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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의 사후세계 (자살하면 안되는 이유)

황령산산지기 2021. 11. 7. 07:18

책 [나, 인간의 꿈을 꾸는 하느님] 中 에서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럼 자살한 영혼들이 맞이하는 사후의 여정은 어떻습니까?

 

영혼과 육체라는 인간의 기본구조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초래하는 가장 어리석은 비극이 바로 자살이다.

삶이 괴로울 때, 사람들은 흔히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 죽으면 그만이다는 생각들을 한다.

그리하여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을 기다리는 건 모든 것이 사라진 아무것도 없는 공空의 세계가 아닌,

어둡고 캄캄한 암흑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들이 있는 곳은 캄캄한 암흑인가요?

 

 

자살을 감행했던 그들이 표면적으로 원했던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였지만,

그들은 결코 현실로부터 떠나오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현실로부터 숨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심리가 주변 환경을 그렇게 깜깜한 암흑으로 창조해놓는 것이다.

 

 

 

자살로 인한 육체적인 죽음으로 해결되는 것은 오직 피상적인 현실일 뿐,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폐쇄된 관념이 펼쳐내는 환상으로 인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자살자의 사후세계는 살아생전의 자살해야 했던 상황이나 피치 못할 사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자살자가 겪는 사후세계의 경험은 거의 비슷하다.

 

 

 

이유를 막론하고 자신의 마음을 외부로부터 단절시키고,

폐쇄된 자기 사고에 갇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자신의 숭고한 경험과 성장을 포기한 이기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한동안 진화 여정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자살의 경험 속에 갇히게 된다.

 

 

 

자살자들 대부분은 죽고 나서도 자신의 의식이 회복되는 것이 두려워, 그 세계에서도 계속해서 자살을 되풀이하곤 한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은 계속해서 뛰어내리고, 차에 뛰어든 사람은 계속해서 차에 뛰어들고,

약은 먹은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도 계속 약을 먹어댄다.

 

 

 

그나마 육신이 있을 땐, 생각 속에 빠져있을지라도,

생각보다 농밀하고 구체적인 현실에 의해 다른 생각으로 전환한다든지,

상대방의 설득과 조언에 힘입어 자신의 고립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자살자의 세계는 외부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함으로

자기 생각의 영향력으로부터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되기에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갈 곳 없는 영혼이 떠돈다는 구천(九泉)은 이러한 영적인 자폐증 환자들의 세계이다.

 

 

자살은 문제의 해결이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진정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들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어떠한 형태로든 구속하려고 하는 생각과 감정의 허상과 그 실체를 깨달아,

 

 

 

하루빨리 이러한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자신의 관념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그들은 죽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사라지면 된다.

내가 죽으면 그만이다.

내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러나 진실은,

 

바로 그런 생각들을 사라지게 하고

그런 생각들을 죽이면 되고

그런 생각들을 없어지게 하면 되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죽음에 의지할 것 없이,

능동적인 내 자유의지로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하는 내 생각들을 사라지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체의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육체의 죽음이 생각의 죽음, 감정의 죽음, 느낌의 죽음, 곧 모든 것의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생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나의 육신은 가만히 있어도, 나의 생각은 끊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나의 육신은 편안했어도, 나의 생각은 늘 나를 괴롭혔었다.

나의 육신은 원하지 않았어도, 나의 생각은 늘 나를 끌고 다녔다

나의 육신은 잠을 잤어도, 나의 생각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육신과 나의 생각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니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생각까지 죽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간단한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육신을 버렸어도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생각마저 버릴 수는 없었다.

 

 

 

너희에게 죽음은 없다.

너희에게 끝은 없다.

너희가 믿을 것은 너희 자신밖에 없다.

너희가 기댈 곳은 너희 자신밖에 없다.

그러니 너희를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는 너희 자신밖에 없다.

 

그럼 지진이나 해일 같은 천재지변이나 사고로 죽는 사람들의 사후의 여정은 어떻습니까?

