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말 할 수 없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황령산산지기 2020. 6. 14. 05:48

꿈을 꾸었다. 운명에 대한 것이다. 이상행동을 하는 것에 대하여 운명론적으로 본 것이다. 꿈속에서 본 것에 대해 수긍했다. 상징에 대한 것이 들어 맞았기 때문이다. 이런 꿈은 드물다.

 

대부분 꿈은 엇박자가 난다. 나의 생각과 들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의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때 또 다른 무의식 세계의 표현일 것이다. 선잠을 잤을 때 그렇다. 그러나 수면의 질이 좋았을 때는 꿈의 질도 좋다.

 

한때 꿈을 분석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이전의 일이다. 칼 구스타프 융의 꿈의 분석을 보고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이부영 교수가 지은 융과 관련된 3부작을 여러 번 읽었다.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리고 자기와 자기실현에 대한 것이다. 주로 무의식에 대한 것이다. 집단무의식, 원형,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리고 자기에 대한 것이 키워드이다.

 

지금은 꿈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았을 때 꾸는 꿈은 그저 무의식의 발현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꿈은 상징이라고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켜켜이 쌓인 무의식이 불쑥불쑥 튀어나온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안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꿈은 기억에 남는 것도 있다.

 

유년기때 꾼 꿈이 있다. 놀랍게도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꿈이다. 또한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단어가 떠 오르기도 했다. 바닥은 시멘트로 된 풀장이 있었다. 이를 ‘물마중’간다고 했다. 유년기 시절 같은 또래의 아이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물마중이라 하여 웅덩이와 같은 풀장에서 논 기억에 대한 것이다. 그때 당시 시골에서 그런 시설은 없었고 물마중이라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음에도 또렸했다. 꿈을 꾼 것인지,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꿈을 나중에 기억속에서 재구성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꿈속에서는 의식하지 못한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꿈속에서는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곳을 가 보기도 한다. 그것도 여러 번 가 본 것이다. 유년시절 또는 초등학교 시절 꾼 꿈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생의 흔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꿈속에서의 본 것은 현실세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모두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꿈을 꾸면 놀랍게도 꿈속의 나와 꿈속에서 세상을 아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꿈꾸는 자가 아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은 종종 “꿈깨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세상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꿈은 무의식의 발현으로 본다. 무의식은 어쩌면 전생의 흔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여러 장면이나 상징들을 보면 인간은 물질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무의식의 세계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정신적 존재임에 틀림없다. 동물과 달리 사유하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몸이 무너지면, 몸에서 파생된 정신도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적 견해는 잘못되었다고 본다.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면

 

무신론자들이 있다. ‘리차드 도킨슨’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과학적 사실을 들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단멸론’에 가깝다. 내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고 귀로 들은 것만 믿겠다는 발상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지옥도 없고 천국도 없다. 단지 지금 살아 있을 때 감각을 믿는 것이다.

 

무신론자들도 꿈을 꿀 것이다. 물질을 탐구하는 과학자들도 꿈을 꿀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한번도 본적도 없고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신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전개 되는 사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일까? 만일 정신적 현상을 애써 무시한다면 유물론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과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유물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을 탐구한다는 것은 물질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내생이나 윤회를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말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한말이다. 자신의 감각으로 인식한 것 이외 것을 인식한다면 망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헛소리’라고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A4.77)이 있다. 일반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라고 했다. 네 가지가 있다. 부처의 경계, 선정의 경계, 행위의 과보, 세상에 대한 사변에 대한 것이다. 먼저 부처의 경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부처님들의 부처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

 

 

부처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가 되지 않으면 부처의 경지를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일체지자로서의 지혜와 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되지 않는 한 그 경지를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부처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라며 알고자 한다면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선정의 경계’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선정의 경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선정자들의 선정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선정의 경지에 들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에서는 “선정의 경계는 곧바른 앎을 통한 선정의 경계를 말한다.”(Mrp.III.109)라고 했다. 여기서 곧바른 앎(abhiñña)은 신통에 대한 것이다. 네 번째 선정 단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숙명통, 천안통 등 육신통으로 설명되어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초월적인 내용이 많다. 그 중에는 신통에 대한 것도 있다. 이와 같은 초월적 내용이나 신통을 보고서 초기경전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대에 편집했거나 허위로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초월적 이야기나 신통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빼 버리고 오로지 수행과 관련된 것만 믿는 사람들도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회의하는 자들이 있다. 특히 신통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는 “신통을 보여주어 봐, 그러면 믿을 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 외에는 믿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통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통에 회의하는 사람들은 선정의 경지에 회의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통이 거짓이라고 말한다면 구업을 짓게 된다. 신통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선정수행을 해서 네 번째 선정단계에서 체험해 보십시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체험하지 않고 자신의 깜냥(感量)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믿을 수 없게 된다. 설령 부처님의 말씀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후대 이런 일을 예상해서일까 부처님은 “선정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말한 것 같다.

 

세번째는 ‘업과 업보’에 대한 것이다. 불교인들은 업과 업보를 믿고 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름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업이 언제 익을지 알 수 없다. 언제 업보를 받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무지한 자들은 부처님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간주하여 업보를 면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업보는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이 받는 것이다. 그런 업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사변’에 대한 것이다. 세상의 사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누가 달과 해를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을 말한다. 마치 “세상은 유한한가?”등의 열 가지 세속철학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의문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사변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함부로 설할 수 없는 것 네 가지

 

경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처의 경지, 선정의 경지, 업의 과보, 세상의 사변에 대하여 말한다. 모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면 어떻게 될까? 이를 ‘망상’이라고 한다. 말로 하면 ‘헛소리’가 된다. 그 경지에 올라선 자만이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다.

