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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실록]의 [단군] 관련기록 - 세번째-

황령산산지기 2005. 7. 16. 12:24

[조선왕조실록]의 [단군] 관련기록 - 세번째-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근세조선은 고대 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임금들이 직접 고대 조선의 시조이신 단군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임금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시조 에 대하여도 제사를 올렸습니다.

아래글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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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5년]

단군(檀君)·기자(箕子) 이하 여러 왕의 능묘(陵墓)를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16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 이후 기성(箕聖)이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폈으므로,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영조 22년]

임금이 말하기를,
“단군(檀君)에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능을 매년 가을에 보수하게 하라.
향(香)을 내려주고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영조 41년]

예조 판서 심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의 위판(位版)의 흙으로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改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에 대하여 물으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성은 곧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이며,
역사에서 말하는 바 아사달산(阿斯達山)은 곧 지금의 구월산입니다.”
하고, 그 고사(故事)를 심히 상세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
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개국한 것이 을유년이었고, 지금 또 삼성묘의 일이 있으니,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명왕묘(東明王廟)의 제문(祭文)을 몸소 짓고, 향과 축문을 보내며,

삼성묘의 토판(土版)을 나무 독(?)으로 만들어 덮으라 하고는

독제(?制)를 몸소 그려서 그것을 덮도록 하였다.



[영조 44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도 단군사(檀君祠)·기자전(箕子殿)·삼국의 시조릉(始祖陵)이 있고,
고려에는 숭의전(崇義殿)이 있으니, 아름답고 거룩하다."




[정조 2년]


(서자 차별을 없애자는 집단 상소)

유생 황경헌(黃景憲) 등 3천 2백 72인이 상소하기를,

" ... 이것(서자 차별)은...단군(檀君)·기자(箕子)와 우리 나라 국초(國初 - 조선 초기)의 법도 아닙니다..."


[정조 5년]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고려(高麗) 시조(始祖)의 왕릉(王陵)들을 보수하는 절차에 대해 지시하였다.



[정조 7년]

단군묘(檀君廟)와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에게 제사하였다.



[정조 10년]

단군(檀君)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 관리인들을 두었다.
승지 서형수(徐瀅修)가 아뢰기를,
“단군은 우리 동방의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서...
단군은 동방에 있어서 사실 세상이 끝나도록 잊지 못할 은택이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을 극도로 갖추어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강동(江東)에 벼슬할 때에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레가 4백 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誌)》에 기록되어 있으니..."




[정조 13년]

삼성사(三聖祠)를 수리하고 제사 의식을 다시 정하였다.

삼성사는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제사하는 사당으로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있는데,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제사하였다.



[정조 16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사책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아 제천(祭天 - 하늘에 제사 지냄)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정조 19년]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묘이름을 숭렬전(崇烈殿)이라 하였다.

광주 판관(廣州判官)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에 백제 시조의 사당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이 없으니...현판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컨대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이나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숭령전(崇靈殿)이나
신라(新羅) 시조의 숭덕전(崇德殿)이나
고려(高麗) 시조의 숭의전(崇義殿)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껏 이름이 없다니...
숭렬전(崇烈殿) 이라는 칭호로...
현판을 거는 날에는 고울 수령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라.
제문(祭文- 제사때 읽는 글)은 내가 직접 짓겠다.”

하였다.



[정조 23년]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아뢰기를,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군자(君子)의 나라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니...

...유구(琉球 - 오키나와)에서  우리 조선에 조공을 바쳐 오고..."

출처 : ─┼★불가사의에 답이있다★┼─
글쓴이 : 생명의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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