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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리르의 아이들

황령산산지기 2007. 2. 1. 11:22

리르의 아이들 Children of Lir (1914)
by 던컨 John Duncan
에든버러 시립 미술관, 에든버러


    핀눌라(Fionnuala)는 물개바위 위에서 사방의 바다를 둘러보며 밤이 새도록 동생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콘(Conn)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 푹 젖은 깃털에 머리를 힘없이 떨군 채였다. 핀눌라는 기뻐하며 그를 맞았다. 다음엔 피아흐라(Fiachra)가 역시 젖고 잔뜩 얼고 탈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추위와 고통에 시달렸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핀눌라는 자기 날개로 그를 감싸고는 말했다. “이제 에이(Aodh)만 온다면 정말 좋을텐데.”
    오래지 않아 에이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머리는 젖지 않았고 깃털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핀눌라는 기쁨에 넘쳐 그를 맞아 자신의 가슴 깃털로 품고, 오른쪽 날개로는 피아흐라를, 왼쪽 날개로는 콘을 감쌌다. 그녀는 이렇게 동생들 모두를 자신의 깃털로 덮어줄 수 있었다. “아! 내 동생들아,” 그녀가 말했다. “가혹한 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밤이 많을 거야.”
    - 그레고리 부인 (Lady Augusta Gregory (1852–1932) 作 “신과 전사들(Gods and Fighting Men, 1904)” 中 리르의 아이들의 운명


    아일랜드의 전설인 “리르의 아이들의 비운(Oidheadh Clainne Lir)”은 켈트 신화(Celtic Mythology)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계모의 저주로 백조가 되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우리가 잘 아는 안데르센 동화 “야생 백조” - 새왕비에 의해 백조로 변한 왕자들을 구하는 누이동생 공주의 이야기 - 와 닮은 데가 있죠. 하지만 그 동화와는 달리 “리르의 아이들의 비운”은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그렇다고 장렬한 비극이나 눈물이 펑펑 나오는 신파도 아니고요.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담담하면서 미묘한 슬픔이 감돌지요.

여성 드루이드 Druidess (1893) ▶
by 르동 Odilon Redon (1840-1916)
이안 우드너 가족 컬렉션, 뉴욕


    켈트 신화는 라틴족의 그리스/로마 신화나 게르만족의 북유럽 신화와는 다른 켈트족(The Celts)의 신화입니다. 켈트족은 독특한 철기 문화를 지녔고 기원전 한때 유럽 중심부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의 특성은 전투를 즐기는 동시에 소박하고 서정적인 시와 음악을 즐겼다는 것이죠. 또 하나의 특징은 드루이드(Druid)라는 지도자 계층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들은 사제이며 학자인 동시에 마법사였습니다. 켈트 신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아서왕 전설(Arthurian Legends)을 보면 마법사 멀린(Merlin)이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드루이드를 기원으로 한 것이죠.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유럽 남서부와 브리튼 섬에 살던 켈트족은 강력해진 로마에 정복당합니다. 또 유럽 북동부에 살던 켈트족은 게르만족에게 밀려나게 되었고요. 이때부터 켈트족은 점차 로마의 라틴 문화에 동화되고 고유의 언어와 신화, 풍속을 잃게 되었습니다. 즉 켈트족으로 분류될 만한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에요. 이렇게 켈트족은 유럽 대륙에서 거의 사라져버리게 되었고 브리튼 섬에서도 로마의 뒤를 이은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으로 구석인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 곳들과 아일랜드에서 켈트 문화의 명맥이 이어졌지요.

    하지만 이 곳들에서도 켈트 문화는 온전히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드루이드는 사라져갔고 그들이 문자 대신 구전으로 계승해온 켈트 신화와 지식체계도 함께 사라져갔으니까요. 그나마 다행히 몇몇 그리스도교 수도사들이 켈트 신화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교 숭배자로 몰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신을 인간 영웅으로 바꾸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적 교훈을 끼워 넣기도 했지만요... 하지만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병합하고 아일랜드를 잇달아 침공해 속국 상태로 만들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영어가 켈트어인 아일랜드어를 잠식하면서 아일랜드어로 전해지던 많은 켈트 설화들이 사장되었죠.

    가물가물하던 켈트 신화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게 된 것은 19세기 말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 (Irish Literary Renaissance) 이 일어나면서부터였습니다. 문학을 통해 아일랜드 고유의 정체성과 긍지를 찾고자 한 이 운동은 영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어요. 시인 예이츠(William B. Yeats 1865-1939)를 포함한 여러 문인들이 아일랜드어 수업을 부활시키고 묻혀있는 켈트 신화와 전설을 찾아내고 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시절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집필했고 일제 강점기에 여러 민족사학자들이 단군 신화를 재조명한 것처럼 말이죠.

