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신축 현장에서 확인된 신라우물과 그 안에서 발굴된 어린이 인골은 여러 궁금증을 증폭케 한다.
돌을 깨어 원형으로 쌓아 만든 이 우물에서 우선 이상한 점은 그 깊이가 무려 1 0.27m나 된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으나 아마도 한반도 고대 우물터 중 에 이처럼 깊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이 우물은 지름이 1m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입구쪽이 70㎝ 정도인데,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점 넓어져 중간부분에서는 1m20㎝ 가량으로 벌어진다. 그러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져 바닥 부분에서는 지름 1m 안팎이 된다.
따라서 이 우물은 공간이라고 해 봐야 사다리를 설치고 성인 한 사람이 겨우 오 르내릴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담당한 이한상 현 동양대 교수의 회상에 의하면 우물이 하도 깊은 데다 언제 무너져 내릴 지 몰라, 조사단원 중 누구도 선뜻 우물로 내려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더욱 이상한 대목은 출토 유물. 특히 7-8세 가량 되는 어린이 인골이 그렇다.
발굴 당시 우물은 전체가 거의 메워져 있었다. 맨 아래층에서도 그렇고 맨 위층 에서도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우물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 다가 신라 멸망 이전 어느 시점인가 폐기되고 매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물 아래쪽에는 서커먼 뻘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고 여기에서 인골을 포함 한 각종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어린이 인골은 지상에서 8m50㎝ 가량 되는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인골 일부분이 아니라 신체 거의 전 부분이 확인됐다. 인골은 뻘층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보존상 태가 완벽에 가까웠다.
인골 상태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어떤 아이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이곳 에 매몰, 혹은 그 시신이 폐기되었다는 결론은 부인할 수 없다.
한데 이 인골은 머리를 바닥으로 쳐박고 있었다. 두 다리는 그 위쪽 층위에서 확인되었으니 이 아이는 이 우물에 거꾸로 떨어져 그대로 파묻힌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아이는 어떻게 이곳에 묻히게 되었을까? 가능성은 두 가지 정도. 첫째, 우물 근처에서 놀다가 실족해서 추락사했을 수도 있고, 둘째, 누군가가 모종의 의식을 위해 고의로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사망시점이 언제일까? 인골을 감정한 동아대 김재현 교수는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고 일부 신체 부위 뼈가 부러져 있음을 근거로 우물에 추락하 면서 그 충격으로 즉사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여기서 더 궁금한 것은 추락사했다면 유가족 등이 그 시신을 꺼내어 다른 곳에 다가 장사지내 주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이런 "상식"을 깨뜨리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이 인골과 같은 층위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들이 증명한다. 인골 주위에서는 토기 여러 점이 가지런히, 그것도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토기를 집어던 져 버린 결과라면 대부분이 부서져 있어야 하고 뒤죽박죽으로 인골과 섞여 있어야 하지만 출토상황은 전혀 딴판이다.
나아가 토기 뿐만 아니라 황소 갈비뼈와 닭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 우물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대목은 아이 뼈가 출토된 바로 아래 뻘층에서는 나무 두레박 몇 점과 토기 10여 점이 가지런히 놓인 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갖가지 정황으로 보아 아이는 실족사한 것이라기 보다는 모종의 의식에 동 반되어 희생으로 바쳐졌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저 신라 성덕대왕 신종. 신이한 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 아이를 구릿물에 넣어 녹였다는 전설처럼, 혹은 해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그 스 스로 몸을 던진 심청처럼 신(神)을 위한 희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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