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이 신라 선화공주의 아들이었다는 지적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온다.
흔히 신라의
왕위는 성골들만이 하게 되어 있었고, 그 성골 안에 박, 석, 김씨 세 성만 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볼 수 없는
여지가 있다.
신라를 건국한 것은 박혁거세 거서간이고, 박씨야말로 진정한 신라 왕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해 차차웅의 사위였던 석탈해가 신라의 4대왕이 되어 신라왕족에 편입 되었었고, 3세기 말에 가서야 돌연
김씨인 미추왕이 등장한다.
그 사유는 제12대왕인 침해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미추왕은 왕릉이 남아 있기는 해도
역사학자들은 미추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의 왕이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김씨들이 후대에 가서 자신들의 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가공의 왕을 끼워 놓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미추왕 역시 이전 왕의 사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재 신채호는
신라의 왕족들이 모계혈통으로도 이어질 수 있음과 사위가 되는 방식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음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우리 민족은 중국식의 부계제가 아니라 모계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시대의 서옥제 등이 그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고, 신라와
백제에 여왕이 있었다 는 것도 그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신채호는 백제를 건국한 초대왕은 사실은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인 졸본부여의
공주 소서노였다고 파악한다. 즉 백제를 건국한 것은 여왕 소서노였고, 그 후계자들 사이에서 분립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만 신채호도 탄식을 하였던 것처럼 우리 민족의 고대사는 인멸된 게 너무나 많다.
외침에 의한 것보다
오히려 우리 민족 내부에서 역사를 인멸한 예가 더 많을 것 이라고 말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김부식에 의한 역사왜곡과
은폐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기록 등을 통해 백제에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버금가는 정복왕 이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 왕의 이름은 동성대왕. 중국과 대만 등에 진출한 왕이다.
삼국사기에 탐라(또는 탐모라)라고 하는 곳으로 동성왕이
몸소 출전하려 하니 탐라가 스스로 다시 조공을 바쳐 왔다는 내용이 있다.
'그 나라(백제)에서 남쪽 바닷길로 석 달을 가면
담모라국이 있다.
이 나라는 남과 북쪽이 천 여리나 되고 동쪽과 서쪽이 수 백리나 된다.
그곳에는 사슴이 많은데
그들은 백제에 붙어 지냈다.' - (隋書 東夷傳 百濟)
즉 위의 수서의 기록에 정확히 일치하는 곳은 제주도가 아니라
대만이다.
남제서 등에 묘사된 북위와의 전쟁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동성대왕에 대해, 그 치세 때 천재지변이 있었다. 왕이 사냥을 좋아했다. 북위가 쳐들어 왔으나 막아냈다. 성품이 포악해서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딱 그렇게만 기록해 놓다.
사실상 일본문화를 형성시켜 준 백제의 왕인박사도 삼국사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우리는 왕인에 대해 일본의 역사기록을 통해서 알고 있고, 왕인은 일본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다.
만일 왕인이
신라계였다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유학자 왕인을 대서특필해 놓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야의 경우만 해도 여러 고증을 통해
최근에는 가야가 경상남도 지역에 국한되 었던 것이 아니라 경상북도 서부와 전라도의 삳당한 지역, 그리고 충청도 일부에까지 진출해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신채호가 이미 조선상고사에서 지적한 바 있는 사실이다.
중원경이 설치되는
충주에는 백제의 지원을 받는 가야의 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야가 쉽게 신라에 투항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세력이 백제의 지원하에
잔존하고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가 천재적인 직관력으로 갈파했던바 '역사란 我와 非我의
투쟁' 이라고 했는데, 비아로 몰린 자들의 역사는 이렇게 쉽게 함몰되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여성들의 역사도 포함된다.
김부식은 선덕여왕을 논하면서, '여자가 왕을 했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논평을 달아
놓았다).
백제의 무왕이 되는 서동(마동)이 무리해서까지 신라의 선화공주를 배필로 맞이한 저의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사랑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이제 확인이 거의 불가능해진 일이다.
신라의 김씨들(정통성없는
왕족들)이 모든 역사를 휘저어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배신의 묵계에 의한 은폐와 왜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성왕을 배신하고 처참하게 죽이고는 그 시신의 머리를 계단 아래에 묻어 놓아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밟고 다니게 한 진흥왕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했었던 것 같고 (배신자 신라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계속 밀고 내려오는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도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백제인들이 직접
국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신라 등으로 도망하는 유민이 많아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딸만 있었던 진평왕의 사위가 되면(선덕여왕이 될 딸은 그 당시 비구니가 되겠다고 출가한 상태였다는 설이
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할머니 뻘 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 그 조카인 김춘추가 이미
나이 서른이 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동은 신라의 왕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신라와 백제는 결혼을 통해 완벽한
동맹국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방해한 자들이 김춘추의 아버지(계부, 사실은 삼촌이라고도 한다)와 김춘추,
그리고 김유신이었다.
