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우리나이도 죽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황령산산지기 2020. 6. 14. 06:32

유 래영

 

 

 

 

들어가면서

 

요즘 100세시대 라고 하지만 2019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연령별 생존확률은 •70세 생존확률

86% •75세 생존확률 54%, •80세 생존확률 30% , •85세 생존확률 15%, •90세 생존확률 5%이고

적정 생존은 76~78세 라고 발표했다, 그러면 내나이 70대로 앞으로 85세 까지 살 확율은 15%로

장담할수가 없기에 앞으로의 기대수명은 길게 잡아봐야 10~15년 정도라면 죽음이 얼마 남지

안았기에 지금부터 욕심을 버리고 정리할 것은 정리해서 미리 미리 준비를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 죽음은 누구나 죽고, 대신할수 없으며, 가져가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순서가 없다고 한다

 

내주위를 보면 건강한 지인이 백혈병인 혈액암으로 투병중이고 각종 癌으로 북망산에 가고, 눈에

황반변성으로 실명의 위기에 처한지인도 있으며, 당뇨로 다리를 절단하고, 중풍으로 누워있는분을

보면 아 ~ 나도 얼마 안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운동을 열심히 하지만 그것도 지연시키는 작용

뿐이 못한다, 공자는 50에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이고 60에 이순(耳順) 이라고 했고 70에는

종심(從心所欲 不踰矩)이라고 했는데 이제부터는 죽는 것도 나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할 나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정신이 혼미하지만 현실이다

- 지인 말대로 삶의 출구를 앞두고는 기도뿐이 할수가 없다고 절박하게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했다

 

 

누구나 죽음을 남의일로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길을 웰빙(wellbeing)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것을 웰다잉 (well

dying) 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두달만 아프고 행복하게 생을 마감을

하는 것은 더 중요 하다고 생각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죽는다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이분야의 책도

많이 읽었고, 불교계의 49제의 의미와 지장보살님등 닥치는대로 관련책을 읽었지만 궁금중을 풀지

못했는데 아래의 최준식교수의 글을 몇번이나 읽어보니 다방면으로 궁금증이 많이 풀렸습니다

- 그러면 과연 종교계에서 주장하는 死後世界가 있는 것일까?

 

나는 어려서 시골동네 어르신의 죽음에서 염(殮)을 하는것 본후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항상 죽음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서 칼럼이나 인터넷을 뒤져서 보아도 속시원한 해답을 구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최 교수의(아래글 참조) 죽음학에 대하여 읽고 그동안의 의문점이 많이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의문점이 있는데 문제는 어느분도 북망산에 다녀오지 못했기에 속시원한 답을 들을수가 없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죽음에 대해 미리 알고 준비하면 현실의 삶에 더욱 충실할 것으로 생각을

하기에 앞으로도 이분야에 대하여 책도 많이 읽어보고 공부를 해볼 생각인데 어쩔지 모르겠다

- 우리나라에서 죽음학에 대하여 샤마니즘과 유교에 생존자를 위한 제사의미를 설명한분은 없다

 

지인인 어느분은 항상 노끈은 준비가 돼여 있다(자살) 라고 말하는데 최근 뇌졸증으로 쓰러졌는데 삶에

욕망이 어느때보다도 강하고 장인어른도 70살에 중병으로 의사가 담배와 술을 끊지않으면 죽는다고 하니

그날부로 끊고 15년을 더 사셨는데 우리말에 3대거짓말중에 하나가 노인들이 죽고싶다고 하지만 늙을수록

삶의 욕망은 더 강하다는 것을 느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잘죽기 위해서는 후회없이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기에 지금부터라도 삶의 자세를 바꾸어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고 도와주고 배려하고 지갑을

열고 살기등 나의 마음자세부터 바꾸는 것이 가장 먼저 실천할 버킷리스트 (Bucket list) 라고 생각합니다

-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80살까지 살 확율은 30%뿐이 안되고 적정나이는 76~ 78세라고 2019년 발표했다

 

 

제사방법을 획기적으로 변화를 시켜야 한다

 

 

제사를 지낼때 조상신을 모셔오는것을 강신이라 하고 제주는 조상님을 불러오기위해 향을 피우고

술을 절반정도 따라서 토지신에게 3번 붓고 다시 2번 절하면 조상이 온다고 했는데 과연 조상님이

오시는지 어릴때 부친에게 물어보았다가 혼난적이 있다, 아래 최 교수는 제례법에서 이런것은 허구이고

결국은 산자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권한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지내는데 간접적인 영생법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사실 어느 집안이나 제사때문에 시끄러운데 이제는 제사도 우리대에서 없애거나 혁명적으로

바꾸어서 화합의 시간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적 정서상 쉽지 않을것이다

- 제사는 결국 권력자인 왕, 족장, 부모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죽은자를 끌어들여 예식하는거라고 말한다

 

우리 동기생 이모님은 돌아가시기전에 자식들에게 재산분배후 별도의 3,000만원 통장을 넘겨주면서

이돈으로는 제사를 없애고 내 생각을 해주면 고맙고 안해도 어쩔수없는데 그저 식구들이 모여서 회식비용

으로 쓰라고 유언을 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멋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TV에서나 어느 가정에서 제사준비

절차와 비용등에서 형제간의 갈등이 많으며 젊은 신부들이 가장 기피하는 것이 제사 라고 하는데 이제는

유교적문제에서 벗어나 변화를 시켜야 하지만 조상님문제를 잘못 꺼내면 후레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에 누구도 공론화시키지 못하고 수면하에 잠재되여 있는데 앞으로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 내생각에 복잡한 제사보다는 기일날 가족이 모여서 고인의 생전에 하신일을 생각하면서 추모 해야 한다

 

 

죽음(임종) 체험프로그램에 참가를 해보고 싶다

 

인터넷을 보면 대락생이나 종교단체와 병원에서 임종체험 프로그램이 있는데 내용을 보니 우선 장례식

영상을보고 유언장을 작성하고 수의를 입고 깜깜한 관속에 들어가서 10분정도 체험을 한다고 하는데

보통 30여명 정도 같이하면서 소감발표를 한다고 하는데 체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유익하다고 했으며

그내용을 보면 "이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의 삶과는 조금은 다른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나에게 진정 가치롭고 의미있는 것은 무엇인가...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모습은 무엇

인가...나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나는 그들과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 라고 발표했다

- 우리나이가 70대로 이제는 죽음에 대해서도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사뢰에서는 죽는다는 것에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했지만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나는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화재를 올렸더니 나보다 더관심이 많았으며 어느친구는 실제로 00상조회사에서

하는 임종체험에 참가해보니 유언장을 쓸데까지는 몰랐는데 막상 수의를 입고 관에 들어간다음 관뚜껑이

닫히고 못질하는 소리가 들리자 공포가 엄습하였는데 시간은 10분 정도라고 했는데 실제는 10년보다

긴것 같았으며 자기가 살아온길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처지는데 많은 생각을 했다라고 담담히 말했는데

나도 시간을 내서 임종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삶과 죽음문제를 직접 체험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 2019 통계청 발표는 90살 까지 살 확율은 불과 5%뿐이 안된다고 하는데 놀랬다(100세 시대는 허구)

 

 

살아가면서 유언장이라도 써야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유언장을 쓴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긴적은 한번도 없는데 가족은 우리도 인생이 어떻케 전개

될지 모르기에 유언장이래도 써놓자고 하는데 그배경에는 외국에 살고 있는 딸아이의 캐나다 시부모님은

매년 유언장을 써서 공증을 받아서 은행금고에 보관한다고 하는데 가족은 우리가 재산도 거의 없지만 어디에

뭐가있고 예금과 주식은 어떤지를 아이들이 알아야 갑자기 사태가 나면 어쩔거냐고 하면서 쓰자고 하는데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마누라의 의견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볼 생각입니다

