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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정책"을 노태우 면전에서 비판하고 자진 사퇴한 육군 중장 '민병돈'

황령산산지기 2022. 7. 9. 16:39
"북방정책"을 노태우 면전에서 비판하고 자진 사퇴한 육군 중장 '민병돈' 

2022-07-09 https://cafe.daum.net/flyingdaese/Vfr0/11337












                                                     육사졸업식서 생긴 일

1989.03.23 

지난 21일 태능 교정에서 열린 육사 제45기 졸업식에서는 보통 보기 어려운 광경이 벌어졌다.

노태우 대통령 내외와 내빈·학부형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졸업식은 우수졸업생에 대한 시상, 졸업증서·임관증서 수여 때까지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파격」은 민병돈 교장(중장·육사15기)의 훈시차례 때 일어났다. 연단을 중심으로 왼쪽에 노태우 대통령내외, 오른쪽에 민교장 부부가 앉아 있었다.

훈시차례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선 민교장은 시상때 이상훈 국방장관·이종구 육참총장· 「메네트리」미8 군사령관이 노대통령에게 먼저 거수경례를 하고 시상자세를 취했던 것과는 달리 경례 없이 연단으로 나갔다.

민교장은 주머니에서 접혀진 자필 메모지를 꺼냈다. 그는 『존경하는 대통령각하를 모시고…』라는 인사말을 한마디 한 뒤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최근 민주화와 관련한 사회현상 「가치관의 혼란」「환상과 착각」「염려스러운 일들」 이라고 개탄하더니 이윽고 북방외교를 『적성국과 우방국의 개념을 혼동시키는 해괴한 일』 이라고 비판했다.

또 『누구는 손자병법을 들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책 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인이나 하는 소리이고, 군인은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은 물론부하의 생명까지 희생시킬 각오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민교장은 「무겁고 긴」훈시를 대통령의 치사보다 두배 가까이 길게(나중에 확인) 하더니 그냥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순간 단상엔 침묵과 긴장이 흘렀고 노대통령이 엄격한 목소리로 『교장, 경례를 받아야지』라고 채근했다.

민교장이 황급히 연단에 나가 연대장생도의 「교장에게 경례」구령을 받는 순간 연단쪽을 보기 어렵던 사회자로부터 『다음은 대통령의 치사가 있겠습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노대통령은 연단에 서면서 오른쪽에 앉아있는 민교장에게 뭔가 한마디를 했다. 대통령치사·분열식에 이어 식은 끝났다.


그러나 곧 민교장이 왜 대통령이 임석한 자리에서 그런 연설을 했는가, 연설내용은 그의 사견인가 군내분위기를 대변한 것인가, 대통령께 경례를 안한 것이 실수인가 아니면 변경된 의견절차에 따른 것인가 하는 얘기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오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18397#home

 


                                       노태우 대통령 북방정책을 면전에서 비판

2019.06.12 

노태우 대통령 앞에서 북방정책 비난

1989년 3월 21일 육사 제45기 졸업식. 민병돈 교장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경례도 하지 않은 채 식사(式辭)를 통해 노대통령의 북방정책 및 대북 유화 기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이며,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조차 흐려지기도 하며, 적성국과 우방국이 어느 나라인지도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매우 해괴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현직 육군 중장의 이 발언은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켰다. 민주화 추진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군부 강경세력의 집단 반발로 인식됐다.

민병돈은 신군부 핵심세력인 ‘하나회’ 출신의 육사 15기 대표 주자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인물. 강직하고 소신이 강한 무장(武將)이란 평과, 상관도 못 말리는 독선적 인물이란 평이 엇갈렸다. 결국 민 교장은 스스로 사의를 표한 뒤 군복을 벗었다.

몇 달 뒤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의외로 동네 아저씨 같이 순박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다. 그는 졸업식 당시 자기 행동에 대해 밝혔다. “대통령이 ‘북한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해 전방 군인들이 혼란에 빠졌다. 주적이 북한이 아니라면 왜 엄동설한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나는 이런 여론을 직접 전하고 싶었다."

