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관한 판타지/김문억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밤 나는 까까머리에 까막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너는 단발머리 환한 소녀였지.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이웃집에 고사떡을 돌리던 밤이었어.
사각사각 내 뒤를 밟으면서 누군가가 따라오는 기미가 있어
돌아봤을 때 너는 환하면서도 도도할 만큼 창백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어.
너는 훨씬 전부터 나를 따라 다녔겠지만 내가 너를 만난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었어.
멍석귀신이 나온다는 산모롱이를 지나칠 때는 마른 참나무 잎에서 선잠 깨는 바람소리가 바스락거리고 있었지.
두려움에 내가 뛰어가면 너도 같이 뛰어서 오고 가던 길 멈추고 서서 너를 올려다보면 너도 가만 서서 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지.
깊은 겨울 밤 논두렁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초면이면서도 오랜 친구같이 부끄럼 없이 서로 빤하게 쳐다보고 있었어. 너무 따듯했어 네가. 그 날 밤에 비로소 처음 네가 나를 따라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은근함과 설렘 같은 것이 내 가슴 가득하게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 잠자리만 바라봐도 현기증이 나던 어린 시절이었어. 너는 내 가슴 한가득 박하 향 같이 화하게 다가왔어.
사실 그것은 어쩌면 막연한 것이었는지도 몰라. 그냥 흠모하고 연민하던 것.
때때로 너를 잊고 있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나던 반가움 같은 것이었지.
그것이 평생을 두고 이렇게 깊은 정을 나누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지.
너무 멀리 있기도 하고 너무 높기도 한 너를 남루한 내가 올려다본다는 일이 과분하면서 고개 아픈 일이었어.
그 때 우리는 옴팍 들어간 삼태기 마을 끝 동네에서 함께 자랐지.
너는 산 넘어 어느 오두막집에 혼자 살거나 아니면 몸져누운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효녀인 줄로만 알고 있었어.
그냥 막연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은 너의 애잔한 모습에서 어떤 그림자 같은 슬픔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지.
우리가 사춘기로 드는 동안 너는 초저녁부터 화장을 하다가 누구에게 들켰는지
입술을 절반만 그려 놓고 지우지도 못한 채 달아나는가 하면 목마른 뭇 사내들이 훔쳐보는 줄도 모르고 초경을 치르다가 들킨 지지배 같이 뒷문으로 숨기도 했었지.
그런 날 밤이면 죄 지은 것도 없는 내가 죄 지은 것같이 가슴이 방망이질 쳤고, 아리아리 눈 아픈 밤을 지새워야 했단다.
그런 밤이면 소리를 궁굴려서 속으로 가만 ‘달하’ 불러보다가 화들짝 놀라기도 했어.
행복했던 시절이었지. 어찌해야 네가 내게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
대답 없는 너를 부르다가 높은 성벽 위에 초막 하나를 짓고 피리를 불고 싶었어.
애지게 피리를 불면 돌담도 흐느끼다가 금이라도 갈 것 같은 밤.
은장도 꺼내들고 통곡이라도 할 것 같은 너를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너는 항상 달아나고 있었어. 무정했어.
폭설이 지나간 뒤 북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겨울밤이면 너의 그 환하고도 벅찬 얼굴은 고독한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지.
장엄하게 쏟아 붓는 폭포수의 열창이었다가 이내 부드러운 음율로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몇 악장의 소나타였지.
나만을 위한 월광곡을 들으면서 밤이 깊도록 겨울달맞이꽃으로 피어났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구나.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얼음장같이 차갑다가 어느 날은 내 누이같이 따뜻했던 네가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때는 나 또한 힘들지 않고 너를 놓아 줄 수가 있었다. 너를 믿었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나는 키가 크고 너는 점점 밝고 환한 얼굴로 피어났었지.
내가 나이를 먹고 커가는 만큼 너도 나와 같이 나이를 먹고 숫기가 들기 시작했어.
