 아니다. 그림에 대한 기준을 흔들지 못하면 화가는 아니다. 바라보는 눈높이를 교체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정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진보라고 한다. 그것은 동물이 숨을 쉬듯이, 자동차가 주유소를 들리듯이, 사람이 책을 읽듯이 반드시 해줘야 한다.
사건을 일으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2000년 전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이 오늘날의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2천년동안 사건은 줄기차게 이어진 것입니다. 천하에 들불을 일으키는 첫 번째 불씨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흔들어 놓겠다는 분명한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의도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그 세상의 몫입니다. 의도가 없는 깨달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대가 무엇을 보았든 느꼈든 알았든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