 

지진이나 해일, 전쟁과 같은 대참사의 현장에서 맥없이 사라져가는 수많은 희생자를 보면,

한낱 풀 한 포기와 같은 인간의 현실이 허무하고 덧없이 느껴지겠지만,

인생은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음은 모든 이에게 가장 황당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한순간에 사고로 죽는 것이나 병상에서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자기의 육신은 물론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로부터 이별을 고해야만 하는 죽음이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내가 단 하루를 산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굳건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나 평범하게 죽은 사람들이나 사후의 여정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진 않다. 천재지변이나 사고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을 때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는,

죽은 자들의 집단의식 각성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집단의식 각성이란 희생자들 간에 서로 의식의 공유가 일어난다는 것인데,

이렇게 죽은 자들 간에 의식의 공유가 일어나게 되면

저승으로 가는 도중에 혼수상태였던 죽은 영혼의 의식이 깨어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후에 영혼이 저승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죽음에 이르게 된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영혼이 저승으로 운반되어

차후에 저승에서 의식이 차츰 들어오는 식이다.

 

 

 

하지만 집단의식 각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의식이 들어온 사후의 영혼은

각성된 유체이탈의 상태처럼 자신의 주검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죽음이 일어났던 참혹한 현장과 자신의 처참한 시신을 보게 되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울부짖음, 비통한 절규가 그들에게도 전해져 이러한 감정들을 산 사람과 똑같이 느끼게 된다.

 

 

 

이런 일시적인 집단각성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죽는 순간 찾아온 두려움과 공포의 상념들, 불안한 마음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려는 군중심리를 유발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결속된 다수의 의식으로 인해 죽은 자들의 의식이 하나둘씩 깨어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한마디로 충분히 잠들지 못하고 선잠을 깨는 아기들과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렇게 깨어난 영혼들은 객관적인 상황파악을 하나둘씩 하기 시작한다.

살아있을 때도 여러 사람이 모이면 의식의 공유로 혼자 있을 때보다 쉽게 상황파악을 하게 되듯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죽은 자들의 사후인식이 거기에만 멈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세계를 떠났고 다시는 이 세계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인식에만 고정되어,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욱 극심한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신이 천재지변으로 죽었다는 사실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심한 상실감과 자괴감을 느끼는 등

극단적인 자살자와 비슷한 심리상태를 보이며, 다른 영혼들에까지 이 같은 피해심리를 자극한다.

그리하여 비통하고 슬프게 울부짖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심하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영혼들, 자신은 절대로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우기는 영혼들,

가족들과 헤어져서는 못 산다는 영혼들, 자신은 이제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고 절규하는 영혼들…….

이렇게 수없이 생겨나는 한 많은 영혼은 사실 영적 차원의 인류사에서 큰 문제이다.

 

 

 

이러한 막무가내의 영혼들이 거주하는 곳은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너희가 흔히 구천을 떠돈다고 말하는 소위 중음계中陰界란 곳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자기의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해서 방황을 거듭하게 되는데,

때에 따라선 이승의 시간으로 거의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는 영혼도 있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의식의 성장단계를 거치지 못하고 한참을 지체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까지라고 하셨는데, 그럼 어떻게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게 됩니까?

 

 

앞서도 얘기했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죽는 순간의 무의식 상태에서 영혼이 저승으로 운반되어 천천히 깨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충분한 휴식과 관조의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충분한 휴식과 관조의 과정을 거친 영혼은 다시 새로운 육체의 경험을 위해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영혼은 저승에서조차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깨어나지 않는 꿈을 꾸듯 일종의 무의식 상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는 사후세계에는 그들의 영혼을 돌봐주는 일종의 보모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만큼 인류 대부분의 영적 수준은 아직도 유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보모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보살펴주는 그런 개념의 보모들은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막무가내로 자기 죽음을 부정하는 고집불통의 영혼들에는 속수무책이다.

 

고집불통의 영혼들은 어떤 영혼들입니까?

 

너희가 소위 ‘속물’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고집불통의 영혼들이지.

살아있을 때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구와 욕망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았던 영혼들 말이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당연히 사후에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유아기 단계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지.

