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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은 어떻게 오나

황령산산지기 2010. 9. 13. 10:14

패닉은 어떻게 오나?

 

 

(Pa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축과 수렵의 신이다. 상반신은 사람이지만 허리 아래와 뿔, 귀는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가축 무리나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소리를 낸다. 패닉(panic)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말이다. 패닉은 극한의 공포가 쓰나미처럼 덮쳐올 때 빠져드는 정신적 공황상태를 의미한다.

 

 

판의 괴성에 떠는 시장

2008년 10월 24일 글로벌 금융시장은 바로 그런 패닉에 빠져 있었다. 158년 전통을 자랑하던 미국의 거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진 직후 전세계 경제와 금융시스템이 한꺼번에 붕괴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공포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흔히 ‘공포지수(fear index)’로 불리는 VIX는 사상 최고수준으로 치솟았다. 1990년대 이후 줄곧 10~30대에서 오르내리던 이 지수는 갑자기 수직 상승해 24일 한 때 89.53까지 치솟았다. 판의 괴성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얼어붙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미국보다 앞서 열린 한국 증시에서 코스피는 하루 새 10%(110포인트) 넘게 떨어져 3년 4개월 만에 1000선 아래로 추락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오른 종목은 41개인데 비해 떨어진 종목은 842개였고 이 가운데 가격제한폭까지 곤두박질한 종목만 401개였다. 패닉 상태의 투자자들은 값을 따지지 않고 주식을 투매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새삼 주목 받고 있는 이른바 ‘위기학자(crisisologist)’들은 잡초처럼 되살아나는 금융위기의 뿌리를 추적하고 위기 때마다 나타나는 패닉의 순간을 집중 조명하는 이들이다. 하이먼 민스키(Hyman Minsky)는 투기적 낙관(speculative euphoria)과 무모한 차입투자에 따른 금융위기들을 조명했고,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는 광기 어린 투기와 지나친 신용 팽창이 금융시장의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었다.


에드워드 번-존스의 '판과 프시케'.
패닉은 그리스의 목신 '판'의 이름에서 유래된 말이다.

 

로버트 쉴러(Robert Shiller)는 증권과 부동산시장의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을 설명했고,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는 본질적으로 같은 금융위기가 8세기에 걸쳐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효율적 시장(efficient market)을 맹신하는 이데올로기가 위기를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금융위기를 탐사한 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시장은 매우 효율적이며 스스로 균형(equilibrium)을 찾아가는 강력한 자율조정 기능을 발휘한다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지나친 낙관과 투기의 광기로 자산시장의 거품이 한껏 끓어오르고 어느 순간 닥쳐오는 위기 때 모두가 패닉에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면 시장의 효율성과 시장 참여자들의 합리성(rationality)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금융위기의 역사를 뒤지고 사회학과 심리학의 통찰을 빌리고 겁에 질린 소떼의 질주를 연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패닉을 불러오는지, 패닉은 어떻게 전염되는지, 모두가 패닉에 빠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에는 아직도 마침표가 없다.

 

 

패닉의 순간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투기 광풍 때 가장 비싸게 팔렸던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패닉은 낙관과 행복감에 흠뻑 취해있던 이들이 갑자기 차가운 현실을 깨닫는 순간에 찾아온다. 금융위기의 역사를 정리한 킨들버거가 꼽은 10대 거품의 경우에도 한결같이 그랬다.

 

[그가 꼽은 10대 거품은 (1)1636년 네덜란드 튤립 거품, (2)1720년 영국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주식 거품, (3)같은 해 프랑스 미시시피회사(Mississippi Company) 주식 거품, (4)1927~1929년 미국 주식시장 거품, (5)1970년대 멕시코를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의 신용 거품, (6)1985~1989년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거품, (7)같은 시기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의 부동산과 주식 거품, (8)1992~1997 아시아 각국 부동산과 주식시장 거품, (9)1990~1993년 멕시코의 외국인투자 거품, (10)1995~2000년 미국 나스닥시장 주식(정보기술주) 거품이다. 킨들버거는 2003년 타계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거품도 당연히 이 리스트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갑자기 깨닫는 냉엄한 현실은 언제나 충격적이다. 튤립 한 뿌리의 값어치가 운하 옆 저택 한 채와 맞먹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갑자기 깨달았을 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믿었던 남해회사와 미시시피회사의 주식이 사실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을 때, 미국의 20분의 1밖에 안 되는 땅을 가진 일본의 부동산 가치가 미국의 2배에 이른다는 게 얼마나 이치에 안 맞는 것인지 분명히 느끼게 됐을 때 사람들은 패닉에 빠진다.

