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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말했다 “일본인은 12세 소년”|

황령산산지기 2019. 8. 25. 12:17



모두사랑해

      





맥아더가 말했다
“일본인은 12세 소년”

맥아더가 군국 전쟁광 해방시켰건만…


글/ 이원홍(전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일공사, KBS 사장, 문화공보부장관 역임)

일본, 국가최고종신국빈 법안철회

감정을 상한 일본정부가 맥아더 원수를 국가최고종신국빈(國家最高終身國賓)으로 추대한다는 법안을 철회하는 등 보복적인 조치로 대응하기 시작하자 여론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아사히신문 단평칼럼 천성인어(天聲人語)도 거들고 나섰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점점 좋아지면 미국 사람들도 일본의 국빈이 되는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기겠지만 ‘저 따위가 나라의 국빈이 되어서야’ 달갑지 않는 친절이 되지 않게 하여야한다. 나라가 비록 적어도 질적으로 세계의 일등국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웃 사람에게 업혀 사는 신세에 등에 업힌 사람이 업어주는 사람을 향해 ‘당신을 나의 빈객으로 모세겠습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 맥아더 원수는 미국의회 증언에서 ‘일본인은 승자(勝者)에게 아첨하고 패자(敗者)를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든가,


 ‘일본인은 현대문명의 표준에서 보아 아직 12세 소년이다’고 말하고 있다. 원수는 일본인에게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아직 성인의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인 것 같다.”


맥아더 원수의 증언은 일본통치에서 겪은 그의 체험적 일본인론(日本人論)이라 생각한다. 거두절미하면 핵심사항이 잘 부각되기는 하겠지만 총체적인 이해가 부실해질 수 있다. “12세 소년” 같은 자극성이 강한 발언은 너무 단순화하면 감정을 촉발하는 욕지거리로 바뀌게 된다.

맥 장군 해임문서속의 청문회 증언록

실제로 일본사람들은 “12세 소년”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배신적인 욕지거리”로 몰아갔다. 증언록에 기재된 문단의 전체를 읽어보시면 일본인이 12세 소년의 수준이라는 맥아더 사령관의 진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독일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일본문제와 다릅니다. 독일은 성숙한 인종입니다. 만약 앵글로색슨이 과학과 예술과 종교와 문화의 면에서 보아 인간의 연령을 45세 정도라 한다면 독일인도 비슷한 정도로 성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시간적으로는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사람이지만 지도(指導)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근대문명(近代文明)의 척도로 본다면 우리들이 45세정도의 성숙한 연령인데, 일본인을 비교해서 말한다면, 12세 소년이라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지도받는 시기라는 것은, 어디서나 그렇습니다마는, 일본인은 새로운 규범(規範)과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방법을 받아들이는 데는 쉬웠습니다. 일본에게 기본적인 생각을 심어줄 수는 있습니다. 일본인은 유연(柔軟)하여 새로운 생각을 하는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백지상태(白紙狀態)에 가까웠습니다.


독일인은 우리들과 같은 정도로 성숙해 있었습니다. 독일인이 현대의 도덕(道德)에 태만하여 그것을 무시하고, 국제적규범(國際的規範)을 파괴한 것은 그들이 의도적(意圖的)으로 한 것입니다. 독일인은 세계에 관한 지식이 없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인처럼 부지 간에 그렇게 되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독일인은 자기들이 보유한 군사력을 이용하는 것이 그들이 의도하는 권력과 경제제패(經濟制覇)를 달성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숙려(熟廬) 끝에 정책으로 그것을 행사한 것입니다.


…독일은, 말하자면, 확신범(確信犯)입니다. 냉철하게 국익(國益)의 손익계산(損益計算)을 한 끝에 저렇게 나쁜 짓을 한 것입니다.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제사회에 들어선 것이 일천하여 어물쩍하다가 실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점령통치(占領統治)로 좋은 나라가 되었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 일본은 아직 12세 소년이어서 교육이 가능하고 이해가 빠르고, 우등생입니다.“ 

이 청문회 증언록은 미 국립공문서관의 상원문서(上院文書) RG46으로 분류되어 있는 “극동의 군사정세와 맥아더 장군의 해임(Inquiry Into the Military Situation in the Far East and the Facts Surrounding the Relief of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from his assignments in that Area)”이란 제목의 문서로 맥아더 원수의 해임과 한반도를 둘러싼 극동지역의 군사상황이 주제로 되어있다.