-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 재산 46억을 3형제가 법정 재산싸움을 하는 것을 보니 시사하는바가 크다

 

 

최준식 교수의 글이 백번 맞는다고 생각 한다

 

사실 최 교수의 말대로 죽으면 끝나는 것인데 죽기전에 임종환자들이 느끼는 고독과 고통에 대하여

도와주어야 하며 장례는 누구나 종교를 떠나서 유교학적인 관념과 한국의 토속적인 샤머니즘의

DNA 가 가슴속에 깊숙히 존재하기에 남의 눈을 과도하게 인식한다는 지적과 허황된 풍수지리문제를

지적하고 제사때 조상혼이 어디서 오는지는 누구도 설명을 못하기에 제사는 산자의 중심으로 공동체

를 형성하기 위하여 만들어진것이라 라는 명쾌한논리는 내가슴을 속시원하게 해준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 모든종교중에 유교만이 내세세계를 부정하지만 제사만큼은 강조하는 아이라니를 보여준다

 

 

 

 

나는 치료불능이면 여기에 가고 싶다

 

불교계의 정토마을은 충북 미원면에 호스피스병동을 설립하여 자원봉사자로 운영되며 tv에도 많이

소개된 유명한 병동으로 죽음을 목전에둔 말기암 환자들이 오는데 여기서는 자원봉사 호스피스들이

죽음을 편안하게 인도하는것을 방송에서 보았는데 나도 가능하면 차후에 인위적인 산소마스크나

항암제를 거부하고 여기에 입소하여 죽음을 맞히라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차후 문제고 우선은 죽음에대하여 공부해서 많이 알면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지고

사는것이 충만할것이라는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실천해보고자 합니다,,,

- 내가 불치의 병이 걸리면 병원의 어려운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여기에 입소하여 자연사를 원한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죽음이란 자기 의지대로 되는것이 아니고 죽은다음에 살아온분들도 없기에 영원한 미지의 논리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기마련이기에 크게 낙담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하여 공부를 하다보면 앞으로 남은 인생이 매우 소중하기에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최 교수의 글을 읽고 인터넷에서 관련자료를 많이 읽었는데 앞으로 나에게 남은 기대

수명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남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 결론은 내일죽을 것처럼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 행복하고 잘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

# 아래 죽음학의 내용이 아주 길지만(A4 20장 분량) 끝까지 읽어주세요,,,,,

 

 

죽음학 / 이대 교수 최준식 |


죽음교육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죽음을 맞이하려면 역시 죽음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겠죠. 저의 한국 죽음학회의 표어는 그겁니다.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속절없이 어느 날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저 아무 준비를 못 하고 당하는 것보다 미리 준비를 해서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죽음을 만들자 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겠죠.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는 죽음교육은 나중에 하면 늦는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때 가서 보자. 죽을 때 가서 보자. 이렇게 얘기를 하고 피해 가도 결국은

죽음은 찾아오고 우리의 생명을 뺏어가게 되죠. 불경에. 죽음을 도피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바닷속 깊은 곳에 숨고, 어떤 사람은 산속에 깊은 곳에 숨고. 이렇게 여러 곳에 숨습니다.

그러나 여지없이 그들도 죽습니다. 그렇게 피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긍정적이고 좀 적극적인 죽음

교육을 통해서 우리의 죽음을 맞이하고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죽음교육은 어느 곳에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의 실정입니다.독일에는 고등학교에만

21가지에 달하는 죽음 교육교과서가 있다고 합니다. 각 고교에서는 이 21가지 책 가운데에서 골라서

교재로 쓸 수가 있는겁니다. 지금 한국은 대학교에서도 쓸 수 있는 죽음교육교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 교육의 첫 번째 목표는 삶의 마지막 임종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의도움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죽어가는 환자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죽음의 과정이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다. 임종환자들이 과연 어떤 것을 필요로 하고 또 죽음은 어떤 것인가? 라는 것에서

이해를 돕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지막을 맞이하는 환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분들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고독과 고통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결국은

혼자 가는 길이기 때문에, 또 죽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 고독감은 아마 상상을 못할 겁니다.

이럴 때 우리 옆에 있는 가족들은 항상 우리가 당신과 같이 있을 것이고,

항상 당신을 지지 지원할 것이다. 따뜻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고독 문제는 가족이 옆에 있으면서 계속 도와주면 많이 풀릴 수 있습니다. 고통문제는 의사의

몫이겠죠.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약으로 얼마든지 고통완화제 진통제로

얼마든지 경감시킬 수 있다. 고독과 고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임종환자들에게. 인간의

죽음을 말할 때 우리가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라는 분이었죠.

 

이 분이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를 다섯 단계로 나눴죠. 첫 번째 부정하는 단계입니다.

불치병을 선고를 받은 다음에 첫 번째 반응은 부정하는 단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설마 나에게

죽음이 다가왔겠느냐? 라는 그런 반응입니다. 이건 뭐 정말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죠. 받아들일 수가 없죠.

자기 자신이 몇 개월 뒤에 죽는다는 사실이.그다음에는 분노의 단계입니다. 부정하다가 아니 이게

아니거든요. 이게 분명히 걸린 거 같거든요. 이럴 때는 부정이에요. 아니다. 왜 내가 죽어야 되느냐?

왜 내가. 이러면서 분노를 터트리게 됩니다.

 

특히 가족과 의료진에게 이런 분노를 터트리게 됩니다. 이때 가족들은 그것을 되받아치면 안 되겠죠.

좀 초점을 옆으로 가게 한다든가, 혹은 위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잘 달래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분노의 단계가 지나가면 그다음엔 타협을 하는 단계에요. 분노해봐야 안 되거든요.

화를 내서 풀릴 문제라면 매일 화내고 살죠. 그러나 그렇게 해서 안 된다는 것을 본인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타협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타협을 하는 단계. 흥정을 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몇 달만 더 살게 해주신다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또 혹은 이번 여름까지만

살게 해 준다면 제가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겠습니다. 이런 얘기라든가. 아니면 딸의

결혼식 때까지만 좀 살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의 흥정. 타협을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단계까지 지나고 나면 그다음에는

 

네 번째죠. 우울증에 걸리는 단계입니다.
환자가 더 이상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느낄 때 빠지는 감정이 바로 이 우울증과 절망입니다.

그렇죠. 이제 도저히 어떤 짓을 해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큰 포기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조금 단계가 지나면 우울한 우울증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 단계까지 오도록 얘기할 때

환자가 불치병이 걸렸다는 것. 간암 말기다. 폐암 말기. 이런 암에 걸렸다고 얘기를 과연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항상 그 대두됩니다.

물론 죽음학회에서의 모범답안은 반드시 해야 된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국 경우는 조금 다른 거 같아요. 왜 그런 고하니 어차피 죽는데 말이죠. 만일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얘기해주면 그다음부터는 우울 단계로 빠지게 됩니다. 자포자기 상태로 빠져서 병세가

순간적으로 악화돼서 그냥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말을 안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대쪽에서 보면 그렇게 해서 말을 안 해가지고 있다가 죽는 것보다는 말을 해서 죽음을 찬찬히 준비

하게 하는 게 더 본인에게는 좋은 것이다. 이런 의견을 펴는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만일 그런 말기

환자라면 진실을 듣고 그다음에 준비를 하고 그런 길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거죠.


다섯 번째 단계는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입니다.