 

유아기의 영혼이라 하니 Jose Stevens와 Simon Warick-Smith가 말한 소울에이지가 생각나는군요.

영혼의 성장단계를 인펀트 소울Infant soul, 베이비 소울Baby soul, 영 소울Young soul, 머추어 소울Mature soul,

올드 소울Old soul 등으로 분류하여 단계별 인간의 특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유익한 내용이라 너희도 그의 글을 꼭 찾아서 읽어보길 권한다.

그 이유는, 그 글이 주는 지식적인 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글을 통해 내 의식의 현주소를 언뜻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글의 내용이 확정적인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혼의 성숙도를 몇 단계로 분류했다 해도 현재의 나는 그 모든 과거 여정의 나를 포함하고 있기에

과거의 성향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고 다만 그 성향의 비중에 차이가 나는 것일 뿐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올드 소울이라고 해도 영 소울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영 소울이라고 해도 올드 소울의 가능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여기에는 다양한 경험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군요. 사후세계와 관련하여 더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성경에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이 있다.

결국, 이승이나 저승의 세계나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너희는 사후의 세계에서도 지금 너희의 성향대로 살게 된다.

 

 

 

육신이 없기에 그곳에서 각각의 영혼은 육신의 삶을 통해 맺힌 스트레스를 각자 자기 나름대로 푼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아름답게 해소하는 영혼도 있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면서 해소하는 영혼도 있는 등 각양각색이다.

 

 

 

너희가 말하는 지옥이란, 그 영혼의 어두운 상념이 펼쳐내는 자신만의 세계이다.

결국, 어둠도 빛을 거부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의해 창조된다.

 

 

 

그래서 지옥도 그에겐 나름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후세계에 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에게 맞는 천국으로 가는 것이니 상대적인 관점에서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없다.

그리고 사후세계에 오래 머물다 보면 권태로움이 생기는데,

그때 너희는 현실세계를 다시 경험해 보겠다는 대단한 결심을 하고 또 세상에 나온다.

 

그게 왜 대단한 결심이죠?

 

사후세계는 카르마가 존재하지 않기에 스트레스가 풀리는 세계이다.

그러나 육신의 세계는 개별적 자아의 자유의지가 서로 어우러지는 곳이기에 카르마가 존재한다.

그래서 이 세계에 다시 오기 위해서는 이전 생의 카르마를 모두 짊어지고 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네가 어떤 마을에서 살다가 죄를 짓고 도망을 갔는데 만약 그 마을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그 마을에서의 죄의 책임을 다시 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대단한 결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후의 관점에서 육체를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매우 힘든 결정이다.

그래서 너희는 대단한 각오를 하고 다시 태어난다.

이번 생에서는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큰 결심을 하고 태어난다.

 

 

 

그러나 너희는 막상 태어나서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다시 세속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간다.

그리고 죽고 나서는 또 생전의 사랑을 못 이룬 것에 대한 회한,

부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들에 대해 한참 스트레스를 푼다.

 

 

 

그리고는 다시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어지고 다시 대단한 각오로

‘이번에는 깨달아야지!’, ‘이번에는 이렇게 살아야지!’ 하면서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한다.

너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이런 식으로 너희의 의식은 영속한다.

 

 

 

그러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의 의식을 혼수상태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바로 지금, 이 세계에 있을 때 양쪽 세계를 모두 다 알아야 한다.

 

 

 

이 세계도 깨우치고 그쪽 세계도 깨우쳐서 더 이상 현상에 휩쓸리지 않는 그런 자각(自覺)을 얻어야 한다.

 

 

 

삶이 꿈이어서 허무하다는 것은 니체식의 절대적 허무가 아니라,

그 허무조차도 만들어내는 공空의 세계가 바로 너희의 본래 세계임을 알아야 한다.

 

 

 

차후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너희는 허무한 존재가 아니다.

너희는 그 허무조차도 선택하고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대자유, 위대한 창조성 그 자체이다.

 

 

 

 

책 [나, 인간의 꿈을 꾸는 하느님] 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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