◀ "리르의 아이들의 비운"을 주제로 한 아일랜드의 우표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의 지도자들 중에는 그레고리 부인(Gregory, lsabella Augusta, 1852-1932)이라는 극작가가 있었는데, 그녀는 켈트 신화를 충실하게 집대성해서 “신과 전사들"이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예이츠가 이 책의 서문을 썼죠. 지금 소개하는 "리르의 아이들의 비운"은 이 책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리르와 그의 아이들은 아일랜드의 신족인 투아하 데 다난(Tuatha de Danann)의 일원입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투아하 데 다난이 불로불사의 존재라고 나오지만 "리르의 아이들의 비운" 깉은 이야기에서는 죽기도 하고 늙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은 투아하 데 다난 신족은 유일신처럼 전지전능한 존재나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처럼 막강한 힘으로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어느 정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고 인간보다 아름다우며 훨씬 오랜 젊음과 수명을 누리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투아하 데 다난을 동양의 신선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리르의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바다의 신 리르는 투아하 데 다난의 왕인 보브 다리그(Bodb Dearg 붉은 털의 보브라는 뜻)의 양딸 이브(Aobh)을 아내로 맞았다. 그들 사이에서 딸 핀눌라, 아들 에이, 그리고 또 쌍둥이 아들 피아흐라와 콘이 태어났다. 이브는 이 쌍둥이를 낳다가 그만 숨을 거두었고. 리르는 비탄에 빠져 지내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보브는 또 하나의 양딸인 이파(Aoife)를 리르와 혼인시켰다.

    이파는 처음에는 죽은 언니의 자식들을 잘 돌보았다. 아이들은 투아하 데 다난의 보석 같은 존재로 자라났고, 특히 아버지 리르와 외할아버지 보브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자 이파는 점차 소외감과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고, 그 때문에 병상에 눕게까지 되었다. 1년 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녀의 마음은 증오로 가득차 있었다.


리르 왕 King Lir
by 스트로 Rita Stynes Strow
켄버스에 유채, 96 x 96 cm

    이파는 아이들을 해치기로 마음먹고 그들에게 보브 다리그를 보러 가자고 했다. 보브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로흐 다브라흐(Loch Dairbhreach)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이파는 그곳에서 멈춘 다음 아이들에게 목욕을 하라고 일렀다. 아이들이 호수로 들어가자 그녀는 드루이드 지팡이로 그들을 쳐서 모두 백조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이파는 아이들이 삶을 다할 때까지 구백년 동안 다시 본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저주를 내렸다. 삼백년 동안은 이 호수에서, 그 후 삼백년 동안은 스루 나 밀라(Sruth na Maoile)라는 북쪽 바다에서, 그리고 나머지 삼백년 동안은 이니스 돔난(Inis Domnann)이라는 섬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녀는 아이들에게 예전처럼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이파는 곧 호수를 떠나 보브 다리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왜 혼자 왔느냐는 질문에 리르가 아이들을 보내주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보브는 리르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그 말이 사실인지 물었고, 리르는 이파가 아이들을 해쳤으리라고 직감했다. 리르는 급히 보브에게 달려가다가 로흐 다브라흐에서 인간의 말을 하는 백조들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가간 그에게 백조들은 말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네 아이들이에요. 우리 친어머니의 동생이기도 한 아버지의 부인이 질투 때문에 우리를 파멸시켰어요.”

리르의 아이들 Children of Lir (1912) ▶
by 레이드 Stephen Reid

    리르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집에 데려가려 했으나 그들을 삼백년 동안 호수를 떠날 수 없게 매인 몸이었다. 아이들은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힘이 있어서 리르는 진정할 수 있었고 호숫가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보브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분노한 보브는 이파를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악령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후 리르와 보브 다리그는 자주 호수를 찾아가 백조로 변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들뿐 아니라 모든 투아하 데 다난 일족,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적인 게일족까지 백조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호수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삼백년이 흘렀고 이제 백조들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스루 나 밀라로 떠나야 했다.

    북쪽 바다 스루 나 밀라에서의 생활은 로흐 다브라흐에서의 생활과는 딴판이었다. 이 곳의 기후는 춥고 거칠었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폭풍이 밀려오는 날이면 리르의 아이들은 산더미 같은 파도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흠뻑 젖어 다시 모이곤 했다. 한겨울에는 주변의 물이 얼어버려서 그들의 발과 날개와 깃털까지 바위에 얼어붙어 버리곤 했다.