어쩔 수 없죠. 이제는 수용을 해야죠. 여기까지가 다섯 번째 단계인데요, 여기에 알폰스 데켄 신부는

한 단계를 더 추가를 시켰었어요. 여섯 번째 단계로 기대를 하고 소망을 갖는 단계. 사후생의 존재를

알려주고, 또 죽음을 착실히 준비할 수 있게하고. 이런 기대와 소망, 희망을 갖게 해주는 단계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바로 이 단계에서 호스피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죠.

 

여러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것은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진실을 듣고 그다음에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두 번째 목표입니다. 죽음 교육이 필요한 두 번째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좀 더 깊이 생각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 자신의 죽음이 얼마나 특수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가. 이런 것들을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많은 정보를 가지고 알려줘서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는 거를 말합니다.

 

세 번째 목표는 슬픔, 혹은 애도 교육입니다.

사실은 이 주제가 죽음 앞에선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뭔고 하니 이거는 죽어가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가족, 혹은 친지들 친구들의 문제입니다. 죽음학에서는 세 단계로 나누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주변에 있는 가족들이 세 단계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bereavement, 상실이라고 합니다. 상실의 슬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의 슬픔.

그다음엔 grief. 비탄. 이번에는 슬픔이 중요시하게 됩니다. grief, 비탄. 그다음에는 mourning.

애도라고 하거든요. 이건 뭔고 하니 슬픔의 단계는 지나고 그다음에 다시 본래 생활로 적응되는

데 걸리는 그런 시간이라든가 과정을 애도라고 부릅니다.


일단 상실감을 갖게 되고 아주 큰 슬픔에 비탄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죠.

그걸 극복해 나가면서 또다시 현실에 적용해 나가는 것. 이것을 애도 혹은 모닝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바로 죽음 교육은 이런 과정을 순탄하게 겪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사실은 임종당사자에 대한 죽음 교육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애도 교육입니다. 한 예를 들어볼까요?

부모가 타개한 경우에는 그래도 어렵지 않게 죽음 그 슬픔을 극복을 하게 되는데. 자식이 먼저 세상을

버린 경우에는 이게 간단치가 않다고 얘기를 합니다. 특히 거기다가 이 자식이 자살을 하면은

또 이건 또 더 몇 배 더 힘들어진다고 그래요.


좌우간 어떻든 자식이 죽으면. 우리말에도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해서 평생을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부간에 몇 년 동안 말을 안 해요.

팔짱만 끼고. 그러면서 그러다가 서로 탓을 합니다. 당신이 그때 전화만 안 했으면 라고 얘기하든가,

아니면 전화를 해서 오라고 했으면은우리 아들이 오다가 사고를 안 당했을 텐데.

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그 슬픔을 참지를 못하니까 밖으로 투사를 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이혼하는 부부도 적잖게 있다고 하고요. 슬픔을 참아낼 수가 없는 거에요. 분노를

참아낼 수가 없는 거에요.이럴 경우는요, 어떤 것이 가장 묘약인고 하니 같은 체험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서로 치유를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역시 동병상련이죠. 네. 이런 식의 교육을 죽음교육에서 도와줘야 된다.

 

네번째 목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져서 심리적으로 괜한 짐, 필요 없는 짐을

지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거다. 우리가 뭐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말 할 수 없이 크죠. 그런데

그것과 더불어서 죽음은 영적으로 진화하는, 혹은 성장하는 대단히 좋은 기회다. 이런 것들이 연구

결과에 나온 게 있습니다.이런 것들을 알려줘서 죽음을 너무 큰 공포로 대면하지 않게큼 도와주는 겁니다.

 

다섯 번째 목표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좀 자유롭게 얘기를 하자라는 거에요. 공개적으로 얘기를 하고, 그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 정서적인 거, 감정적인 것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죽음을 금기시하고 그저 외면하는 것, 이거 가지고는 문제가 해결이 안되죠. 우리는 보다 더 공개적

으로, 적극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되겠다.

바로 이게 죽음교육의 다섯 번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목표는 암에 걸린, 혹은 좌우간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문제입니다

죽음학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모범답안이라고 얘기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알려주지 않으면 문제가 되느냐? 알려주지 않으면 그건 뭡니까? 환자를

속이는 게 되는 거죠. 따라서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 불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환자들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지만 안으로는, 속으로는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겉으로만 모른 척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제 불신감이 싹트는 거죠.그런데 이럴 때 이때 알려줄 때 말이죠. 불치병이라는 것을

알려줄 때도 상당히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다. 직격적으로 대 놓고 얘기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좀 간접적으로 돌려서 알게 하고, 그래야 충격이 덜하고 받아들이는데 좀 편하게 알게 됩니다.

편하게 알 수 있게 되죠. 사실 말씀 드린 것처럼 환자가 미리 알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얘기를 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일곱 번째가 되겠죠. 죽음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라든가 의학적인 문제, 의학법적인 문제에 대해서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거다. 가령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고 법적으로 말이죠, 이게 언제가

죽음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고, 그다음에 안락사나 존엄사 같은 문제. 이게 의료법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죠. 이런 것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또 나는 과연 어떤 죽음을 택해야 될 것인지.

이런 윤리적인 문제. 안락사는 윤리적으로 허용하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안락사는 적극적으로 임종환자를 죽게 만드는 거죠. 주사를 놓는다거나, 아니면 뭐 가장 연명장치를

떼어버린다거나. 이런 식이라면 존엄사는 적극적인 게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자연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단지 통증만 저하시키고 나머지 기계들은 빼는. 그런 식에. 말하자면

이런 세세한 것을 얘기를 해 줘서 의료법적인 문제에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거다.


여덟 번째는 자살을 방지하는데 있다.

자살을 해서 문제가 풀린다면 다 죽죠. 거 뭐하러 삽니까? 그러나 자살을 해도 절대 문제가

안 풀린다는 거 아닙니까. 소명의식. 삶에 대한 소명의식을 심어줘야 되겠다. 이런 겁니다.

그다음에가 아홉 번째, 장례식 역할에 대한 설명. 장례식.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안 되는 얘기인데요.

장례식을 환자가 스스로 준비하고 그 방법을 선택하도록 도와주는 거에요. 결혼식을 자체에서

디자인하는 경우가 꽤 있죠. 요새. 마찬가지입니다. 장례식도 그렇게 하라는 거에요.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독일 간호사인데, 자기의 장례식을 다 설계를 해서 자기 목소리도 녹음을

해놓고, 장례식에 온 사람들한테 인사 말씀이죠. 그것도 녹음을 해놓고. 또 이 사람은 기독교인

이었던 모양이에요. 찬송가 몆 장을 몇 절을 읽어라. 노래를 해라. 설교를 어떤 거를 해라.

감사의 말씀을 하고. 뭐 이런 경우. 또 어떤 할아버지는 이렇게 짜놓고

자기 손주들에게 와서 무슨 얘기를 해 달라 그러든가 그렇게 다 짜고 가는 거에요.

 

참 멋있는 일이죠. 이렇게 하는 게. 아주 품위 있게 그런 장례식에선 그렇게 슬퍼할 게 없죠.

품위 있게 그 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그분을 기리면서 전 가족이 같이할 수

있는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열 번째는 시간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하고, 가치관을 재정립할 수 있게.

자극하는데 있겠다.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가령 우리가 암에 걸려서 일 년 밖에 살 수 없다.

이렇게 됐을 경우에 이 환자는 일 년 동안 열심히 살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준비하고, 다

른 사람을 돕는 그런 봉사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일 년을 살고 가는 것과 30년을 살아서 70~80 사이에 죽는데 마지막 인생후반부를 엄벙덤벙

하고 살다가 마지막에 그냥 속절없이 아무 준비하지 못하고 죽음에 빨려들어 가듯이 죽는, 이렇게

죽는 죽음과 어떤 죽음이 더 의미 있겠느냐 이겁니다. 전자겠죠. 그러니까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는 거에요.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겠다.