 

깨달은 자는 범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범부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이는 청정도론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Vism.13.110)라는 말에 근거한다. 그래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초기경전에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여 내친다면 대단히 경솔한 것이다. 그 경지에 올라서지 않는 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진리, 뭇삶, 결생, 조건의 유형의 네 가지 사실은 보기도 어렵고 설하기도 극히 어렵다.”(Vism.17.25)라고 했다.

 

함부로 설할 수 없는 것이 네 가지 있다고 했다. 진리(sacca), 뭇삶(satta), 결생(paṭisandhi), 조건(paccaya)를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은 매우 심오하다고 했다. 그래서 성전을 통달한자가 아니면 설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또는 경지에 올라선 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깜냥으로 부정하거나 회의한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깜냥을 넘어선 것에 대하여 말하면 어떤 소리를 들을까? 아마 헛소리가 될 것이다. 자신의 인식을 넘어선 것에 대하여 말한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미친 자의 넋두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을 것이다.

 

정통성에 대한 법문

 

진리, 뭇삶, 결생, 조건은 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누군가 자신의 깜냥으로 떠들어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경전을 외면하지 않고, 계율에 수순하고, 위대한 정통성을 살피고”(Vism.17.2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에 따른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벗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 앞에서 듣고 세존 앞에서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A4.180, D16.98)

 

 

이는 정통성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부처님에게 들었다면서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말했을 때 긍정도 부정도 말라고 했다. 조용히 경장과 율장에 있는 가르침과 맞는지 대조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맞으면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내쳐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입맛대로 재해석하는 사람들

 

오늘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기경전을 자신이 해석해 보니 부처님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알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논장을 모두 부정한다. 심지어 경장에 있는 가르침을 잘못 번역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번역한 것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L교수가 번역했다는 디가니까야이다.

 

H스님이 분개한 듯했다. L교수의 자의적 번역에 대해 “OOO교수는 이런 엉터리 번역을 하고 있네요. 자신의 생각에 빠지면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부처님 법마저 허무는 짓을 하는 군요.”라며 개인 카톡을 보내왔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디가니까야 ‘인연의 큰 경’(D15)에서 ‘식’에 대한 것이다. L교수는 자신이 낸 책에서 “식이라는 모태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명색이 모태에서 강화될 수 있겠느냐?”(D15.21)라고 자의적으로 번역했다. 이런 번역에 대하여 L교수는 주석에서는 기존의 번역이 태생학적 번역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유식학적 번역을 했는데 이는 “아뢰야식은 식을 모태로 보는 이러한 관점이 발전한 것”(73번 각주)이라고 했다.

 

L교수는 부처님의 설한 근본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재해석 했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인 주석과 충돌이 일어났다. 그래서일까 유튜브 강연을 보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가 엉터리라고 비난했다. 그렇게 비난해야 자신의 이론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다.

 

의심이 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해당 부분과 관련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을 보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는데, 만약 의식이 모태에 들지 않더라도 명색이 응결될 있겠는가?”(D15.21)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직역이다. 그리고 삼세양중인과에 따른 번역이다. 대부분 주석이 이를 따르고 있다.

 

L교수는 모든 것을 인식된 것으로 보아 유식론적으로 해석했다. 대승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경전도 왜곡 번역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승의 말이라고 해도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A4.180)라고 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에서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서 말하면 망상이 되고 헛소리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나서, 보여진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보여질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보는 자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A4.24)라고 했다. 이는 부처의 경지를 말한다. 이런 태도는 시각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청각, 감지, 의식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부처의 경지와 범부의 경지는 다르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것이다. 깜냥도 되지 않은 자들이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 했을 때 엉뚱한 길로 가게 된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먼 자의 뒤를 역시 선천적으로 눈먼자들이 따라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여래는 보여지고, 들려지고, 감지되고, 의식된 것들에 대하여 언제나 여여한 님이다. 그것과는 다른 더 높거나 더 수승한 님은 없다고 나는 말한다.”(A4.24)라고 했다. 부처님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여진 것이든, 들려진 것이든, 감지된 것이든,

어떠한 것이든 진리라고 생각하여 탐착한다.

그들 스스로 확신하는 자들 가운데서

그것이 진리인가 거짓인가 여여한 님은 상관하지 않으니

 

뭇삶들이 탐착하여 얽혀 있는

이러한 화살을 나는 당시에 보았으니,

이처럼 나는 알고 또한 본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그러한 탐착이 없네.”(A4.24)

 

 

말 할 수 없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

 

오늘 아침 꿈을 꾸었다. 숙면을 취하고 나서 꾼 꿈이어서인지 심오했다. 무언가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꿈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내 그만 두었다. 꿈은 꿈일 뿐 꿈 이상의 것에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는 꿈에서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융의 분석심리학을 보고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체계적이어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이론이다. 특히 자기를 찾는 여행은 불교에서 말하는 구도여행과 비슷한 것이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는 것이 자기를 계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꿈을 해석하여 무의식의 메시지를 분석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단지 꿈의 분석만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꿈을 분석하려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려는 것과 같다. 이는 부처의 경지, 선정의 경지, 업보, 세상의 사변에 대하여 자신의 깜냥으로 파악하려는 것과 같다.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벗어난 것에 대하여 사유하려는 것과 같다. 그럴경우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또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꿈이 심오하고 신비롭다고 해도 꿈은 꿈일 뿐이다. 꿈에서 무언가 해법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경전에서 찾아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하면 헛소리가 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면 미쳐 버리게 된다.

 

 

2020-06-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