나의 점령통치로 일본은 좋은나라 됐다

청문회가 미국인의 신경을 집중시킨 것은 맥아더 원수를 당시 야당인 공화당이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트루먼 대통령과 민주당이 긴장하고 있을 때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맥아더 원수의 해임이 청문회의 계기가 되었지만 실은 “맥아더 없는 6ㆍ25전쟁”을 분석하며 동북아시아의 전쟁과 평화를 점검한 것이 그 내용이다.


5월과 6월에 걸쳐 약 2개월간,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을 시작으로 3군의 수장 등 총 13명의 군사 외교 분야의 책임자가 이 증언대에 올랐다. 수 천 쪽에 달하는 증언록은 검열을 거쳐 공개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필자가 감탄하는 것은 “나의 점령통치로 좋은 나라가 되었으니 괜찮을 것입니다”는 맥아더의 장담이다. 한 나라를 통치하고 물러나면서 자신의 치적에 이처럼 콧대 높은 자화자찬은 들어보기 어렵다. 실제로 일본인이 맥아더의 훈육에 우등생처럼 따른 것은 사실이다.


패전일본(敗戰日本)은 지구상의 대표적인 악당이었다. 일본인이 패전 덕분에 외국인이 그린 자화상 같은 저서를 읽고 놀랬다. 영국과 미국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한 휴 바이어스(Hugh Byas)의 “일본인 적(The Japanese Enemy)”이다.


주제를 이끌어가는 문장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런 것이다. ”일본국민은 날조된 종교와 기만적인 헌법으로부터 반드시 스스로를 해방하는 국민이다. 우리들의 승리가 그 과정의 도화선이 되어 이것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침략(侵略)이 수지맞는 일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국민의 에너지를 재생하는, 보다 확실한 길을 열게 될 것이다.…일본문명 가운데에는 세계와 접촉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일본인이 본능적인 잠재의식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일본의 정신적 병폐는, 독일의 병폐와 같은 것- 즉, 기만(欺瞞)의 철학이다.


이것은 일본민족과 일본국가와 완전일체(完全一體)가 되는 것이며, 일본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교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근린국민(近隣國民)보다 우수한 민족으로서 완수하여야 하는 특별사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이다.


이 기만(欺瞞)의 철학은 철저한 교육으로 열성적인 맹신자가 되어 평화공존정책(平和共存政策)을 취하고 대등한 입장을 서로 인정하며 앞장서서 타협하는 것을 견디기 어려운 굴욕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이 중요시하는 유일한 지위는 동(東)아시아의 종주(宗主)와 수호자이다.… 일본인은 모방자라 하면 화를 내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적(敵)으로 관찰한 일본인은 12세 소년이 아니다. 7세나 8세쯤 되는 골목대장에 불과하다. 맥아더와 관점이 비슷하다. 


맥아더 일본인관(日本人觀)의 중요한 부분은 그의 통치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적군으로서의 일본인은 아마 휴 바이아스와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경과를 고려하면 일본은 맥아더 통치로 비로소 사람이 사는 나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25전쟁 특수로 일본재생 기회

맥아더 치하의 일본재생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6ㆍ25전쟁이었다. 일본은 그 때 처음으로 미국의 원조에서 독립하는 경제국가로 변신했다. 1950년부터 1955년까지 6년간에 적어도 16억200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린 6ㆍ25특수(特需)의 덕분이었다.


일본인은 그 시절을 “진무경기(神武景氣)라고 구가했다. 건국신화(建國神話)의 초대 천황인 진무ㆍ천황(神武天皇) 이래 최초의 호경기(好景氣)를 누렸다는 자찬(自讚)의 말이다. 뿐만 아니라 패전의 악몽도 말끔히 씻었다. 그래서 일본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사람답게 사는 나라로 변해갔다.


6ㆍ25전쟁특수에는 미군의 각종무기조달과 무기의 수리, 수송, 미군병사들에 대한 적절한 휴양제공 등 한국전선의 후방기지 역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산(元山), 진남포(鎭南浦), 인천(仁川), 군산(群山)항의 소해작업(掃海作業)으로 327km의 수로와 606 평방km에 달하는 박지(泊地)를 개척한 일본인 기술자들의 참전은 대가 이상의 영예로운 보수를 받아 마땅하다.


맥아더는 일본을 군국주의독재의 전쟁광(戰爭狂)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리고 영구히 전쟁을 포기하는 부전헌법(不戰憲法)을 만들게 해 주었다. 공산당(日本共産黨)과 사회당(社會黨), 그리고 극좌파와 조총련(朝總聯), 리베라리스트와 진보적지식인, 그리고 모든 일본인에게 천지개벽과 같은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제공했다.