바로 이게 시간의 소중함, 혹은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것, 이런 겁니다. 어떻게 보면, 암이나

좌우간 제가 이렇게 그런 경험 안 해 보고 당돌하게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불치의 병에 걸린 게 어떻게 보면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들면 된다는 거죠.

쉬운 일은 절대 아닙니다. 어렵지만 정말 인생을 농밀하고 밀도 있게 살고 준비할 수 있는 이런

기간이 바로 이 기간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다. 이런 겁니다.

 

그다음 목표는 개인으로 하여금 죽음의 철학, 혹은 종교적인 해석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겁니다.

이 죽음을 직면했을 때 그제서야 종교가 얘기했던 본령, 인간의 본령, 인생을 사는방법.

그런 것을 얘기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 정말 진정한 종교. 어떻게 사느냐?

이런 문제를 이때 관심 갖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 목표는, 죽음 이후에 생명의 가능성.

사후생이죠. 이 가능성에 대한 사실을 생각하도록 격려하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사후생에 대한 교육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큰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육체로는 죽지만, 육체로서는 소멸이 되지만, 또 다른 영체로. 영체라고 그랬죠.

psychic body. 이렇게 얘기했죠. 영체로서 다시 존재한다. 이런 것들. 훨씬 더 위로를 받을 수 있겠죠.

여기까지가 죽음교육이 추구하는 그런 목표를 들어봤습니다. 이런 죽음교육의 목표는 아주 간단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전환시키자. 다시 말해서 죽음을 준비하자.

이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한국인의 죽음관에 대해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아마 이제 어느 정도 짐작은 하실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과연 어떤 세계관, 가치관을 갖고 있을까요? 죽음에 대해서. 대단히 현세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죽음관에 대해서 아주 현세적인 세계관,

그러니까 죽음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여기 삶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신봉했던 종교 때문에 이렇게 된 거 같아요.그렇습니다. 한 사회에 살고 있는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가치관은 대부분 종교에 큰 영향을 받고 형성이 됩니다.

 

한국 같은 경우에는 과연 어떤 종교가 많이 영향을 줬을까요? 한국 사람들의 의식구조형성에는

불교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건 이유가 있죠. 그것은 왜 그런가 하니요. 불교는 조선

시대 때 박해를 받으면서 사회에 실세자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샤머니즘과 같이 변두리

종교처럼 되게 된 거에요. 그 자리를 유교가 꿰어차고 들어오게 되죠. 만일, 조선도 고려처럼

불교가 국교였다면, 조선 후에 혹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 굉장히 달랐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제사 안 지냅니다. 당연히 제사지내는 것은 절에 가서 하는 것이고.

또 남녀차별도 이렇게 심하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남녀차별이 가장 덜한 종교죠. 세계적 종교

가운데서. 어떻든 유교가 조선의 주 이데올로기가 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유교에 절대적인

영향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문제 관해서는 제가 다른 책에도 썼습니다만. 좌우간 우리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다. 몇 대째 기독교인이다. 불교 같은 경우는 몇 십대가 불교인이겠죠.

이게 소용이 없습니다. 속으로 들어가면 전부 유교인입니다. 항상 나이 따지고, 아래위 따지고,

직급 따지고 이런 것들. 남녀 구별하고. 이거야 말로 유교의 기본적인 모습들이죠.


그런데 유교적인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유교적인 모습 그 핵에는 무속적인 거,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죽음학이라서 샤머니즘 얘기는 별로 했습니다마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구조

속에는 샤먼의 DNA가 존재하는 거 같아요. 이 샤머니즘은 한국 역사 동안에 한 번도 절멸되어

본적인 없는 가장 한국인과 가까운 종교였습니다. 상층종교가 불교가 되든, 유교가 되든,

기독교가 되든, 그 밑에는 샤머니즘으로 점철 돼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무당들의 파워를 알기 위해서 무당들이 얼마나

많은 걸 알기 위해서 뭐 그렇게 힘들일 것도 없습니다. 시내 곳곳에 무당집들이 있고.

또 일간 스포츠 신문 보면 적어도 두면 이상 하단에 전문 광고가 나옵니다. 버스에도, 의자카바에도

전문 광고가 나옵니다. 하다못해 모 TV 프로그램에도 무릎팍도사. 세팅장면이 무당집인 경우가

나옵니다.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샤먼적인 것들은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

깊게 취면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샤머니즘과 유교의 강한 영향이 있는데, 이 두 종교가 과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굉장히 현실적인 거죠.이 두 종교를 내세관이 없습니다. 이런 가치관의 영향 때문에

불치병에 걸렸을 때 한국인들은 많은 경우에 끝까지 삶에 집착을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건 뭐 문화적으로 전승돼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빠져나갈 도리가 없어요.

 

소수의 불교인, 기독교인들만이 내세를 믿고 죽음을 준비하게 되는데, 대부분은 삶의 집착을 하게

됩니다. 이생이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고, 무리한 항암치료를

하게 되고. 나중에 혼수불성이 되요. 불성이 되고, 황망하게 본인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환자를 수발하는 가족들 경우도 마찬가지죠. 많은 돈을 써야 되기 때문에 집 팔아서 전셋집으로

이사를 하고, 전셋집에 살던 사람은 더 나쁜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가야 되고, 수발하다 집이

망하고 말이죠. 그런가 하면 온 가족이 환자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모님들 마지막 가는 길에 효의 논리죠. 참 숭고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현실적인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을 또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죽음에 관한 한 병원에 중환자실에서 내팽개쳐져 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세계관이

있길래 이 샤머니즘이나 유교에서 이렇게 됐을까? 먼저 샤머니즘을 볼까요? 무속에서는 기본적으로

죽음은 한스러운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영은 저승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헤매게 되죠.

그래서 그 한 때문에. 사실 이전에 한없이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특히 여성들,

얼마나 고생하다가 죽었을 것이고, 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병이 많이 걸리고.

 

여러분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1900년도 초에 얼마인 줄 아십니까? 25세밖에 안 됩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 아이를 낳다가 많이 죽기 때문에. 반타작이라는 얘기를 하죠. 그래서

그렇게 죽은 아이들이 평균을 깎아 먹기 때문에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참~ 60 넘게 살기가

힘든 그런 시대였죠. 그렇게 죽으니까 많은 경우에 한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그 한 때문에 저승을

못 갔다. 그래서 친지를 사실은 못살게 굴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그래요.

 

무당 얘기를 들어보면 죽은 조상들이 자기가 힘드니까, 자손들보고 굿을 해달라고 와서 쓰다

듬는다나요? 영의 상태로 와서. 그게 그들은 쓰다듬는 거지만 당하는 자손들은 액이 되가지고

나쁜 일을 당하는 거에요. 병이 들기도 하고 나가 죽기도 하고.

이건 그쪽 얘깁니다. 제 얘기가 아니고. 그래서 천도재를 지내게 되죠.

 

물론 이제 깨끗하게 산분들한테는 안 지냅니다. 다 지내는 건 아니에요. 객사를 하거나 불의의

사고, 병, 이런 거를 어려서 죽거나 이런 경우에.이때 하는 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진오귀굿. 새남굿. 서울에서는 새남굿이라 그러고요. 전라도에서는 씻김굿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서울지방 경기지방의 굿을 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바리데기 공주, 바리공주죠. 서울 지역

무당의 시조입니다. 바리공주가 끌고 저승으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를 없애는 거에요.

그런데 어떻든 문제는 제가 굿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문제는 그것은

아니고. 문제는 샤머니즘의 저승관이 희박하다 이거에요. 굳이 샤머니즘.