 

패닉에 빠진 이들의 심리가 어떤 상태일지 그려보려면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절규(The Scream)’에 나오는 사람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떠올리면 된다.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져 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라는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패닉의 순간 사람들의 행태는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탐욕이 공포로 바뀌는 순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투자자들의 행태는 출구를 향한 질주다. 출구가 닫히기 전에 1초라도 먼저 불이 난 경기장에서 도망치려는 군중들과 같다. 출구가 좁을수록 공포지수는 급격히 높아진다. 그럴수록 투자자들은 위험자산을 투매하고 안전자산으로 한꺼번에 몰리게 된다.


이는 마치 사자를 보고 공포에 질린 영양의 무리가 무작정 내달리고 보는 것과 같다. 사자를 보지 못했더라도 무리와 함께 달리고 봐야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달리고 있는 무리 사이에 공포는 급속히 전염된다. [영양 무리의 질주가 합리적인 행동인가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투자자들은 비이성적 과열 때와 마찬가지로 패닉의 순간에도 무리를 좇아가는 군집행동(herd behavior)을 보여준다.

 

 

공포를 가늠하는 지수

투자자들은 다른 투자자들이 겁에 질린 모습을 보고 더욱 공포를 느낀다. [시장에 참여하는 경제주체(agent)들이 가격을 통해 간접적으로 상호작용한다고 설명하는 전통적인 균형이론들과 달리 이들 주체들 간 직접적인 상호작용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에 초점을 맞춘 이론들을 에이전트(행위자) 중시 모형(agent-based model)이라고 일컫는다.] 시장이 패닉에 빠지면 눈 깜짝할 새 글로벌 시장이 함께 얼어붙는다. 따라서 늘 다른 투자자들의 심리를 읽고 다른 시장의 공포지수를 가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포지수란 무엇인가? 신문과 방송에서 흔히 공포지수라고 일컫는 VIX의 정식 명칭은 시카고옵션거래소 시장변동성지수(Chicago Board Options Exchange Market Volatility Index)다. 이는 S&P500 주가지수옵션의 내재변동성(implied volatility)을 측정하는 지표다. 다시 말해 앞으로 30일 동안 주가(S&P500지수)가 얼마나 큰 폭으로 널뛰기할 것인지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를 나타낸다.


시장의 널뛰기가 심할 것으로 기대되면, 다시 말해 변동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면 옵션의 값어치는 커지며[정글경제의 원리 여덟 번째 질문 참조], 옵션 가격과 함께 VIX도 높아진다. 공포지수 VIX가 높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시장이 주가 폭락을 예상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르는 쪽이든 떨어지는 쪽이든 주가가 매우 급격하게 변동할 것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하게 오르내리는 시장은 공포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VIX가 15%라면 현재의 옵션 가격으로 볼 때 앞으로 30일 동안 S&P500지수가 연율로 15% 변동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뜻이다. 연율 15%를 한 달 간 변동폭으로 환산하면 4.3%가 된다. (복잡한 수식은 딱 질색인 카푸친 씨는 굳이 알 필요 없는 것이지만, VIX 산출 방식에 따라 연율을 한 달치로 바꾸려면 15%를 12로 나누지 않고 제곱근(√)으로 나눠야 한다. 이 것 역시 카푸친 씨가 몰라도 되는 것이지만, VIX가 15%라는 말은 현재 S&P500 주가지수옵션 가격이 ‘앞으로 30일 동안 주가 변동이 (오르든 떨어지든) 4.3%에 이를 가능성이 68%(1표준편차 범위 내 확률)’라는 예상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는 의미다.)

 

 

가장 뒤쳐진 자가 악마에게 잡힌다

정글경제에서는 언제든 격변이 일어날 수 있다. 리스크를 과소평가하는 시장의 광기는 결국 거품 붕괴에 따른 위기를 부르게 된다. 패닉의 순간에 모두가 출구를 향해 달릴수록 출구는 더욱 좁아진다. 시장의 유동성(liquidity)이 일시에 얼어붙기 때문이다. 


카푸친 씨가 패닉의 순간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출구를 향해 질주하는(위험자산을 투매하고 안전자산으로 몰리는) 무리에 섞여 함께 내달리는 게 더 안전할까? 아니면 모든 패닉은 결국 지나가게 되므로 공포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냉정하게 기다리는 게 유리할까?


위기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먼저 빠져 나오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악마는 가장 뒤쳐진 자를 잡는다(The devil take the hindermost)’는 격언은 신속한 위기탈출을 권하는 말이다. 하지만 금세 지나가버릴 위기에 시장이 과잉반응을 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카푸친 씨가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선택은 아무런 옵션(option)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2010.9.13)

 

 

 

 
장경덕 /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