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영혼의 나침반 (사티시 쿠마르)

황령산산지기 2020. 10. 24. 16:53

파라다이스

 

<책 속의 글들>

 

궁극적으로는 초월적인 상태가 존재한다. 존재의 깊은 중심에는 어떠한 분리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엔...모든 이원성을 넘어서 세상과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식이 사라지고 완전히 자아가 실현된 상태이다.

즉,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우리는 만물 속에 깃든 세 가지를 깨닫고 있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균형 감각을 발휘하여 이러한 세 속성을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 올바르고 적절한 선택을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를 넘어서야 한다.

 

그럴 때 기쁨이 넘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경제적,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 진보로 간주되는 많은 것이 토양, 공기와 물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기업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환경 파괴를 막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아유르베다에서 건강은 두 가지 상호 연관된 측면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건전한 마음이 건강한 육체의 선행 조건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전한 사회와 환경이 개인 건강의 기본적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사트바적 인간에게는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며, 내쉬고 들이마시는 모든 호흡이 우주의 호흡이고,

모든 강이 신선하며, 모든 산이 성스럽다.

 

타마스는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다. 반면에 사트바에서는 믿음이 기본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 타인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의사소통에 대한 믿음.

 

타마스는 자연을 열등하고 부족하고,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여긴다.

타마스적 인간은 분노와 무지, 그리고 탐욕에 사로잡혀 자연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 창출을 위해 자연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위 '녹색 혁명'을 통해 잡종 종자를 심고, 대규모 화학 제품을 살포하고, 중장비 기계를 도입한다.

녹색 혁명은 유전자 조작 및 공학, 유전자 종결 인자 기술로 이어진다.

몬산토, 카길 그리고 듀퐁과 같은 대기업은 식량을 독점한다.

이것이 번영과 발전으로 나아가는 자연에 대한 횡포이며, 타마스적 농업의 현실이다.

 

영국의 런던 canary wharf에 있는 1제곱 마일이 넘는 건물은 냉난방을 가동하기 위해

웨일스 전체가 소비하는 전력과 같은 양을 소비한다.

 

이러한 건물은 태양과 바람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난방과 냉방, 조명, 공기 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대량의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를 초래한다.

 

.....내가 내 몸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의 몸은 스스로 늙고 병들고 있소.

내가 죽음을 멈출 수 있을까요?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 나는 결코 내 몸의 왕이 아니오.

나는 거대한 생명의 흐름에 속한 존재일 뿐이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내가 맡은 소임을 다하고 있소.

당신과 나는 우주의 신성한 드라마에서 맡은 배역을 하는 것뿐이오....

 

우주 universe 는 uni(하나) verse(시.노래) 이다.

우주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그 안에서 모든 생명이 조화롭게 춤추고,

함께 노래하며, 중력 속에서 균형을 찾고, 서로 변화하며 진화한다.

 

사업과 정치 그리고 종교 조직이 사트바적 감각을 되찾기 위해 정신적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듯이

환경이나 사회 정의 운동도 사트바적 생태학이나 사트바적 정의를 세우기 위해 정신적 차원을 포용하여야 한다.

 

현재 대부분 사회 개혁 운동은 반대 시위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운동 역시 어두운 결말을 제시하고 있으며 비판하는 대상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지고 유지된다. 인류는 지구에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망의 일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의 희생이 생태적 자세의 원천이다.

 

기쁨은 가장 근본적인 사트비적 속성이다. 기쁨은 인도어로 '아난다'이다.

힌두 승려는 요가난다, 묵타난다, 시바난다처럼 '아난다'로 끝나는 법명을 받는다.

왜 요가난다인가? 왜 요가에 아난다를 붙이는가?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매일 요가를 하더라도 여전히 비참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요가가 무슨 소용인가?

 

요가는 아난다, 즉 기쁨과 함께해야 한다.

정원 일이나 농장 일, 빵 굽기, 심지어 설거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하든, 기쁨과 사랑의 창의성과 함께하라.

그림을 즐기지 않은 사람은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소위 '지속 가능한 자원'을 통해 소비주의와

지속 가능성이 동시에 실현될 수 있다는 미망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케이크를 소유하는 것과 먹는 것과 같은 예가 아닌가? 사실, 기후 위기는 소비주의 위기다.....

국가들은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다가

이제는 소비주의의 파국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 기술혁명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결과로 부터 자유로운 소비는 없다. 우리는 소비주의 문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결론은 화석연료를 바이오 연료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양적인 소비주의를 질적인 삶의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더 많고 더 지구적인 것을 더 작고 지역적인 것으로, 소유에서 절약으로,

저축에서 즐거움으로, 고용에서 생활로, 욕망에서 기쁨으로 소비 철학을 바꾸어야 한다.

 

자원의 소비보다는 자연에 대한 고마움으로 문화를 전환해야 한다.

 

노자는 우리가 만족을 느낄 때 이미 충분히 많이 가졌다고 깨닫지만,

만족을 모른다면 영원히 충분히 가지지 못하리라고 했다.

 

진정한 부자는 많은 재화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정신적 가치가 없는 문명은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의 대가로 돈을 벌었지만, 그것의 가치는 별로 크지 않다.

우리는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인간은 영혼을 잃어 버렸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우주는 고귀하고 삶은 신성하며

다른 어떤 것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실의 가장 깊은 속뜻은 '거짓된 삶을 살지 말라'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과 자신에 대해 환상을 품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진실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출처] 영혼의 나침반....사티시 쿠마르 지음|작성자 허당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