무속에 저승관이 있다면 이것은 불교의 영향입니다.

 

무당들이 칼산지옥 한빙지옥 이런 얘기하거든요. 칼산지옥은 칼이 나 있는 그런 산에 칼이 있어서

거기 매일매일 찔려가지고 죽었다 또 살아나서 또 찔리고. 이런 거. 한빙지옥은 아주 추운 곳에

홑겹만 입고 덜덜덜 떠는 거.이런 식의 지옥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건 다 불교에 나오는 겁니다.

이 지옥에 대한 유명한 그림이 있죠. 통도사의 극락전인가요? 거기 가면 많이 인용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승이 어디 있는지 별 관심이 없다는 거에요. 이거를 어디서 알 수

있을까요? 속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샤머니즘도 그렇지만 한국인도 그렇습니다. 저승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무당들에게

대문 밖이 저승이다. 아니면 뭐 길모퉁이 돌아서면 저승이다. 이런 거에요. 저승이라는 게

기독교나 불교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승에 붙어서 빌붙어서 존재는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한 거에요. 부차적인 공간이에요. 중심은 이 승에 있는 겁니다


대문밖에 붙어있고, 모퉁이 옆 뒤로 돌아가서 붙어있고 이런 겁니다. 그래서 이런 세계관에서

나온 생각들이 우리 속담에 녹아있죠. 이승 저승과 관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구에 회자되는

속담은 이런 거죠. 말똥에 굴러도 이 승이 좋다. 또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또 거꾸로 매달아도 사는 세상이 낫다. 전부 이승에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얘기하는 거에요.

예. 그것은 왜 그럴까요? 간단하죠. 저승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그냥 어떻게 해서든 부귀를 누리면서 부귀도 아니에요. 말똥에 굴러도 좋다니까.

뭐 개로 살아도 좋으니까 죽은 정승보단 개가 낫다 이거에요. 살아 있는 개가.
무조건 이생에 살겠다. 엄청난 이생에 대한, 이 승에 대한 집착이죠.

 

유교는 어떨까요? 유교도 내세관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종교 가운데, 세계 가르침

가운데에서 내세관이 없는 종교가 거의 없는데, 유교가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내세관이 없습니다.

유교의 생사관을 보면 뭐 상당히 간단합니다만. 공자가 말한 논어에서 말한 게 다 나와 있습니다.

유명한 얘기죠. 제자가 죽음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죽은 뒤 어떻게 되느냐? 죽음이란 게 뭐냐?

이런 식으로 물어보니까 공자는 바로 되받아칩니다. 너는 사는 것도 잘 모르면서 왜 죽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느냐?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귀신은 어떻게 대하면 되겠는가?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너는 살아있는 사람도 제대로

잘 모시지 못하면서 귀신 모실 것을 걱정한다.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면 된다 라든가.

이런 식의 말을 합니다. 이것은 공자가 사후생에 대한 존재 여부의 언급을 회피한 거에요.

사실은 저는 개인적으로 공자님은 저승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공자님 경우에는 부처님처럼 온갖 삼천대천세계를 돌아다니고 이런 분은 아니고.

그냥 살아서 부모에게 효도 잘하고 주위 사람 공경 잘하고 이런 정도의 스승에 그치는

거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이분이 몰랐던 거 같아요.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걸 질문하니까 이럴 때는 최선의 방책이 뭡니까?

 

되받아치는 거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하죠. 이게 틀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문제는

재미난 얘기들이 많은데 넘어가기로 하고. 문제는 공자가 이렇게 죽음 뒤에 세상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한 것 때문에. 혹은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서 부정을 했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유학자들은 한결같이 죽음 뒤의 세상을 부정합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이게. 뭐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자기들이 교주로 생각하는, 세계에서 인류가 생겨난 이래에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생각하는 공자가 죽음 뒤의 세계를 부정했으니 자기들도 어찌할 수가 없겠죠.
제가 유학하는 사람들은 요새는 거의 보지를 않습니다만 예전에 같이 이런 문제가지고 얘기를 하면

정말로 뭐 싸울 듯한 태세를 가지면서, 죽음 뒤에 있는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하여튼 증거도 없어요. 그냥 공자님이 그렇게 얘기했기 때문에 그럴 뿐이에요.

 

참 그렇습니다. 이것도 죽음 뒤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거죠. 죽음. 그런데 나중에 제사문제와 결부

시키면 재미난 문제가 하나 나옵니다. 이게 모순점이 발견이 되거든요? 그다음에 이 신유가.

그러니까 주자학이나 양명학 이런 데서 다소 복잡한 인간론이 나오게 됩니다.


죽음, 인간이 어디서부터 생겨나서 어떻게 진화하다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죽음 뒤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금 복잡하긴 한데. 이게 사실 이런 것들은 칠판에 써서 해야 되는데. 말로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서 오는가? 유가. 신유가들은 일기. 혹은 원기. 하나의 기운, 혹은 근원적인 기운.

여기에서 오는데. 여기에서 귀와 신. 이게 바로 귀신입니다. 우리가 귀신할 때 귀와 신으로 나뉠 수

있게 됩니다. 정신. 그러죠. 사람의 정신. 이게 여기서 나오는 건데 정과 신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또는 혼과 백. 그래서 백은 음적인 거고 혼은 양적인 게 됩니다.사실 혼은 혼과 백만 가지고 얘기를

해 볼까요? 우리가 혼비백산했다 할 때 말이죠. 거기 나오는 혼백이죠. 이 혼은 영혼을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백은 육체적인 것을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원기에서 혼과 백이 갈라져서 죽~ 삶을 영위를

합니다. 죽게 되면 혼은 하늘로 해서 그냥 사라져버리고. 백은 땅으로 들어가서 그냥 없어져 버리고.

이겁니다. 이거. 다시 일기 혹은 원기로 돌아가는 거에요.

 

아무것도 남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주자인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예외의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

한이 맺혀서 죽은 사람들은 그 혼이 죽은 뒤에 바로 없어지지 않고 한동안 있다가, 아니 계속

존재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결국은 좌우간 꽝이에요.


죽으면 끝입니다. 이게. 그럼 제사는 왜 지내느냐? 조상의 혼이 없다는데 물어보면 답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거에 대해서 답하는 유교인. 제가 뭐 부친하고 제사지내고 이럴 때, 집안 어른들하고

옛날에 지낼 때, 혼이 어디 있다 오는 겁니까? 하고 물어보면 정답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충 피해버리고 맙니다. 이런 데서 모순이 생기는 거죠.

 

제사문제는 다음 시간에 제사문제를 볼 때 다시 말씀드리기로 합니다. 사실은 제사라는 것은

유교식의 영생법이에요. 자기는 이렇게 없어지지만,아들의 뇌리 속에서 일 년에 한두 번씩

되살아나는 것. 아들의 뇌리 속에서 기억됨으로 해서 되살아나는 것. 이것을 꾀하는 게 바로

제사입니다. 다른 것도 있습니다만. 이런 의미에서 간접적인 영생법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불교나 기독교 같은 경우는 자기 혼이, 개인적인 혼이 죽어서도 그냥 남아있게 되죠.

 

그래서 이건 직접적인 영생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유교 같은 경우에는 자기 개인적인

영혼은 없어지지만, 아들에 의해서, 아들이 차려주는 제사의 의해서, 일 년에 몇 번씩 아들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 이것을. 혹은 자기 분신인 아들을 남기므로 해서 가통을 잇게 하고,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따라서 간접적인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데에서 많이 다름을 보이는데. 옛날 그 어른들이 그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나이가 들게 되면,나이가 들어서 늙게 되면, 가장 큰 소원은 죽어서 자식들을, 아들이죠!