군 주변에서 민병돈은 ‘민따로’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대세나 관행에 따르지 않고 ‘따로’ 행동함으로써 사서 고생한다는 뜻이다. 확실히 그의 군 생활을 보면 그런 소리를 들을 만 했다. 상명하복(上命下服)과 위계질서가 투철한 군대에서 그는 소신에 따른 ‘특이한’ 행동을 많이 했다.

1960년대 군에는 식량과 군용품을 빼돌려 팔아먹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초급장교 시절부터 그는 상관에게 이를 지적하고 항의했다. ‘상납’을 하지도받지도 않았다. 선거 때가 오면 공개적으로 여당 후보를 찍는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이라며 부대원들의 비밀투표를 독려했다.

부대원에 방탄복 입히고 실탄 사격훈련

민병돈은 전형적인 ‘FM(Field Manual·야전교범) 군인’이었다. 특전사 대대장 시절, 작전에 나가면 ‘폼나는’ 지휘관 텐트를 마다하고 허름한 사병 텐트 속에서 함께 뒹굴었다. 지휘관이 적에게 노출되면 안 된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킨 것이다.

훈련도 실전을 방불케 혹독하게 실시했다. 특전사령관 시절 88서울올림픽 테러에 대비, 즉응력(卽應力)을 기른다는 명분하에 부대원들 상호 간에 방탄복을 입히고 실탄 조준 사격을 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민따로’의 원칙주의는 1985년 2·12 총선 때 빛을 발한다. 당시 연금에서 풀려난 YS와 DJ 등 민주화 세력이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자 전두환 정권은 총력전으로 맞섰다. 그러나 수도권 20사단장으로 근무하던 민병돈 소장은 평소 소신대로 ‘부정 선거’를 거부했다. 군에서는 난리가 났다.

원래 20사단장은 수방사령관(중장)으로 영전하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그러나 민병돈은 준장 보직(육본 정보참모부차장)으로 좌천됐다.

                                     https://www.mindgil.com/news/articleView.html?idxno=68102 


                               민병돈 전 장군, “직언할 땐 모든 걸 버릴 각오로 해야지.”

2017.02.02 

“여전히 세상엔 쓴 소리하는 사람이 전무하다”

모두가 입을 닫았다. 나라 곳곳에 균열이 보였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도 모두 입을 닫고 있다. “모릅니다”, “기억 나지 않습니다”만 가득한 요즘이다.
 
직언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시대다. 국가의 수장이 비선의 물줄기에 휩쓸려 표류하는 동안 그 누구도 나서는 이 없었다. “부표 같이 살자”는 문장이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요즘 가장 절실한 건 직언할 줄 아는 용자다.
 
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

1989년 3월 21일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 이날 육군 제8대 특전사령관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었던 민병돈 전 장군(82)은 육군사관학교 제45기 졸업식에서 사고를 쳤다. 민 전 장군은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조차 흐려지고 있다. 적국과 우방국이 어느 나라인지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해괴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라며 노태우 정부의 상징이었던 북방정책과 대북 유화 기조를 10분 동안 비판했다. 군 관계자가 정부 정책의 방향을 비판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노 전 대통령 코앞이었다.
 
게다가 민병돈 전 장군은 연설을 마치고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 연설 전 단상에 오르면서도 경례를 하지 않았던 민 전 장군의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신은 내 상관이 아니다”라는 결정타를 날린 셈이었다. 사흘 뒤인 1989년 3월 25일 민병돈 전 장군은 보직 사퇴를 선언했다.
 
졸업식의 모든 행동은 민병돈 전 장군의 계산에 있었다. 계산에 없던 건 단 두 가지였다. 쑥쑥 자라는 중고생 아들 둘과 54세라는 자신의 나이였다. 군 출신의 전성 시대, 민 전 장군은 왜 폭탄을 던지고 가시밭길을 향했을까. 지난달 25일 서울 양천구 목동 민병돈 전 장군의 서재에서 28년 말하지 않았던 민 전 장군의 속내를 물었다. 
 