소년이 청년이 되어가면서 소녀가 처녀가 되고 있었어.
우리는 조금씩 세상 가운데로 밀려 나가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분주해지기 시작했어.
어느 해던가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지.
새삼 내가 너에게 다시 빌어야 할 소원은 없지마는 문득 너의 환한 얼굴이 그리웠고 너의 미소가 보고 싶었지.
이제는 귀머거리 코머거리가 되고 이목구비도 없는 미인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어슬렁거리면서 동산에 올라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하늘님 무남독녀로 만인의 연인이라는 너.
기다리는 내 앞에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어. 지지배! 내가 이렇게 합장을 하고 기다리는 줄 왜 모를까.
그 날은 네가 쉬는 날이거나 아니면 분화장이 늦었던지 아무튼 약속시간에 나오지 않았어.
기다리다가 지친 나는 몰려드는 구름을 향해 궁시렁거리면서 언덕을 내려왔지.
늦은 귀밝이술 한 잔 하고 나오는데 구름밭을 써레질 하며 훨훨 날아가고 있는 댕기머리 너를 보았어.
아! 우리의 세월도 그렇게 기다리는 마음을 속이면서 눈과 눈 사이로 어느 결에 흘러가고 있었어.
세상을 던져놓고 주유천하 떠돌면서 얼마나 달관을 했으면 이목구비도 없는 미인이 되었을까.
아니면 뭇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짝사랑을 하며 바라봤으면 네 얼굴이 그렇게 닳았을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처연한 청맹과니 창백한 네 자태에 혼맹을 빼앗기는 내가 너무 행복했었지.
그러다가 나는 고향을 떠나왔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산골짜기를 나오던 날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오히려 나는 너를 원망하고 있었구나.
너를 두고 떠나야 했던 나는 오히려 네가 내 곁을 떠나고 있다는 투정으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단다.
그것 또한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면 얼마나 서툴고 엉터리란 말이냐
가지 마 안 그럴게 다시는 안 그럴게
돌아와 이제 그만 속 시원히 말이나 해 봐
말할 듯 말할 듯 입 한 번 떼지 않고
눈물 그렁그렁 울먹이며 가는 달하
차라리 속 시원하게 통곡이나 하든지
무엇이 그리 야속하여 싸늘하게 토라졌느냐
맨발로 첨벙첨벙 시린 강물을 질러
갈대밭 서걱서걱 뚝뚝 분질러 놓고
그렇게 훨훨 속절없이 가고나면
너 없는 텅 빈 하늘을 나 혼자서 어쩌라구
너는 죄 없어 소복을 그만 벗어
애처롭게 포르라니 삭발까지 할 줄이야
어느 절간에 앉아 목탁을 치겠느냐
이렇게 그냥 가면 우리 인연 끝이 아니냐
차라리 아주 갈 거면 뒤돌아보지나 말든지
나는 지금 부치지 못한 이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가면서 울먹이고 있단다. 서러운 것이 아니란다.
완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세월에 밀려 내가 자꾸만 네 앞에서 작아지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구나.
우리의 평생 인연이 그리움이라든가 사랑 같은 꿀맛만은 아니란 것을 내가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나도 너처럼 세상살이가 초하루 보름같이 들고 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그로부터 너는 나에게 있어 어느 날은 웃음이었고 어느 날은 울음이었지 어느 날은 행복이었고 어느 날은 쓸쓸했었어.
구름숲을 헤치고 빌딩숲을 건너뛰면서 달아나는 때는 내 일과도 결재하지 못한 일들이 수북하게 쌓여왔지.
차고 이우는 것이 어찌 너 뿐이겠느냐.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문패에 못 치는 일 없이 하늘과 땅과 빛으로 배부름을 감사했지.
깊은 겨울밤눈밭에서 처음 만났던 그 눈빛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어느 날 나는 이런 한탄을 하고 있었구나.