아들의 제사 받아먹는 것. 그래서 제사를 안 지내 줄 거 같으면 굉장한 공포에 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제사 때문에 논 몇 마지기를 맡기느니 마느니 말이죠.

그러다가 기독교인 며느리가 들어오면은 초비상사태에 들어갑니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제사를 안 지내 줄 것이다 라는 그런 생각 때문에. 사실 그런 의미에서

제사에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마는, 그런 의미에서 제사는 간접적인 영생. 자기는 죽지만

아들의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그런 간접적인 영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그래서 생각하는 죽음을 보려면 저는 철학적인 데서 볼 필요는 없고요,

가령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얘기. 그런데 실제로 갤럽조사를 해보니까요.

지금 윤회를 사실로 믿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요. 불교도건 아니건 간에 봤더니

한 10여 년 전 조사를 보니까 일반 국민 가운데 윤회를 믿는 사람은 20%에 불과하다.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별로 그렇게 큰 영향력이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죽음의식, 사후생에 관한 것들은 그들이 행하는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례

에서만이 찾아질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서 한국인들의 죽음의식이 정말 적나라하게

확실히 드러나게 됩니다.거기 조금 하나 더 붙이자면 풍수지리, 이게 장지와 관계되는 거죠.

풍수지리. 얼마나 한국 사람들이 현세적인가가 이 풍수지리에서도 나타납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들어보시면 우리들, 우리들 조상들이 갖고 있었던 가치관이 이렇게 현세적

이었구나. 그래서 한국인들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연명에 집착을 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한국인들이 얼마나 현세적인 죽음관을 갖고 있는가를

한국인들이 행하는 종교의례에서 장례의례 이런 것들에서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장례식, 차례 의례죠. 그다음에 풍수지리. 또 제사. 여기에서 과연 한국인들은 어떤 현세관을

갖고 있는가? 이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례식 절차를 우리가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하는데.

사실 전통사회에서는 굉장히 복잡했었죠? 지금은 뭐 이렇게 하는 사람은 없는 거 같습니다마는.

그러나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이 장례, 옛 장례의례가 축약된 것이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장례의례를 알아보면 한국인들의 죽음관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한국인들은 그동안에 묘지에 매장하는 장지에 아주 강하게 집착을 했죠. 이게 최근에 와서

바뀌게 됩니다. 화장으로 말이죠. 부모님의 신체를 화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죠.

유교에서는 말이죠. 그러나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여의도에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제가 재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마는, 여의도 땅의 1.2배나 되는 땅이 장지로써 매년 말이죠,

장지로 쓰이고 있는 이런 현실. 그래서 한국은 사람이 사는 택지보다 묘지가 더 큰 나라가 됐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면 한국은 죽은 자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런 상태가 되니까 더 이상

매장하지 말고 화장을 하자. 이런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일어났고, 또 이것이 효과가 있어서

지금은 다른 쪽은 모르겠습니다만 서울 같은 경우에는 50% 이상이 화장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와 있죠. 그러나 옛 장례절차를 한번 좀 간단하게 봐야 됩니다. 워낙 복잡한데.

조금 간단하게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런 절차들을 간단하게 볼 수 있는 게 학생부군신위. 박철수 감독이죠? 학생부군신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요새 아이들 말로 강추입니다. 한번 보실 수 있으면 꼭 한번 보면 좋겠습니다.
이런 절차가 아주 잘 나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일 처음에 사람이 죽으면 고복을 하죠.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망자의 옷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망자의 이름이나 관직명을 대면서

복・복・복, 이렇게 세 번 외치는 겁니다. 돌아오라 이거에요. 저승 가지 말고 이 승으로 돌아오라.

 

혹시 또 그 말 듣고 돌아올까 해서 세 번 그렇게 외치게 됩니다. 다시 이승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아시겠죠. 재미난 것은 바로 사잣상, 사잣밥. 저승사자를 위해서 사잣밥을 차리게 되죠.

여기에는 삼인용의 밥, 술, 돈, 짚신이 있게 됩니다. 일종의 뇌물 같은 거죠. 저승사자가 오셨는데.

잘 대접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 승에 있는 기간을 길게 만들고 이런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재미난 것은 여기에 간장을 놓는다는 거에요.

 

간장. 왜 간장을 놓느냐 보니까. 저승사자가 간장이 물인 줄 알고 먹게 하는 거에요. 그럼 이제

망자를 끌고 저승 가다가 목이 마를 거 아닙니까? 그럼 목이 말라서 다시 자꾸 현세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에요.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현세에 조금이나마 오래 있게 만드는 거에요.

아시겠죠? 이게 무슨 얘기인지. 또 이 현세가 가장 중요시하게 됩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이 현세에 묶어 두려고 하려는 것, 다만 1분이라도 1초라도 더 묵게, 더 여기에 있게 하는 게,

이 세상 사람들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례식 때 보면은 부모가 가기 싫은 저승길을 가게 하는 것도 자식의 죄고. 죄인 행세를 하죠.

죄수복을 입죠. 머리도 다 풀어헤치고, 굴건을 쓰고, 새끼줄로 만든 머리띠를 쓰고 말이죠.

단을 풀고 말이죠. 이런식의 죄수복장을 합니다.참 이런 것들은 저는 동의 못하겠어요.

아니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어느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과정 아닙니까?

그것을 왜 죄로 봐야 됩니까? 그리고 왜 그런 죄인 복장을 해야 됩니까?

전 이런 면은 일단은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많이

개명화됐기 때문에.그다음 시신을 가지고 습을 하죠. 목욕하고 수의를 입히고, 飯含반함의례.

입에다가 물에 불린 쌀을 세 번 넣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동전을 넣는 경우도 있죠.저승 가는 노잣돈이다. 글쎄. 노잣돈이 그거 가지고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넣습니다. 그 다음에 염을 해서 입관을 하고, 병풍 뒤에 놓고

영좌를 앞에 따로 모시게 됩니다. 그때부터 거기에 절을 하고 문상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문상을 하는 게 아니고, 영좌를 모시고 뒤에 시신을 모셔야 문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그다음에 발인이 있죠. 발인. 세 번째 삼일장이면 세 번째 되는 날에 발인을 해서

무덤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난 것은 그 상여소리입니다. 상여소리에 나타난 그 죽음관이

한국인들의 죽음관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거 같습니다. 뭐라고 그러는고 하니 한번 죽으면 저승길이

분명하다. 대궐 같은 집 두고 내길 찾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한번 오기 어려워라. 대궐 같은 집 두고 간답니다.

 

이전에 무슨 대궐 같은 집이 있습니까? 다 초가집이었겠죠. 대부분. 그래도 이승에 있기 때문에

대궐로 본 거에요. 여기 있다는 자체가 대궐인 겁니다. 그리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알지 못하는 길 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뭐 전설의 고향,

전설따라 삼천리 이런대서 보면 항상 어떻게 됩니까?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서 죽은 사람을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갑니다. 여기에 상여 소리도 이렇게 나옵니다.

 

일직사자. 월직사자. 창검 들고 철봉 들고. 안가니까 자꾸 창검이나 철봉으로 내려쳐서 빨리

가게 만드는 겁니다. 이승이 좋은 거죠. 저승도착하면 우두나찰 마두나찰이 달려들어,

소머리 말머리를 한 나찰들이 달려들어서 또 저승으로 끌고 가는 거에요.

이러니 저승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싫겠습니까?

 

사실 상여 놀이에 이런 얘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요. 집안 걱정 말고 옥황님전 극락왕생하라.

