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고구려 평양은 한반도 평양이 아니다

황령산산지기 2020. 1. 26. 13:04


우리 역사에서 ‘평양’은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현 역사교과서에서 평양은 고조선의 건국 중심지, 위만조선의 중심지, 한사군의 낙랑군, 고구려 때의 수도, 고려 때 북방을 총괄하던 ‘서경(西京)’, 조선시대 북방을 총괄하던 거점도시로 나온다. 그리고 한·중 여러 기록에서 중국과의 국경도 평양을 기점으로 설정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1925년 동아일보에 쓴 ‘패수고(考)’에서 ‘조선사를 말하려면 평양부터 알아야 한다’면서 ‘지금의 평안도 평양을 옛 평양으로 알면 잘못 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 교과서에서는 단재가 잘못이라고 지적한 대로 옛 평양을 모두 현재의 평안도 평양이라고 확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마침 최근 이렇게 된 배경과 바른 평양의 위치에 대한 연구가 나왔다. 간단히 산책해 본다.


교과서의 내용 중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이 평안도 평양이 아닌 중국 하북성 난하와 요하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30여 년 전 윤내현, 김종서 등이 밝혀놓았으나 아직도 교과서는 바뀌지 않고 있다.

교과서의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 아래 임찬경, 복기대, 지배선, 윤한택 등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여러 학자들은 연구 결과 고구려 때 여러 번 수도가 되었던 평양과 고려 때의 서경인 평양이 현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는 것을 『고구려의 평양과 그 여운』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이 책에 따르면, 고구려 평양성과 한사군의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이라는 주장은 7세기의 『주서』 『수서』 『북사』등의 중국 정사에는 고구려의 평양성과 낙랑군을 연결시키는 내용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945년에 편찬된 『구당서』가 처음으로 이런 왜곡을 했고, 1060년의 『신당서』가 그대로 인용했다.

그런데 1145년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이를 그대로 따라서 장수왕이 427년 천도한 평양성을 현재의 북한 평양으로 추정했고, 『동사강목』과 『아방강역고』 등 조선시대의 사대사관에서 여기에다 기자까지 연결시켰다.

일제가 조선침략을 적극 추진하던 1892년, 하야시 다이스케가 『조선사』에서 이를 그대로 수용했고, 1910년 일제가 우리 국토를 강점한 후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보태 이를 더욱 굳혔다. 그 후 이병도가 1923~2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사개강’에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책으로도 이를 발표함으로써 현재의 교과서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488년 최부가 제주도 근무 중 배를 타고 이동 중 풍랑을 만나 중국 절강성에 표류했다가 중국 연안을 따라 귀국하는 과정을 기술한 『표해록』과 조선중기 이후 압록강과 요하를 건너 북경을 다녀온 조선의 사신들이 고구려의 역사 현장을 거치면서 남긴 550여권의 연행록에는 고구려의 도읍이 요동 또는 구체적으로 요양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그들은 그 근거로 『한서지리지』 『대명일통지』 『성경통지』 『대청일통지』 등 중국 기록을 제시해서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삼국유사에서는 ‘요하의 북쪽’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나도 역사학자지만 그 분야 연구를 하지 않아 사실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이와 같이 근거기록들이 많이 있다면, 교과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고대 평양의 위치 인식은 너무도 명백한 오류로 보인다. 그런데도 그간 그런 자료들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잘못된 사대 및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해온 우리 역사학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이병도 등 선배들의 주장을 비판하지 않는 강단학계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단재가 1925년에 지적한 내용을 지금까지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고, 국민 역사교재인 교과서에 그대로 실고 있는 것은 반민족적 직무유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반민족 범죄는 이제 국민들이 나서서 다스려야 한다.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