달을 손에 들고 달을 베어 먹으면서
쓴맛에 울기도 하고
단맛에 웃기도 한다
세월을 반죽하면서
달 하나를 또 만들면서
달이 세월을 베어 먹으면서
만월로 차츰 배불러 오면
세월이 또 달을 끌고 서西으로 가며 베어 먹네
어차피
차고 이울면서
울고 웃고
그러면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산골짜기 고향을 떠나서 서울이라는 대처로 이사를 한 뒤로 한동안 우리는 만날 수가 없었구나.
서울은 빌딩 숲이 너무 빽빽하게 우거져서 우리는 오래도록 만날 수가 없었던 거야.
도시는 오솔길이 없는 빌딩의 정글이었지.
닭 우는 소리 개 짓는 소리는 물론 새소리 애기 우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았어.
정글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하는 고통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가 없었던 거지.
너 없는 밤은 어둡고 오래도록 구름이었어.
서울은 하늘이 없었고 별이 없는 어두운 세월이었어. 땅만 바라보면서 무엇을 찾기만 했던 나를 용서해 다오.
달하! 아,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장가를 가고 아들딸을 낳고 야간근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밤
동대문 용마루에 올라서서 빠끔하게 나를 훔쳐보고 있는 너를 보았어.
서울에는 떡 돌리는 소년이 없었던지 까치발을 하고 목을 길게 빼면서 너는 이 골목 저 골목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지.
나는 거뭇거뭇 수염이 나고 나이 들어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마주친 너는 그 옛날 그 얼굴 그대로였어.
얼마만인가 이게. 대체 너는 어디서 왔기에 속을 그리 텅텅 비우고도 만월이 되어 시공을 뛰어 넘고 있는 거냐.
어린 시절에 아무도 없는 논두렁에서 처음 만난 뒤로 언제나 같이 다니던 네가
동대문 지붕 위에 혼자 서 있는 것을 보고 난 너무 반갑고도 미안했어.
네가 있는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았어. 사람이 얼마나 더 죽고 죽어야만
자연을 배반하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지. 나는 그 동안 키만 크고 가슴이 크지 못했구나.
내가 다시 산 좋고 물 맑은 도봉 아래로 이사를 한 뒤에도 거기까지 네가 나를 따라 이사를 할 줄은 까마득 몰랐어.
나를 따라서 수락산에 다시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초이레 이른 밤이거나 열이레 늦은 밤이거나
인기척만 느끼면 사립문을 밀치고 나오던 너.
초승이나 그믐이나 이른 저녁 늦은 밤에 징검다리를 징검징검 건너와서 넘어질라
내 손을 잡으며 깡종깡종 따라다니던 중랑천은 우리의 무대였지.
내가 북채를 쥐고 고수장단을 메기면 쑥대머리 귀신 형용 헝클어진 머리 하며
희부연 달무리를 형틀 삼아 목에 걸고 절개를 지키는 춘향전의 판소리 한 대목으로 우리의 밤은 깊어갔지.
이제는 세월이 많이 갔어.
너는 늘 그대로인데 나 혼자만 늙고 있는 것 같아 쓸쓸할 때도 많아.
너를 보면 들려오던 개구리 울음소리도 송아지 어미 찾는 소리도 이제는 아득한 얘기가 되어가는 황혼
길에서 내 뒷모습이 처량했느냐 아니면 평생을 두고 말로는 할 수 없는 무슨 이야기가 남아 있었느냐.
난생 처음으로 오늘 밤 늦은 시간까지 나를 기다리며 술 한상을 차렸구나.
그래 입 한 번 떼어 보거라, 겸상 한 번 해 보겠네 한량없이 예쁜 달하!
술을 건너뛰고 집으로 오는 늦은 밤에
발그레한 입술 요염한 자태의 하현달이
서녘하늘 깊은 골방에 술 한 상 차려 놓고
무릎에 턱 괴고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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