    하루는 리르와 보브 다리그가 보낸 기마대가 백조들의 안부를 물으러 먼 길을 찾아왔다. 리르의 아이들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 자신들의 처지를 서글픈 노래로 들려주었다. "지금 우리의 음식과 음료는 흰 모래와 쓴 바닷물이죠 - 예전엔 네 귀 달린 둥근 컵으로 개암 벌꿀술을 마셨는데. 지금 우리의 침대는 파도에 둘러싸인 맨 바위죠 - 예전엔 우리 침대에 새털 침구가 깔려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서리와 파도의 소음을 뚫고 헤엄치는 것이죠 - 예전엔 왕자들과 함께 앞장서서 보브의 언덕으로 말을 달렸는데."

    기마대가 돌아간 후 리르의 아이들은 여전히 고통과 싸우며 스루 나 밀라에서 보내야 하는 남은 기간을 채웠다. 그리고는 이니스 돔난으로 날아가 같은 식으로 삼백년을 보냈다. 마침내 구백년의 기간이 끝났다. 백조들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마음으로 리르의 집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리르의 집도, 보브 다리그의 집도, 그리고 어떤 투아하 데 다난 일족의 자취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수풀만 무성할 뿐이었다. 핀눌라는 탄식했다. "아, 음악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이 모여들던 이 집이 이렇게 적막한 곳이 된 것을 오늘 밤 보게 되다니." 리르의 아이들은 그날 밤 그곳에 머물며 밤새도록 그들의 추억과 그리움과 슬픔을 아름다운 노래로 불렀다.


리르의 아이들 Children of Lir (2000)
by 포터 Cheryll Kinsley Potter
캔버스에 유채, 60 x 84 inches

    다음날 리르의 아이들은 이니스 글뤼레라는 섬으로 떠났다. 그 섬은 온 나라의 새들이 모여드는 호수에 있었다. 그곳에서 백조들은 아일랜드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카톨릭 성인 모하이복(Mochoamhog)을 만나 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모하이복이 인간의 말을 하는 새들을 데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지역의 왕인 라그렌(Lairgren)이 그 새들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모하이복은 거절했고, 화가 난 왕은 백조들을 강제로 빼앗으러 왔다.

    그런데 왕이 백조들을 붙잡는 순간 그들의 깃털이 벗겨지고 그 자리에는 비쩍 마른 노인들 - 여자 하나와 남자 셋- 이 서있었다. 왕은 깜짝 놀라 도망쳤다. 이제 리르의 아이들에게 내린 저주가 풀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들의 삶이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늙은 여인의 모습이 된 핀눌라는 모하이복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세례를 주세요. 우리의 죽음이 멀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우리의 무덤을 만들어주세요. 콘을 내 오른쪽에, 피아흐라를 내 왼쪽에, 에이를 내 앞쪽에 묻어주세요." 모하이복은 그대로 했고 리르의 아이들의 영혼은 마침내 완전히 해방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 더블린에 있는 리르의 아이들의 조각
출처: http://www.carlmccolman.com/gallery3.html

    솔직히 이 이야기의 결말은 좀 허무합니다. 리르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저주를 풀지 못했습니다. 그저 저주의 기한이 끝날 때까지 인내했을 뿐이죠. 기한이 끝난 후에 예전에 행복한 삶으로 돌아간 것도 아닙니다. 저주의 기한은 그들이 노쇠해서 죽기 직전까지였으니까요. 게다가 이 켈트 신화의 마지막에 난데없이 그리스도교 성인이 나타나 세례를 주는 것은 또 뭐랍니까...저도 카톨릭 신자이지만 영 어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아일랜드 켈트 문화의 역사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요. 한때 “뿔피리 소리, 잔들, 환한 불빛 아래 술잔치, 젊은이들, 기사들이 넘치던” 리르의 집이 인적 없는 수풀로 변해버린 것처럼, 한때 번성했던 고대 켈트 신화와 종교도 결국엔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켈트 신화의 마지막 자취인 리르의 아이들은 새로 들어온 그리스도교 사상과 타협하고 공존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는 사라지거나 변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우수와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리르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능력은 이 아이들에게 내린 저주 중의 축복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노래는 가혹한 운명 중에서 나왔는데도 - 아니 그 운명이 승화되어 나온 것이기에 - 더 아름다웠고 듣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평화롭게 해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리르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아일랜드의 고난의 역사 중에 꽃핀 문학과 음악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Moon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http://blog.daum.net/isis177


    책은 이제 필름이 넘겨진 것으로 압니다. 그러면 아주 고오옫! 나오겠지요. 책 제목도 정해졌어요. "미술관 속 숨은 신화 찾기"로요. 이 제목으로 정해지기까지도 여러 논쟁과 의견 조율 과정이 있었답니다! ^^ 정말이지 이번에 깨달은 것인데 책 한 권 나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출판사는 안그라픽스이고, 책 디자인은 "스위스 디자인 여행"을 쓰신 박우혁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책이 나오면 커다랗게 사진 올리고 광고할게요. ^^
출처 : Moon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글쓴이 : Mo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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