이것은 맥아더의 말대로 일본인이 12세 소년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일처럼 45세의 장년 수준이었다면 방향설정에 진땀을 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6ㆍ25는 한국과 맥아더 사령관에게 엄청난 시련이었다. 한국군의 대응이 처참했지만 그 원인이 미국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군이 우수하지만 전전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것은 미국이라고 후회했다. 6ㆍ25 2일 뒤 맥아더는 “한국군이 괴멸할 것 같다”는 전문을 통합참모본부에 보냈다. 한국의 위기는 일본을 엄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전문의 꼬리를 문 듯 “지휘하(일본주둔)의 공해(空海)병력으로 38선 이남에서 한국군을 지원하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이 내렸다. 맥아더는 말이 안 되는 작전명령이라고 반발했다. 5일째 되는 6월 30일, 맥아더는 전용기로 수원(水原)비행장으로 날았다. 지프차로 갈아타고 한강남안(南岸)의 고소에 올라 불타는 서울을 지켜보았다.


지상군을 투입해서 승리로 이끌지 않으면 한국도 일본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날 오후 10시 15분 도쿄(東京)로 돌아온 맥아더 사령관은 육군 1개 사단 파병을 요구하는 전문을 국방성에 보냈다. 워싱턴까지 17시간이 걸렸다.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이 소극적일 것이라 걱정했다. 얼마 뒤 지상군 1개 연대의 투입을 허가 한다는 명령이 내렸다. 지휘하의 병력으로 하라는 조건이었다.

한국군에 장비지원 않은 것은 치명적 잘못

맥아더 사령관은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한국에 북한의 공격을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해주지 않았던 것이 치명적인 잘못이다. 한국군에 장비를 주지 않기로 한 것은 한국에 관해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내린 결정이다.


그들의 이유는 한국이 강해지면 남북통일을 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는 조치로 취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북한이 전쟁을 유발하는 결과가 되었다. 나의 일차적 책임은 일본이다. 한국방위가 일본의 방위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일본에 주둔하는 지상군을 한국에 투입하면 적성국가(敵性國家)가 일본을 탈취하려 할 것이 아닌가.“


이 회고록을 보면 한국을 지키는 것이 일본을 지키는 수단이다.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한 것도 미국이다. 겹겹의 올가미를 씌운 것도 미국이다. 맥아더 사령관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모택동의 중국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다.

무엇 때문에 한국을 버렸다는 말인가. 한국의 가치가 제로였다는 말인가. 그래서 미국이 한국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스탈린과의 밀약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미 국무성의 진보적 세력이 그렇게 해버렸다는 말인가.


거물급 소련 스파이 알저 히스의 소행이었을까. 6ㆍ25가 64년 전의 일인데 아직 정답이 없다. 
포츠담 선언에 의해 해방된 한국이 미군정으로 통치되고, 모스크바 3상회의가 신탁통치를 결정한 것도 의문이다. 북진통일만 왜치든 한국정부는 무엇을 믿고 그렇게 떠들었던가. 패망한 침략자 일본마저 놓쳐버리지 않았는가.

일본은 한국국민과 세계의 젊은이가 목숨으로 지키고 있는 6ㆍ25전선(戰線)에서 빨아 먹는 감미(甘味)에 취했다. 그래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수상은 6ㆍ25를 “신(神)이 일본에 내려준 선물”이라고 환성을 올렸다. 12세 소년보다 못한 도덕심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능인 인간애(人間愛)의 부스러기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성(殘忍性)이 돋보일 뿐이다. 이것이 정직한 일본의 모습이다. 일본의 권력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합리적인 사고도, 이웃을 위한 배려도, 전략적인 구상도, 할 말과 안해야 하는 말을 가리지도 못한다. 백지(白紙)가 아니라 백치(白痴)가 아닌가.


가롯 유다는 은 30량에 예수를 팔았다. 팔린 예수는 부활하여 살아났어도 은 30량을 손에 쥔 가롯 유다는 영멸했다. 돈이 생명을 구할 때가 있지만 돈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도 많다.

모순에 빠진 맥아더의 고민

6ㆍ25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군사력 공백을 메우는 것이 맥아더의 고민이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도를 생각했다. 그에게는 일본이 점령국이 아니었다. 지켜야 하는 나라였다. 한국에서 승리하여야 일본을 지킬 수 있다는 것도 거기에 따른 신념이었다.


