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우답과 우문현답
마음이 불안하다.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안정되지 않은 마음을 어떻게 해야 진정시킬 수 있을까?
달마대사의 안심(安心)법문이 있다. 제자가 마음이 불안하다고 하자 그 마음을 가져와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불안한 마음은 아무리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었다.
찾는 과정에서 불안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가져올 수 없었다. 이를 이름하여 안심법문이라고 한다.
불안한 마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이는 존재론과 관련 있다.
부처님 제자 팍구나가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S12.12)
부처님은 질문이 적당하지 않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누가"라고 물은 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취합니까?"라고 물어본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의식의 자양분은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네 가지 자양분중의 하나이다.
대체로 분별망상으로 해석한다.
팍구나는 부처님에게 "누가 분별망상합니까?"라고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다.
선불교에서 선사들은 분별하면 망상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의식의 자양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의식의 식사라고도 한다.
의식의 자양분을 취하면 분별망상이 되어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누가 분별망상하는가? 당연히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도 분별망상하고 너도 분별망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틀렸다는 것이다. 왜 틀린 것일까?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분별망상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사람이 분별망상합니다."라고 말하면 우문우답이 된다. 잘못된 질문에 잘못된 답을 하는 것이다. 우문에는 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주는 영원합니까?"라는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무기했다.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우문에 답을 하면 우답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팍구나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S12.12)
이것은 우문에 현답에 가깝다. 왜 그런가? 연기법적으로 답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who)"라고 우문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how)"라고 현답한 것과 같다.
"누구"라고 말하면 존재론이 되어 버린다. 팍구나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런 질문은 "사람이 자양분을 취합니다."라며 존재론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문우답이다.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나, 너, 사람, 중생이라는 존재는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누구일까? 아무리 찾아도 나는 없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해서 오온으로 분해하여 분석적으로 설명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여러 개의 비방가숫따가 이를 말한다.
부처님이 오온과 십이처로 해체하여 분석적으로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란 존재는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결정적으로 십이연기로 분석해서 설명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내것이 아니다.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정신이 없다면 나무토막 같을 것이다. 그것은 죽었을 때나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존재의 몸은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일어난다. 나의 의지와 관련 없는 것이다. 또 몸은 병들고 늙어간다. 이 또한 나의 의지와 관련 없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몸은 나의 통제권 밖에 있다. 이런 몸을 내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물며 변덕이 죽끓듯 하는 마음은 어떠할까?
나의 통제권 밖에 있는 몸과 마음은 내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연기적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무아라고 한다.
조건발생하는 연기적 존재로서 나는 있지만 고정된 실체로서 나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사람도 있고 중생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념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부처님은 팍구나에게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든가,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식의 질문은 질문같지 않은 질문임을 말한다. 존재하지도 않은데 누가 분별망상 할 수 있단 말인가! 허깨비가 분별망상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손하게 배움을 청하는 자에게는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연기법적으로 답을 해 준 것이다. 질문이 잘못되었으니 먼저 연기법을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가 존재합니까?"처럼 존재론적으로 묻지 말고,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며 연기론적으로 물으라고 했다.
부처님은 "who(누구)"가 아니라 "how(어떻게)"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적 사유방식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S12.12)라며 연기법적으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깨달았을까? 여러가지 테스트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 증의 하나는 연기법적 사유에 대한 것이다. 연기법적으로 얘기한다면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나를 찾으려 한다면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본래 나는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오온으로 분해하고 십이처로 분석했다. 그리고 십이연기를 회전시켜 보았다. 그 어디에서도 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아이다.
마음이 편치 않다. 근심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나는 왜 꽉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대신 집착이 있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는 것이다. 업으로서 존재를 말한다.
나는 분명히 있다. 그런 나는 연기적 존재로서 나이다. 업으로서의 존재이다. 그래서 업생이 된다. 지금 마음이 불안한 것은 업에 따른 것이다.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제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연기적 사유로 가능할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먼저 부처님은 양극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두 가지 케이스를 말한다. 첫번째 케이스를 보면 다음과 같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행위자와 향수자가 같은 케이스에 해당된다. 이는 고정불변하는 자아가 있음을 말한다. 이럴경우 "내탓"이 될 것이다. 괴로움이 발생할 경우 자책할 것이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영원주의자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두번째 케이스는 정반대가 된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행위자와 향수자가 다른 케이스에 해당된다. 자아를 가진 자가 행위 따로 향수 따로인 것이다. 이는 대단히 무책임한 것이다. 행위를 하고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잘못되면 "남탓"으로 돌린다.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미니스커트를 입었기 때문에 성추행했다고 남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죽으면 끝이라고 보는 허무주의자에게서 볼 수 있다.
괴로움은 내탓도 아니고 남탓도 아니다. 일어날만 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했다. 이는 청정도론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 그것만이 올바른 봄이다.”(Vism.19.20)
게송에서는 행위자도 없고 향수자도 없다고 했다. 이는 행위자와 향수자가 같다고 보는 영원주의와 행위자와 향수자가 같지 않다고 보는 허무주의와 다른 것이다. 왜 그럴까?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행위자도 향수자도 없어서 무아인 것이다. 다만 조건 발생하는 법들만 일어날 뿐이다.
내탓이라고 말하는 영원주의와 남탓이라고 말하는 허무주의는 양극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싸빠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 (S12.17)라며 십이연기를 설한 것이다.
여기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있다. 근심걱정으로 애가 타는 사람이다. 그는 스승을 찾아 가서 안심시켜 달라고 했다. 그러자 스승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와 보라고 했다. 그는 마음을 가져올 수 있을까? 본래 없는 것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은 일어날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조건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그 마음이 있는 것처럼 떠나지 않는 것은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집착하면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업으로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새로운 태어남이다. 그런데 태어남은 궁극적으로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의 마지막 구절은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로 끝난다. 이는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의 뜻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불안한 마음, 근심걱정도 집착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은 누구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우문이다. 이에 "내가 괴롭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답이다.
우문에는 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질문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기(無記)했다. 그러나 배우고자 묻는 사람에게는 친절했다. "누가(who)"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how)"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아가 있다는 존재론적 사유가 아니라 조건발생하는 연기론적 사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문에 대한 현답이 될 것이다.
연기론적 사유를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해보면 고정된 자아가 없음을 알게 된다. 조건발생하는 십이연기 고리에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무아이기 때문에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십이연기법문이야말로 안심(安心)법문 아닐까?
20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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