“옷 벗을 각오했지. 당연한 거 아냐?”
 
간단했다. “옷 벗을 각오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민병돈 전 장군은 “요즘 세상에 쓴 소리하는 사람이 전무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예나 지금이나 쓴 소리를 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 직업을 잃고 보복 당하는 건 매한가지다. 다만 그때 나라가 휘청댄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던 때였다. 그런 일을 벌인 뒤 운이 좋아서 옷을 벗지 않더라도 더 이상 진급이 불가능하리란 건 잘 알았다. 입 닫고 조금 더 버티느니 차라리 옷을 벗자고 각오했다.”
 
민병돈 전 장군은 당시 군 기강이 뿌리부터 흔들렸다고 했다. “북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책 방향 탓이었다. 그는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당시에 군대는 말단부터 상당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방에서 사병이 소대장에게 ‘북한은 우리의 적이 아닌데 추울 때는 동상 걸려가며 더울 때는 모기 뜯겨가며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나. 국군 최고 통수권자이자 최고 지휘관이 북한보고 적이 아니라는데 뭐 하러 우리가 총을 겨누나. 살살하고 우리 잠 좀 잡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그 작은 질문은 소대장에게서 중대장에게 전달됐고 중대장을 거쳐 대대장 앞까지 도착했다. 결국 군 수뇌부로 그 질문이 올라갔다. 책임질 일 안 하는 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군 수뇌부는 “육군사관학교에 똑똑한 교수 많잖아. 그 사람에게 물으면 되겠다”고 묘안을 냈다. 결국 칼자루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이던 민병돈 전 장군 앞에 놓였다.
 
“이걸 그냥 두면 군이 망할 것 같더라”
 
민병돈 전 장군은 이 사소한 질문 자체를 위기로 판단했다. 태도는 늘 분명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그였다.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모든 걸 떠안기로 결심했다. 그는 졸업식 날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은 전방에서 사병을 거느릴 소위가 탄생하는 자리다. 난 대통령이 있든 말든 꼭 말해야 했다. 그래서 ‘일부 정치인이 ‘북한은 우리 적 아니다’라고 하는 말은 정치적 발언일 뿐이다. 절대 믿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며 말 폭탄을 던졌다.
 
군 기강이 흐트러진 근본적인 이유도 고백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선에 앞서 하나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자신이 인기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세력이 필요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게 바로 좌익 운동권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은 ‘북한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리의 동반자’라고 말했는데 사실 자기 본심은 아니었다. 다만 좌익 운동권에 ‘날 너무 반대하지 말라. 날 공격하는 걸 자제해달라’는 뜻으로 꼬리 친 것”이라고 했다. 40년 가까이 주적이었던 대상이 하루 아침에 동반자가 되자 군 전체가 갸우뚱한 반응을 보인 셈이었다. 민병돈 전 장군은 모든 부작용의 시작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치적 모략으로 꼽았다.
 
“제대로 된 선배가 모범을 보여야 후배가 이를 모방하며 성장해 간다”
 
대한민국 국군 창군이래 장성이 제 발로 걸어나간 건 민병돈 전 장군이 처음이었다. 그가 용기를 낸 건 ’모범‘ 때문이었다. 민 전 장관은 “군대에서 후배나 하급자가 성장하는 건 교과서 보고 하는 게 아니다. 선배 보고 따라 하며 발전해 간다. 소위 모범을 보고 ’멋있다. 나도 이 다음에 저 계급이 되면 저렇게 해야지‘하는 ’선망적 동일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걸 보고 흉내 내며 인격적으로 닮아간다. 그러면서 고급 간부로 성장해 간다”며 “가장 믿었던 멘토가 하루 아침에 말을 바꾸거나 비겁하게 굴면 후배는 ’될 대로 돼라‘하며 실망하고 만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내가 고개 숙였거나 말을 바꿨으면 얼마나 실망했겠나. 후배가 ’저 놈도 별 수 없어‘라고 말하게 놔둘 순 없었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민병돈 전 장군에겐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장뿐만 아니라 교편도 잡았었다. 군대에서는 적어도 참모총장만큼 널리 알려졌던 사람이었다. 따르는 후배와 제자가 많았다. 모범을 보여야 할 위치였다. 과감하게 박차고 나가는 건 그가 평생 아껴온 신념이었다.
 
