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아버지 아들 모범판사 2대

황령산산지기 2022. 6. 12. 11:06

아버지 아들 모범판사 2대

 

그 국회의원은 대통령을 괴롭히는 야당의 저격수였다.

그는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공격했다.

그 의원이 어느 날 저녁 한 식당에서 다른 사람과 식사중이었다.

 

그의 보좌관이 옆방에서 얘기를 엿듣고 있는 군인을 발견했다.

갑자기 군인이 권총을 꺼내들고 국회의원을 겨누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국회의원은 급히 몸을 일으켜 도망했다.

군인이 발포한 총성이 두 발 울렸다.

 

다급해진 국회의원은 모젤 권총을 꺼내 정체불명의 군인의 복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군인은 몸을 뒤틀며 쓰러져 죽었다.

 

황당한 소설 같지만 자유당 시절 비상계엄령하에서 발생했던 서민호 의원 살인사건내용이다.

서민호 의원은 군법회의에서 바로 살인죄로 기소되고 사형이 선고됐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의 뒤에서 총을 쏘았다는 판결 이유였다. 

 

대통령 저격수였던 그에 대한 권력의 제거 공작이었다.

계엄이 해제되고 그 사건은 법원으로 넘겨져 다시 심리가 됐다.

양회경 판사가 심리를 맡았다. 권력측은 중한 징역형을 주문했다.

양회경 판사는 그 국회의원이 정당방위임을 확신했다.

 

그가 무죄를 선고할 조짐을 보이자 압력이 수면위로 나타났다.

가족을 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전화와 편지가 왔다.

약점을 잡으려는 군 기관의 미행과 감시 그리고 은밀한 뒷조사가 따랐다.

 

양회경판사는 당시 변두리에 방 한칸을 빌려 네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

허름한 셋방에서 구두도 없이 고무신을 신고 전차로 출퇴근하는 그에게는 잡힐 약점이 없었다. 

법정 밖에서는 연일 권력이 만든 단체들이 관제 데모를 하고 있었다. 양회경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권력에 대해 사법부의 독립을 지킨 고전적인 사건이었다.

판사로서 사회의 십자가를 지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만 당시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판사들은 그 벼슬자리를 잃을까봐 몸을 움츠렸다.

 

더러는 야망때문에 권력에 영합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판사생활을 한 친한 고교 선배가 있다.

그는 자유당시절 서민호의원에게 무죄판결을 선고했던 양회경 판사의 아들이다.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2대의 삶 동안 법관을 하면서 본 시대는 어땠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군과 경찰을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했지.

그런데 그 실행과정이 세련되지 못하고 노골적인 물리력 행사로 결국 대통령에게 그 부담이 돌아가 정권이 소멸했지.

그래도 아버지 때 보면 차마 사법부를 직접 농락하지는 못한 것 같아. 박정희 대통령은 정보기관을 이용했지.

 

그 정권 후반으로 들어서면서는 권력 지향적인 일부 검사를 통치에 이용했지.

런 정치 검사들이 사법부를 폄하하고 대법관을 쫓아내기도 했어.

검사를 대법관으로 만들어 대법원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말이야.”

사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한 그는 타고난 판사였다. 사법부를 사랑했다.

법관인 아버지 못지않게 소신 있는 판결과 발언을 하는 올곧은 판사였다.

그는 법정에선 현대 정주영 회장의 재판장이었다. 그는 정회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재판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공작을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친구에게 제보했다.

그 인권변호사는 그 사실을 신문에 컬럼을 써서 세상에 알렸다.

 

정보기관이 인권변호사의 전화를 도청하는 과정에서 제보자가 담당 판사인 게 드러나기도 했었다.

그는 직접 정의를 위해 나서기도 했다.권력의 사법부유린을 글로 써서 정식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나의 시각으로 판사인 그는 법치주의 그 자체였다. 정의가 속에서 들끓는 판사였다.

나는 고교선배인 그를 존경하고 지금까지 친하게 지낸다.

판사였던 아버지의 정의와 고무신을 신고 양철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는 소박함에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그런 피가 아들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같은 아파트의 윗층에 살던 그의 집에 놀러갔을 때

구석에서 지직하고 잡음을 내던 흑백 텔레비젼을 본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공작에 의해 옷을 벗어야 했다.

“판사가 정치 사건을 맡았을 때 어떤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까?”

내가 물었다. 많은 판사들이 권력의 시녀였다. 사람들이 억울하게 징역을 살았고 죽기도 했다.

그런 선고를 내린 그들에게 뭘 했냐고 물을 때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전형적인 모범판사로 인식하고 있는 그 선배는 이렇게 대답했다.

“판사를 하면서 마음은 법치주의에 있는데 몸은 권력 아래 있는 시절이 있었어.

판사는 눈앞의 사건에서 도망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들어갈 입장도 아니지.

판사는 그런 운명적인 사건을 맡을 때가 있어.

정의를 위해 법을 공부한다고 했다면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게 아닐까?

 

거기서 물러난다면 그는 이미 판사가 아니지. 전 생애의 가치관이 결정되는 순간이지.

나는 자기 소신대로 하고 장렬히 전사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래야 세상이 늦게라도 바뀌어 가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칠십대 중반의 그 선배는 사법부의 보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보물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판사들이 곳곳에 있어야 세상이 바로될 것 같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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