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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발해 정효공주 비문

황령산산지기 2005. 7. 16. 12:20

 

[밝은 앞날 되시기를]

 

[역사는 미래를 위하여]

 

 

발해 정효공주 비문 입니다.

발해 황제의 연호를 썼고 (대흥)

 

정효공주의 아버지 즉 발해 3대 임금을  황상(皇上 = 황제) 이라고 비문에 새겼습니다.

 

(연호는 황제만이 쓰는 것. 

예를 들어 고구려 광개토 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광개토 대왕이 임금이 된 해가 영락 1년.)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어서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 라고 한 증거 중 하나입니다.

 







발해 정효공주 비문(묘지문) 발췌

 

 

-번역-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발해 3대 임금)의 네째딸이다.
조상과 부왕께서는 왕도을 일으켰으며,

그들이 쌓아놓은 위대한 업적과 무공은 그 누구도 비할 수 없다.
그 광명은 해와 달처럼 천하을 비추었으며,

그 어진 정치는 천하를 포용 하였다.
...

공주는 총명과 재질이 뛰어났으며,고결한 품성 이었다.
대흥 56년 여름 6월 9일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나이는36세였다.이에 시호를 정효공주라고 하였다.


황상(皇上 = 황제)은 몹시 비통해 하시며 ...

애석하도다! 공주와 이별하자니,이를 영원히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우고 비명을 새겨두노라!

(출처 : 발해사연구 DB  - 연변대학교 출판사 / 서울대학교 출판부)

 

 

 

고구려 안악3호분 부엌 그림

 

 



고구려 안악3호분 우물 그림

 



고구려 쌍영총 내부

 

고구려 쌍영총 행렬도

 

 

덕흥리 무덤벽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그려진 견우와 직녀(벽화 오른쪽)는

고구려 사람의 하늘 별자리에 대한 믿음을 엿보게 한다.

말을 타고 화살을 날려 호랑이를 잡는 모습(왼쪽)은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초상 같다.

평양=조용철 기자

 


덕흥리 고분의 행렬도

 

 

 

소수레 타고 납시오
북한 국보 유적 제156호인 덕흥리 벽화무덤은

인물 풍속도를 그린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다.

앞칸과 안칸의 사이 길 동벽 윗단을 수놓은 벽화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나들이 나선 무덤 주인과 남녀 시종을 묘사하고 있다.

색동 주름치마에 긴 저고리를 입고 마차 뒤를 따르는 여성들이 눈길을 끈다.

평양=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강서대묘 청룡

 


진파리 1호분 소나무 그림


진파리 1호분 - 연꽃 무늬 천장


 평양시 대현동에서 출토된 금상감장식의 철제 칼집과

자강도 고구려 유적에서 나온 쇠창.

1500년 세월을 건너고도 녹슬지 않은 창날이 고구려 사람의 기상을 전해준다.

 



 강서 태성리3호분에서 나온 금 장식들.

관에 매달려 찰랑거리며 빛났을 작고 날렵한 그 조각 속에서

고구려가 살아온다.



 

조선중앙역사박물관 고구려실에서 발견한 ‘손잡이 달린 단지’.

몸통 윗 부분에 사신(四神)이 새겨진 희귀한 토기다.

 

 

 

 

 



덕흥리 고분 벽화 행렬도 

 

 



덕흥리 고분 벽화 수렵도

 

 

신라 천마도

 

 



신라 그림 - 대방광불 화엄경 변상도

 

 

고구려인들 대부분 발해와 신라로 가다.


-펀-


당나라는 고구려인 20만을 포로로 데려갔다.

(나중에 발해 시조 대조영이 많은 수를 이끌고 탈출.)

고구려의 인구는?

삼국사기 보장왕 27년 기사에 "고구려는 69만여 호(집)" 라는 기록이 있다.

69만호를 1호(집)당 5인으로만 계산해도 약 350만으로 집계할 수 있다.

( 당시 가족수는 1호(집)당 5인 이상일 것으로 추정.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 인구는 350만 이상일 것으로 추정.)

350만이라 해도 20만은 적은 수이며

그 20만 중에서도 많은 수가 탈출하여 고구려 땅으로 돌아온 것이니

그리하여 발해의 국민이 된 것이니

당나라로 들어간 고구려인은 얼마 없다 할 것이다.


( 고구려의 정식 국호(나라이름)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 이다.

'고구려'는 별칭이다.

발해의 정식 국호(나라이름)도 발해가 아니라 고구려와 똑 같은 '고려'이다.

그러므로 기록에 보면 발해의 임금들은 '고려국왕 대무예' , ' 고려국왕 대흠무' 등으로 자신을 '고려국왕'으로 칭한다.

(나중에 발해는 나라이름을 고조선을 뜻하는 '대진' 으로 바꿈.
여기서의 '진' 은 고조선의 진한을 뜻함.)

즉 발해는 고구려의 부활을 뜻함.

훗날 태조 왕건의 '고려'도 '고구려의 부활'을 뜻함.



제1 고려 = 고구려 (정식 국호 고려)

제2 고려 = 발해 (정식 국호 고려)

제3 고려 = 고려 (정식 국호 고려)


이렇게 3번의 고려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구려인중에 당나라로 간 사람들은 아주 적고

신라로 간 사람들을 빼면 발해(후고구려)에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멸망 이후 많은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갔다는 것은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로 알려진 궁예.

"신라 왕족" 출신의 그가 내건 정치적 구호는 어처구니 없게도 "고구려(고려)"다.

(발해 멸망이후 고구려(발해) 인들이 신라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는 이야기.)

그가 도읍을 정한 곳 역시 고구려 유민들이 모인 철원 이다.

그 뿐인가.

견훤 역시 "신라 장군" 출신이다.

그런 그가 내세운 구호도 "백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은 옛 신라 땅의 울타리만 벗어나면 만나느니 고구려 유민이여 백제 유민 이었단 얘기다.

신라 패망의 요인은 실정(정치 실패)과 더불어 신라 인구 보다 훨씬 많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숫자가 신라 정치의 최대 불안요소였던 것이다.

궁예가 '고려'의 국호를 버리고 '태봉'으로 국호를 고쳐 부르자

고구려 광복을 꿈꾸던 고구려 유민들의 민심은 궁예를 떠나고

송악 출신의 왕건과 신숭겸 복지겸 등이 주축이 되어 나라를 세우니 '고려'다.

(송악도 고구려 유민이 많이 모인 곳 중의 하나.)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당시 신라 인구의 많은 수가 고구려 유민이었고

그러한 고구려 유민들의 염원이 '고려(고구려)'란 나라가 태동된 동기이며 결과란 의미다.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현재 한국 최대 성씨를 이루는 김(金)씨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신라는 갑자기 넘쳐 나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정치적 불안감을 느끼고

유화책(달래는 방법)으로 많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에게 김씨의 성을 하사하고 집과 토지를 나누어 주며

683년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했다 란 기록이 있다.

신문왕 3년의 일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밝은 앞날 되시기를]

출처 : 시너지 『Synergy』
글쓴이 : 청산에 살어리랐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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