민병돈 전 장군은 전관예우도 거부했다. 그는 “후배가 날 인정하는 건 큰 게 아니다. 당시 군에서 막강했던 사람은 낙하산으로 사기업으로 가서 이사니 뭐니 달고 월급 받으며 일했다. 당당했던 군 시절을 잊고 젊은 사장에게 고개 숙이며 살았다. 후배가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참 아프다. 군대 꼴이 이게 뭐냐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옷 벗고 나간 사람의 현실이 후배에겐 자신의 미래인데 그 막강하던 사람이 대우나 삼성 들어가서 이병철과 이건희에게 머리 조아리는 걸 보면 어떻겠나. 기업체 대표가 군부대 위문할 때 수행한답시고 장성이었던 사람이 기업체 대표 앞에서 굽실거리는 장면을 보면 참 가슴을 칠 일”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난 그걸 잘 알았다. 그래서 현역 때 선언했다. ’난 제대해도 저런 직장 절대 안 간다‘고 했다. 그땐 정부에서 사기업체 취직뿐만 아니라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도 줬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부하 직원 시켜서 제의했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말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속된 제의에도 응하지 않았다. 민 전 장군은 “한 번은 노태우 전 대통령 측에서 ’번번히 거절하시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왔다. 그때 대답했다. ’난 이미 현역 때도 제대하면 직장 생활 안 한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주는 자리는 더 싫다. 다신 이런 걸로 전화하지 마라”며 단칼에 모든 예우를 거절했다.
 
“난 평범한 인간으로서 성공했다. 만족스러운 인생이었다.”
 
민병돈 전 장군은 대접 받는 일이 잦다. 타 지역을 가도 민 전 장군이 방문했단 소문이 퍼지면 얼굴도 모르는 후배가 슬쩍 와 인사하고 밥값도 몰래 내고 간단다. 그는 “다시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다. 내 얼굴도 모르는 새까만 후배, 내 부하의 부하, 제자의 제자도 내 얼굴은 모를지언정 내 이름은 다 안다. 나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며 “내 인생의 차원이 높고 고매한 건 아니지만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성공한 삶이다. 평범한 인간으로 난 만족한다”고 일렀다.
 
민 전 장군은 서랍에서 종이 여러 장을 꺼내 펼쳤다. 사람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 선물 내역이 적혀 있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추석이나 설 때 후배가 나에게 보내 명단이다. 난 이걸 다 적어둔다. 일일이 답례를 할 순 없지만 전화를 돌려 고맙다고 늘 이야기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선물은 팔도에서 몰려들었다. 그는 “난 늘 차별 없이 대했다. 경상도가 패권을 잡던 시절에도 난 전라도든 경상도든 누구든 영리하면 내 밑에 뒀다. 전라도 출신이 눈치보고 살던 때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부터 민병돈 전 장군은 “기자라는 직업이 소명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대우 받느냐’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가정을 갖게 되면 돈이 필요하다. 결혼해서 애를 낳고 살다 보면 가족이 아프기도 하고 건강하던 자기도 병이 나 치료비도 상당히 나올 수 있다. 돈이 부족하면 유혹이 생기는 법”이라며 “늘 어느 정도 쓸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살다 보면 곤란한 상황이 많다. 저축 꼭 하고 살아야 한다”고 기자에게 당부했다.
 
기자는 “계속 가족과 미래를 생각해 직장 생활 오래하라고 말하는데 당신은 왜 무모하게 그런 선택을 했냐”고 되물었다. 그는 그냥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