그러나 일본을 지키는 병력은 제8군 예하의 4개 사단뿐이었다. 맥아더는 이 병력을 6ㆍ25전선에 투입하여야 했다. 그래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본인으로 준군사조직인 경찰예비대(警察豫備隊)를 창설키로 했다.


이것 때문에 맥아더는 모순에 빠졌다. 일본의 군사력을 박탈하기 위해 만든 전쟁포기(戰爭抛棄) 부전헌법(不戰憲法)에 포기하여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협의 끝에 맥아더는 “일본국내 치안유지를 위해 최대 20만 한도의 경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포츠담 선언의 조항에 의지하기로 했다. 합헌성(合憲性)을 찾았다. 경찰병력은 군인이 아니다. 1950년 7월 8일, 마침내 75000명으로 무장ㆍ경찰예비대를 창설했다. 이것이 자위대(自衛隊)의 시작이다.


그 때 일본은 국내외로부터 영세중립(永世中立)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6ㆍ25가 없었으면 집단적자위권(集團的自衛權)논쟁으로 각을 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경찰예비대 창설명령을 하달하는 하루 전인 1950년 7월 7일 유엔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일본 재무장의 원인제공자는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 전쟁악마 3인방이었다.


6ㆍ25전쟁의 승리를 보장하는 맥아더 사령관의 전략은 3개 항으로 종합할 수 있다. 첫째가 중공(중국)에 대한 해상봉쇄(海上封鎖)이고 둘째가 만주에 대한 폭격감행, 그리고 셋째가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군투입(國民黨軍投入)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에는 그림 속의 떡이었다. 다만 한국군의 ‘38선 이북의 월경금지령(越境禁止令)’을 5000분의 1의 도박이라는 인천상륙작전성공으로 해제시킨 정도다. 사실은 이것이 OPLAN 5027의 개정이다.


NATO의 반대가 있었지만 맥아더 원수는 만주를 폭격하고 압록강변에 한국군의 요세를 구축하는 것이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수십만의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만주폭격에 원자폭탄(原子爆彈)사용을 주장한 것 도 그 일환이었다.


물론 여기서도 일본을 지킨다는 신념이 앞섰다. 미국의 다큐멘터리 작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카즈니크(Oliver Stone & Peter Kuzunick)의 공동저서인 미국의 비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2012)가 이 문제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던 맥아더가 38선을 넘어 반격하여 북한을 해방(解放)하는 허가를 받았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중공의 참전이 없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중국국경 진격은 한국군만으로 한다는데 동의했다.…맥아더는 경솔하게도 한국군만 사용한다는 약속을 무시하고 미 공군에게 중국국경부근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그래서 통합참모본부가 중국국경으로부터 8km 법위내의 공습금지를 요구했다.”

트루먼, ‘저놈에게…’ 맥아더 해임

“트루먼은 1950년 11월 후반, 모든 선택지에 원자폭탄에 의한 철저한 파괴도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12월 9일 자신의 판단으로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12월 24일에는 원자폭탄 투하지점 26개소의 리스트를 제출했다. 그리고 침략군에 투하할 원자폭탄 4발과 적(敵) 공군력이 집중하여 위기적인 상황에 있는 지역에 투하할 원자폭탄 4발의 공급을 요구했다. 30발 내지 50발의 원자탄을 ‘만주와 접한 지역전체’에 투하하면 ‘방사성(放射性)코발트대(帶)’를 형성할 수 있어 10일 안에 전쟁에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맥아더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효과였다. 그 방사성 코발트대(帶)는 ‘동해에서 황해(黃海)까지’ 확산된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60년간은 북에서 한국을 지상침공(地上侵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맥아더가 생각하고 있었다.”


“트루먼이 휴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맥아더는 1951년 3월 24일 중공에 대한 최후통첩을 독자적으로 발표했다. 트루먼이 격노하여 ‘저놈에게 누가 자기의 보스인지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지만 맥아더가 발표한 그 자체는 방치해두었다. 통합참모본부가 만장일치로 맥아더의 해임을 권고했다.”