이런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만, 이게 주종은 아니고, 가기 싫은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얘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하관의식이 있겠고. 그다음에 굉장히 복잡합니다. 이것도. 반혼.

혼을 집으로 모셔오는 거에요. 이제 집에 있던 여성들이 이때 곡을 또 해야 되고 참 복잡합니다.

그리고 혼을 집으로 모셔온 혼을 집에 있던 영좌에 또 모시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상하죠. 혼을 인정하지 않는 게 유교 가르침인데, 어떻게 또 요번에는 영좌에

모셔가지고 3년 동안 탈상할 때까지 매일 밥상을 차리는 경우도 있고. 혹은 뭐 출필고 반필고 해서

나갈 때 그 영좌에 고하고, 들어와서 고하고. 거의 살아있는 사람대접을 하는 거에요.

어떻든 모순이죠. 영을 존재를 인정 안 했는데, 실제로는 관습적으로는 이렇게 모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탈상이 되면 시묘살이도 하는 경우도 있죠.

효자인 경우에. 움막살이. 움막살이도 공자가 말한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작들이 물어보거든요. 얼마큼 돌아가신 부모님을 모시면 되느냐? 했더니, 공자 얘기가 우리도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3년을 돌봐주지 않았느냐? 해서 그게 시묘살이 3년이 나온 겁니다. 그

것 참~ 대단한 효라고 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사실은 이것은요, 양반들만 했던 겁니다. 농부들이라든가 하인 노비들이

이걸 어떻게 했겠어요? 농사지어야죠. 어떻게 시묘살이를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3년이 지나면 삼오제를 지내서 삼일동안 지내면서 탈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3년째에 상주의 제약에서 벗어나고 움막살이에서 벗어나고. 이때가 돼야 이제 장례가

끝난 거에요. 사실은. 망자는 죽은 자의 질서에 편입이 되고, 살아있는 자는, 자식들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게 바로 장례식의 끝이 되죠.

 

여기 장례식을 굉장히 간단하게 봤습니다만 아주 현세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이렇게 묘지를 정할 때 항상 나오는 게 풍수지리죠. 풍수지리 참 재밌고 좋습니다.

그런데 풍수에는 양택풍수와 음택풍수.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집을 집 자리를 고를 때 하는 풍수와

그다음에 죽은 사람의 집 자리. 묘지죠. 이를 정할 때 하는 풍수가 있는데. 요새는 양택풍수는

아니고 음택풍수만 얘기를 하게 됩니다.양택풍수는 저는 굉장히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택풍수는 조금 고개가 좀 갸웃 둥 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요,

생기를 잃는 겁니다. 이 전통한국인 혹은 중국인, 동북 아시아인에게 땅은 살아있는 것이란

말이죠. 땅에는 일정한 기가 흐르고 있는 거에요. 그 기가 모인 혈에다가 조상의 묘를 쓰면,

그 기가 조상의 뼈를 통해서 자손의 뼈로 오는 거에요. 그게 동기감응이라고 그러거든요.

조상과 우리는 같은 기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감응할 수가 있다. 그래서 발복을 하게

되는 거에요. 복을 발하는 거에요.이런 면이 저는 이제 좀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명당을 찾아서 하는 이유가 뭡니까? 물론 조상에 대한 생각도 있지만, 뭡니까? 조상 덕을 보려는

거죠. 살아있는 사람의 위주가 되는 거에요. 역시 현세적입니다. 이게 물론 풍수에 본령은

아니라 그래요. 풍수하는 사람들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덕 보려고, 자기가

돈 많이 벌고, 높은 관직에 올라가고 이러기 위해서 조상의 묘를 이용하는 거 아니겠느냐?

 

여기서 재미난 거는 제가 직접 들은 얘기인데 어떤 친구가 자꾸 꿈에 할아버지가 나오더라

이거에요. 나와서 춥다춥다.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누구한테 물어보니까, 그것은 할아버지

묘를 잘못 쓴 거다. 파보고 이장을 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했대요.실제로 파보니까

할아버지 묘가 수맥에 걸려서 관이 떠서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이장을 하니까

다음부터 꿈에 안 나타났다. 이런 얘기를 주위에서 많이 듣거든요? 이게 뭡니까?

 

아니 한국 사람들은 죽어서도 저승에 가지 않고 자기 몸을 바로 보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무덤 속에 갇힌 몸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바로 이게 뭡니까? 지극히 현실 중심적인

사고죠. 현세 중심적인 사고. 죽어도 저승으로 가지 않고, 땅속에 묻힌 몸을 자기로 생각하는,

얼마나 현세적입니까? 이런 것들을 미신이다. 이래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믿지를 않는 거 같습니다만,

 

제가 서울대학교 있던 최창조 교수한테 풍수전문가죠? 그이한테 직접들은 얘깁니다 만은 풍수를

미신이라고 공박하는 친구와 한참 토론을 벌였데요. 한참 토론을, 상대는 풍수는 미신적이고

전근대적인고 뭐 계속 비판했던 거에요. 한참 비판을 하더니 마지막에 그거는 다 그렇고,

너 우리 아버지 산소자리 잡아줄 수 있겠니? 이러더라는 거에요. 이게 뭡니까?

 

머리로는 거부하는데 몸은 한국인으로서 자기 몸속에 들어가 있는 정신 속에 들어와 있는

DNA에는 풍수를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전통의 무서운 거에요. 전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그다음에 마지막이 제사입니다. 장례라는 것은 한 번에 끝나지만 제사는 일 년에

몇 차례 하게 되니까, 여기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생사관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제사도 요즘은 제대로 지내는 집안은 거의 못 본 거 같아요.네 단계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몸과 마음을 재계하고 재물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래서 술이나 마늘을 먹지 않고,

또 부인과 동침을 하지 않고, 또 문상을 가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고 약 일주일 동안 오직

그 조상, 신령들만 생각하는 겁니다. 참 오직 조상 신령들만 생각하는 그런 마음. 높은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는 분이 있을까요? 제사지낼 때? 이런 과정을 겪지

않으면 제사라는 게 그게 아마 진정한 제사가 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는 신령을 맞이하는 거죠. 정식 제사가 들어오게 됩니다. 요 부분이 제사에요. 그 신령을

맞이할 때는요, 가장 먼저 향을 피워서 혼을 모십니다.지금 조상의 혼백은 따로 나눠져 있다.

그랬죠? 혼은 하늘에 가서 없어져 있고 백은 땅에 가 있고. 그래서 향을 피워서 향의 연기가

위로 가지 않습니까? 고하는 거에요. 혼을 불러오고. 그다음에 옆에 있는 조그만 종지에 모래를

담고 흙을 담고 담아 놓은 거기다 술을 붓습니다. 이건 백을 불러오는 거라 그래요. 혼과 백을

불러서 결합시키므로 해서 다시 조상들을 전체를 이루게 만드는 겁니다.

사실 이게 제사두요, 굉장히 상징성이 많은, 또 높은 수준의 그런 종교의례입니다.

 

지금 이걸 모르고 지내기 때문에 전부 대충대충 하고 말이에요. 이렇게 하는데,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전한 조상이 나타나게 되면 술을 세 번씩

올리게 되죠. 몇 사람들이 초혼 아혼 종혼 올리고, 축문을 읽고, 그다음에 차려놓은 음식을

들라는 흠향을 간청합니다. 이때 문을 닫고 나가기도 하고, 병풍을 치기도 하고, 엎드려있기도 하죠.

