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주의가 있다. 에피쿠르스철학을 말한다. 그런데 최근 유튜브에서 본 ‘5분 뚝딱 철학’에 따르면 ‘힐링철학’에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쾌락주의라 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힐링철학이라는 것이다. 왜 힐링이라고 했을까?
에피쿠로스의 행복론
‘5분 뚝딱 철학’을 진행하는 김필영선생에 따르면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에피쿠로스철학이라고 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힐링철학이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힐링은 치유를 말한다. 경쟁사회에서 지친 현대인에게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먼저 행복의 개념에 대한 설명이 있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기는 알렉산더제국시절이다. 대제국으로 인하여 세계화가 되었는데 오늘날 글로벌화 된 세상과 유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능력이 없으면 먹고 살기 힘들고, 스펙이 없으면 취직도 안되는 시대를 말한다. 또 무능력자는 결혼할 기회조차 오지 않는 시대이다. 이때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아무 희망도 없었고 절망적이었다.
에피쿠로스는 대안공동체를 만들었다. 정원이라는 대안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여기서 자기네들끼리 생활한 것이다. 이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힐링이었다. 경쟁사회에 지친 자들, 소외된 자들, 무능력 자들에게 치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힐링을 통한 행복을 원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감정을 두 가지로 보았다. 그것은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쾌락과 고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 즐거움, 쾌락은 선(善: Good)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대치를 낮추어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행복지수공식이라고 볼 수 있다.
행복지수공식
에피쿠로스는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싶은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이 분자이고, 가지고 싶은 것은 분모이다. 수학에서 분자보다 분모가 크면 클수록 값은 적어진다.
지금 전재산이 천만원인 사람이 있다. 그는 재산이 적어서 늘 불만이다. 그에게 있어서 1억원은 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지수는 10%에 지나지 않는다.
재산이 1억원인 사람이 있다. 그는 10억원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지수 역시 10%에 불과하다. 이렇게 가진 것 보다 늘 가지고 싶은 것이 많다면 천만금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Dhp.186)라고 했다.
하늘에서 황금비가 내려도 기대치가 높은 사람은 만족해하지 않는다. 부자는 큰 부자가 되고 싶고, 큰 부자는 재벌이 되고 싶은 것은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지수 공식에 대입하면 아무리 큰 부자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돈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명예와 권력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국회의원이 꿈인 사람은 미래를 위하여 차근차근 준비할 것이다. 시의원, 구의원, 시장 순으로 올라가지만 국회의원 되는 것이 꿈이라면 결코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다.
사원으로 입사하여 대리, 과장, 부장으로 올라 가지만 이사가 꿈인 사람에게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경우이든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기대하는 것이 더 많다면 행복지수는 낮아지게 마련이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돈과 명예, 권력 등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럴경우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집착하면 할수록 괴로워진다. 이럴 때 포기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만원 가진 자가 천만원에 만족한다면 행복도는 100%가 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라고 했다. 어떤 것이든지 현재의 조건에 만족한다면 행복한 것이다.
무소유와 미니멀니즘
에피쿠로스 정원공동체에서는 빵과 물만 먹었다고 한다. 치즈가 있었지만 일부러 먹지 않았다고 한다. 가끔 먹었다고 한다. 자주 먹으면 맛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일종의 정신적 행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나는 빵과 물만 있으면 신도 부럽지 않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행복공식을 보면 요즘 말하면 무소유나 미니멀니즘과 유사한 것이다. 어쩌면 원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욕지족에 따른 행복론은 초기경전 도처에서도 볼 수 있다.
소욕지족과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만족의 경’에 따르면 옷, 탁발음식 등 사대필수품에 대하여 “이러한 하잘 것 없어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삶의 고리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A4.27)라 되어 있다.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수행자는 사대필수품에 만족하며 살아 간다. 그것은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남이 비난할 수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마음의 고뇌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무소유와 미니멀라이프 원조는 초기불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는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시대 보다 더 앞선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에피쿠로스의 정원공동체의 삶을 보면 불교의 상가공동체의 삶이 연상된다. 무소유와 미니멀라이프를 특징으로 한 것에서 있어서는 공통점이 있다. 욕망을 최소로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점에서도 일치된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인생관이다.
욕심만 버린다고 다는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한번 태어 났으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무언가 이루어야할 사명감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생은 본래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인간은 단지 원자들의 이합집산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흩어지면 끝나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유물론적 관점과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 사명감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행복하면 다다.’이렇게 보는 것이다.
인생이 목적도 의미도 사명감도 없는 것이라면 심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에피쿠로스의 정원공동체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고 한다.
여러 군데 정원공동체가 있었는데 약 40만명이 모여서 살았다고 한다. 공동체 안에는 노예도 있고 심지어 매춘부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수근대기 시작했는데 정원공동체에 들어가면 매일 먹고 마시고 놀고 밤마다 여자들과 파티한다는 소문이 나돈 것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고 쾌락으로 보내지만 한가지 남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죽움에 대한 공포이다. 비록 에피크로스 학파가 인간에 대하여 원자들의 집합이라 하며 죽으면 모두 흩어지고 말 것이라고 했지만 죽음의 공포는 여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을까?
에피크로스는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죽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에피크로스의 쾌락주의는 다섯 가지에서 해방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질적 고통도 없고, 정신적 고통도 없고, 심심하지도 않고, 죽음의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것이다. 욕망의 세계에서 욕망을 내려 놓음으로 인하여 행복해 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소욕지족의 삶의 방식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단멸론에 가깝다. 그것은 원자론에 따라 이합집산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으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은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고 말하면서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간다.”(S24.5)고 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5)라고 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에 바탕을 둔 단멸론자라고 볼 수 있다.
행위와 행위의 과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힐링이라고 했다. 그것은 무소유와 미니멀라이프로 설명된다.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정원공동체에서 사는 소욕지족의 삶을 말한다. 이런 삶은 불교에서의 상가공동체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유물론에 따른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부처님당시에 볼 수 있었던 아지따 께싸깜발린과 같은 외도스승의 견해와 매우 유사하다. 더구나 정원공동체가 확장됨에 따라 노예를 두고 심지어 매춘부까지 있었다고 하니 문자 그대로 쾌락주의로 흘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유물론적이고 단멸론적 견해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도 무소유와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한다. 이는 다름 아닌 소욕지족의 삶이다. 외도와 다른 것은 청정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와 행위의 과보로 설명된다. 행위에 대한 청정을 요구하는 삶이 외도와 다른 것이다.
2019-10-23
담마다사 이병욱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각적 욕망에 눈이 먼 한량에게, 영화 ‘엑스 마키나’를 보고 (0) | 2019.11.03 |
---|---|
방하착(放下着) 그 마음을 놓아라 (0) | 2019.10.27 |
육식동물의 굴굴욕과 초식동물의 위엄 (0) | 2019.09.28 |
선재동자 (0) | 2019.09.21 |
악마는 내 마음 속에도 (0) | 2019.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