“맥아더의 원자폭탄 사용의욕이 사령관 해임결정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통합참모본부는 그 전주(前週) 중공이 대규모 부대를 다시 투입하면 만주기지를 원자폭탄으로 공격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1951년 4월 6일 이 요구를 인정하고 9발의 원자폭탄을 원자력안전위원회(原子力安全委員會)로부터 괌과 오키나와기지로 옮기도록 승인했다. … 맥아더의 후임 리지웨이 장군도 1951년 5월, 38발의 원자폭탄을 요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새벽 특별기자회견에서 맥아더를 유엔군최고사령관과, 미 극동군총사령관, 미 극동육군사령관, 그리고 GHQ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전 미국이 폭발하듯 들끓었다. 갤럽의 조사에는 미국국민 3분의 2가 맥아더 사령관의 해임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는 바라드를 인용한 의회연설로 미국국민의 감정을 폭발시킨 맥아더는 1951년 5월 3일부터 미 국회 상원(上院)의 청문회에 출석하여 3일 일정의 마지막 날 “일본인은 12세 소년과 같다”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일본인평을 피력했다.

일본의 양심이 소생하지 않는 한 희망없다

때마침 일본의 영향력 있는 보수계 잡지 월간 문예춘추(月刊 文藝春秋)가 7월호에 “지금 일본인에게 필요한 교양(敎養)이 무엇인가”특집을 게재했다.


2명의 대학교수(井上壽一學習院大敎授와 中島岳志北海道大學准敎授)의 대담으로 “무엇 보다 먼저 정확한 영사인식(歷史認識)을 가져야 한다”고 논했다. 역사인식을 지금 일본국민의 중요과제로 이해시키려 한 것은 평가 할 수 있지만 역시 일본이라는 의식(意識)의 좌표 안에 묶인 영어(囹圄)의 역사관(歷史觀)으로 시종된 것이 원망스럽다.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한다”고 민족차별을 내세운 침략주의자(侵略主義者) 후쿠자와(福澤諭吉)의 “침략론(侵略論)의 효시(嚆矢)”인 탈아론(脫亞論)을 “아시아 연대(連帶)를 목적으로 한 아시아주의였다”고 찬양했다.


기획의 부제, “안중근(安重根)은 명치천황(明治天皇)을 존경하고 있었다”도 침략의 합리화를 위한 일방통행의 역사인식이다. 안중근의사의 그런 사상을 논하려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조선침략에 대한 명치천황의 평가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루이 도오기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들고 나와 일본인이 한국에 대해 자선운동을 한 것처럼 주장했다. 대동합방론은 1890년에 기초된 한국과의 연방형식(聯邦形式)의 합방을 주장하여 한국침략의 물꼬를 튼 문서이다.


한국은 대만(臺灣)처럼 단숨에 먹힐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19세기 중엽 이후 일본이 모의에 모의를 거듭한 끝에 성사한 침략이다.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노일전쟁(露日戰爭)이 중대한 고비였다. 2차 세계대전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은 아시아 해방전쟁(解放戰爭)이었다”는 침략사관(侵略史觀)으로 도색했다. 


“패배를 포용하며(Embracing Dfeat)”의 저자 존 W. 다워(John W. Dower)는 일본의 언론에 실망한 듯 “바로 어제까지 성전(聖戰)의 슬로건을 고취하고 있던 신문이 이제 와서 군국주의자(軍國主義者)와 관료와 재벌의 공동모의에 관해 보도하고 있다.

신문에 게재된 진실은 사망광고(死亡廣告)뿐이라고 와타나베(渡邊)가 찬의를 표하며 일기장에 기록했다”고 소개했다. 와타나베(渡邊淸)는 1977년 “박살난 신(神)”이라는 천황을 비판한 책을 발표한 전함(戰艦) 무사시(武臧)의 승무원이었다. 극 천황의 명령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에게 천황이 책임을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만약 천황이 정말 전쟁을 하기 싫었으면 왜 개전조서(開戰詔書)에 서명하였겠는가. 왜 천황은 진주만공격의 책임을 도오죠(東條英機)에게 밀어붙이고 있는가. 왜 천황은 그것은 자신의 명령에 의해 행해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글을 받아 존 W. 다워가 설명을 덧붙였다. “와타나베는 천황제(天皇制)를 국민투표(國民投票)에 추진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중에는 벌써 맥아더를 새로운 천황(天皇), 또는 천황(天皇)의 위에 있는 새로운 국왕(國王)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사람은 이런 일을 볼 때마다 당연히 지금의 아베(安倍晋三)를 연상하게 된다. 문예춘추(文藝春秋)를 보아도 희망이 없다. 역시인식(歷史認識)이란 시대적 역사적 명제(命題)다. 그러나 일본의 양심이 소생하지 않으면 영원히 평행선이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한국이 일본 보다 잘살고 세계에 영향력 있는 나라로 한국이 발전하는 길 밖에 없다.


아베는 12세 소년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 이것은 필자의 편견이 아니다. 맥아더 원수가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고무적인 후원자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0호(2014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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