이렇게 되면 시간을 드리는 거에요. 조상들 한테. 사실 여기도 재밌죠. 아니 조상이 혼령이 어떻게

왔다 치더라도 음식을 어떻게 먹습니까? 몸이 없는데. 그런데도 그냥 하는 거에요. 여기도 또

높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사실은. 일견 보기에는 미신적인 것처럼 보이죠. 무슨 조상의 혼령이

와서 어떻게 먹느냐? 그러나 여기 또 유교에서 제시하는 어떤 높은 상징이 있습니다.
여기 이렇게 해서 두 번째 단계가 끝나는 것이고.

 

세 번째 단계는 축관이 원래는다 축관이 있었습니다. 양반집에선 특히. 뭐해라, 이거 해라

이런 식으로. 축관이 조상을 대신해서 조상의 복을 내리게 됩니다. 주로 농사 잘 짓고 장수하라는

덕담 같은 겁니다. 그러면 제관 혼자서 감사의 뜻으로 그 조상에게서 받은 올렸다가 다시 받은

술을 음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축문을 태우면서 조상 신령들과 작별을 합니다.

이게 세 번째 단계고요.

 

네 번째 단계는 이번에는 모든 참석자들이 같이 음복하는 순서가 됩니다. 그리고 거기 나와 있는

가족들만 음복하는 게 아니고요, 원래는 그 음식이나 이 술을 주변의 이웃에 사는 친구나 이웃

들에게도 전달해서 그 복을 나눠야 됩니다. 사실은 여기까지 해야 유교의 제사가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에 이렇게 하는 집이 제가 태어나서 지금 오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이 제사의 순서를 보십시오. 여기서는 조상령의 실제를 확신을 하죠.

 

그런데 기존유교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전해오는 얘기를 들어보면 어떤

선비가 양민집에 가서 제사를 참관하고 탄복을 했던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조상의 혼령이 오니까,

대문을 열어놓기도 하고, 또 오다가 걸린다고 빨랫줄을 치워버리기도 하고 말이죠. 그리고

제사를 지내다가 돌아가신 부모님이 우리 손자들을 못 봤기 때문에 부모님이 보게 하려고

이불 속에 들어가서 부부 관계하는 흉내까지 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양반이

저거야말로 진정한 조상을 위하는 제사다 해서 뉘우치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문제는 아까도 얘기했습니다만 이 조상영이 어디서 오느냐?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제사도 그렇고,

장례도 그렇고, 어떤 때는 조상영이 무덤 앞에 있다고 그랬다가, 거기서 제사를 지내죠. 어떤 때는

신주 앞에 있다. 그러고 일관성이 없어요. 그리고 사대까지는 우리가 다 모시지 않습니까?

각각 각자 이렇게 모시다가. 오대 이후에는 전체조상이 같이 있다가, 제사 때가 되면 혼령이

나타나거든요. 어디서 오느냐 말이죠. 이게. 그들의 공동 합숙소가 있냐 말이에요.

여기에 대한 설명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것은 해석을 하면 항상 유교 제사는 산자가 중심이 돼서 하는 제사에요. 그러니까

조상들을 위하기보다는 조상들을 산자의 질서, 산자의 공동체 속으로 끌어들여서 자식들,

그러니까 아들의 머리에서 되살려가지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거에요. 따라서 이 조상들이

어디가 있다? 무엇을 한다?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살아있는 아들, 종손. 이게 가장

중요하게 되는 거예요.

 

저승에 대한 그런 생각이 없는 거죠. 그런데 이런 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제사라는 것은

간접적인 영생법이다. 물론 아들의 뇌리 속에서 되살아나면서 영생하는 것도 있지만,

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아까 음식을 차려놓고 먹잖아요. 술을 같이 먹고. 이게 뭔고 하면 말이죠.

조상이 먹은 음식이죠? 그것을 내가 먹는 거에요. 이건 뭡니까? 이거는. 조상과 하나가 되는 거죠.
그런데 조상은 누굽니까? 수천 수백 생 이전부터 있었던 생명의 근원이죠.

 

내가 지금 이생에 가능했던 것이 모두 조상들에서 나왔던 거죠. 물질적인 거, 육체, 정신, 문화,

전부 이게 조상들로부터 전수되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이 조상이라는 건 바로 영생의 상징을

말합니다. 음복을 하는 것은 바로 영생의 상징과 하나 됨을 의미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이생에

태어나서 찰나적인 삶을 살고 가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고, 내 생명의 근원인 조상과 하나 됨을

확인하는 의식이 바로 유교의 제사입니다. 이게 바로 종교학적인 해석이고 의미입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바로 이점까지 생각을 하고 좀 더 깊게 해야 되는데, 이런 제사는 제가 본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제가 시제도 참여를 많이 해왔습니다만, 이 문중에 이렇게 깊은 의미를 깨닫고

하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았습니다.그러나 어떻든 간에 사대가 되든, 오대 칠대가 되든,

제사라는 것은 이 산 자들의 중심이 된 종교의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다시 현세가 강조되는 거죠. 한국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샤머니즘에서 현세를 강조하는 것을

각인시켰고, 그다음에 조선 육백 년 동안 다시금 내세를 부정하고 현세만 강조하는 그런

가치관을 부여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병원에서 보는 그런 모습, 무작정 생명을 연명하면서

삶에 집착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가치관에서 나왔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물론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다만 변화하는 속도가 좀 느려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죽음관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이런 것들을

창출해내서 가치 있게 살고, 또 가치 있게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

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기회,

그런 기회가 됐으면 하는 그런 작은 바람입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되고, 따라서 삶을 정비하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가 누구이고,

깨달음이 무엇이고, 불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고,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고,

이런 걸 생각하시면서 천천히 죽음 준비를 하시는 게 그런 기회를, 그런 기회가 마련됐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말씀드리면서 강의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강의 : 최준식(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미국 템플 대학교 종교학 박사로, 현재 한국문화중심 이사장,

국제한국학회 회장, 한국죽음학회 회장,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공동대표, 인간의식연구센터

대표를 역임하고 있으며,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자 : 최준식 가격 : 9,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문의 : 02)735-7173

 

~~~~~~~~~~~~~~~~~~~~~~~~~~~~~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

 

수년간 말기 암 환자를 진료한 한 일본인의사가 천명이 넘는

암 말기 환자들의 죽음을 접하며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지 않았던 것

2. 유산을 어떻게 할까 결정하지 않았던 것

3. 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것

 

4.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았던 것

5. 마음에 남는 연애를 하지 않았던 것

6.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

 

7.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던 것

8. 악행에 손 댄 일

9. 감정에 좌지우지 하며 일생을 보내 버린 것

 

10. 자신을 제일이라고 믿고 살아 온 것

11. 생애 마지막에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것

12.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마워요'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

 

13. 가고 싶은 장소를 여행하지 않았던 것

14. 고향에 찾아가지 않았던 것

15. 취미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던 것

 

16.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것

17.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았던 것

18.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던 것

 

19. 아이를 결혼시키지 않았던 것

20. 죽음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것

21. 남겨진 시간을 소중히 보내지 않았던 것

 

22. 자신이 산 증거를 남기지 않았던 것

23. 종교를 몰랐던 것

24.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

25. 담배를 끊지 않았던 것

 

대부분 다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들입니다.후회란 보통 두 가지입니다.

한 일에 대한 후회와 안한 일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훨씬 크다는 것을 조금 전 사례에서 보면 알수 있습니다.

 

한 일에 후회는 상대적으로 짧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한일에 대한 것은 ‘경험’이라는

소중한자원이 남습니다. 그러나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정말 후회막급 한 일로

계속 남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해 보고 욕먹는 게 안해 보고 욕먹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죽음이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죽을 것인가  (0) 2020.06.20
삶 뒤에 또 삶  (0) 2020.06.14
완전한 자유  (0) 2020.05.31
삶과 죽음의 기로(岐路)   (0) 2020.05.17
초월적 실체   (0) 20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