끝내는 오히려 백제를 멸망시키기까지 한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가 셋째딸로 나오고,
삼국사기에서는 아예 이름도 나오지 않는데, 그렇다면 첫째딸인 천명(둘째 또는 셋째라고도 한다)의 남편은 어떻게 되는 거냐에 대해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첫째딸인 천명의 아들인 김춘추는 성골이 아니라 진골이라고 했다.
그것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무언가 김춘추의 아버지, 즉 첫째딸인 천명의 남편에게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김춘추의 할아버지에게 용납
못할 하자가 있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첫째딸의 남편은 사위이면서도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그래서
둘째딸인 덕만이 왕위 물망에까지 오른 것이라고 봄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당시 덕만은 비구니가 되겠다고 출가한 상태였거나 또는
이미 할머니 나이 였었다.
아무튼 그 당시에 남편이 없었거나 있어도 왕노릇할 만하지 못했다고 본다.
따라서,
당연히 진평왕에게 다른 딸이 있다면 그 딸의 남편이 왕이 되어야 했던 것이고, 삼국유사의 기록이 맞다면, 그 왕위계승권이 있는 딸의 남편은
백제의 왕자 무왕이 되어야 마땅했다(신채호는 신채호 당시까지는 남아 있었다는 다른 사료도 참조했다는
것 같다).
의자왕은 백제의 왕위에 오를 때 상당한 고생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의자왕의 어머니가
배신자 신라의 공주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의자왕이 무리해 가면서까지 신라를 공격해야 했던 것은 자신이 백제계임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신라 자체가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일본의 정사라고
하는 '3대실록'에 보면, 850년경부터 수십 년 동안 일본이 신라의 침공을 우려해서(그 당시 신라는 망해 가는 중이었는데도) 초긴장
상태에 있었던 게 나온다.
그 무렵 일본 조정에서 신라와 내통한 역모사건도 있었다.
역사왜곡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당나라에 각국의 사신들이 갔을 때에 당나라 에서 신라를 첫번째에 세우자 일본사신이 항의해서(신라는 일본의 조공국이라고
주장했 다고 한다) 서로 위치를 바꾸었다는 게 있다(심지어는 중국의 정사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역사서에 그런 기록은 없다.
오히려 야만인들이 사는 일본은 관심 밖이었고, 신라에 대해서는 거의 최혜국으로
대우 했었다.
한반도까지 직할통치를 하려다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연합군에게 쫓겨났었으면 서도 당나라로서는 신라를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것은 발해, 즉 대진국의 발흥 때문이기도 했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신라가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는 것을 일본에서는 '조공'이라고 표현했다.
그러자 신라에서 온 사신이 고쳐 주기를 '이런 것은
조공이라고 하지 않고 재물을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일본 조정에서는 화를 내면서 재물을 반환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일본왕을 '천황'이라고 불러 주지를 않았다.
당연히 신라의 사신도 일본왕을 천황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일본조정에서는 신라 사신을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때부턴가 신라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풍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신라는 그 시대에 자신의 나라로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어차피 중원이 당에 의해 통일되면서, 그 동북방에 있는 세력들을 자신의 속국으로 하지 않는 한은
정복전쟁을 일으킬 상황이었다.
신라가 아니었다면 지금 한민족은 존재하지도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후진국이었고 약한 나라였던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해서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오히려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열등생이었지만, 점차 강해져서 가장 강하고 야무진 나라가 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당나라와
신라가 싸울 때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도 신라 편에 서서 같이 싸웠다.
비로소 동족의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에서는 신라와 접촉할 때 백제의 유민을 통역관으로 썼다고 한다.
고구려의
안장왕(문자명왕의 아들)은 상인의 복장을 하고 백제에 놀러왔다 백제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훗날 왕이 되었을 때 백제를 침공해 위기에 빠진
여인을(한씨녀 또는 한주 라고 하는데, 포악한 그 지방 태수에게 결혼을 강요당하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구해 마침내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삼국간에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고, 같은 종족이라는 관념이 이미 있었겠지만, 직접 다른
언어를 쓰고 풍속이 다른 자들이 한민족 전체를 유린하려 하자 모두가 힘을 합해 외세를 몰아내게 되었고, 비로소 그 때 완전한 민족의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역사와 무관하게 5백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김부식은 지나치게
자신의 혈통을 의식해(신라 경순왕의 직계후손이라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했다는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신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하며,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는 졸렬함을 보이고, 신라의 건국시기를 가장 앞에 놓아,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한
신라를 세운 6부는 조선의 遺民(한자를 유의해서 봐야 한다. 流民이 아니다. 즉 신라의 강역은 원래 조선의 영토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고, 군데군데서 고조선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앞선 역사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입각하여,'기록이 졸렬하므로' 인용할 수 없다면서, 고조선사를 정사에서 빼 버려, 두고두고 우리 민족에게 한이 남게
했다.
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위와 같은 역사적 추정을 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추정은
역사를 재음미하는 데 있어 유의미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