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렁쇠
‘북부여’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대’자를‘ 북’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것은 망해 가던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해모수단군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당시 47대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이렇게 북부여가 고조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 고조선의 양팔인 번조선과 막조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조선 개국 이래로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수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번조선 땅은 이 무렵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피해 넘어온 중국의 한족 난민으로 넘쳐났다. 그 난민 중에 한 고조 유방의 죽마고우이자 연나라 왕이었던 노관의 부하 위만이란 자가 있었다. 위만은 한 고조 유방의 숙청을 피하여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다(BCE 195). 번조선의 준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왕검성을 쳐서 한순간에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번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그들은 중국 한족 위만이 번조선을 강탈해 지배한 위만의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북쪽에 북부여가 열리기 전부터 이미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땅이던 막조선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번조선에 살던 대부호 최숭이 번조선의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건너 한반도의 막조선(莫朝鮮)으로 넘어왔다. 최숭은 오가의 부족장들에게 거금의 재물을 주고 왕검성(지금의 평양)을 넘겨받아 낙랑국을 세웠다(BCE 195). 강력한 한나라의 출현으로 요서지역(번조선)에 위기감이 팽배한데다 위만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 한족이 망명하여 오자, 어수선한 정국을 피해 최숭이 한반도 지역으로 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처럼, 북부여가 세워진 후 만주의 진조선은 북부여에 흡수되고, 한반도의 막조선에는 낙랑국이 들어서고, 요서의 번조선은 위만이 차지함으로써 고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
북쪽에는 북부여, 남쪽에는 남삼한 준왕이 망하고 위만정권이 들어선 사건은 한민족에게 또 다른 역사 개척의 계기가 되었다. 번조선 땅이 위만에게 강탈당하자 상장군 탁卓이 사람들을 이끌고 한강 이남으로 이주하여 새로이‘ 마한’을 세웠다(BCE 194). 옛 진조선과 막조선의 일부 백성들도 한강 아래로 남하하여 각기‘ 진한’과‘ 변한’을 세웠다. 마한은 호남의 익산을, 진한은 경북 경주를, 변한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비록 불의한 위만정권 때문에 남하한 것이지만, 한강 이남에서 새로운 삼한시대를 연 것이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창하여 고조선 시대의‘ 삼한을 전삼한(북삼한)’으로, 한반도에 형성된 삼한을 후삼한(남삼한)으로 구별하였다. 이 남삼한이 바로 강단사학계가 말하는 삼한이다. 강단사학계는 북삼한은 없었고, 남삼한만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고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읽는 핵심 코드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다.
만주대륙의 북삼한이 부정되고 한반도의 남삼한만 거론됨으로써 우리 역사는 소한사관에 찌들게 되었다. 작은 삼한의 시야로 역사를 보는 것을‘ 소한小韓사관’이라 한다. 하지만 한민족사는 대륙을 누비던 큰 삼한의 관점으로 보아야 그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북부여의 구국 영웅, 고두막한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 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핵심 요체이다. 그런데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앉혔을(BCE 194) 뿐 아니라, ‘위만정권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에 한나라가 4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라고 가르친다. 북부여는 온데간데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강단사학자들은 또한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설정하였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고 하여, 해모수와 주몽을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었다.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 무제는 그 기세를 타고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였다. 그러고는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어(BCE 108)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였다.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자칫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한민족 상고사 최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동명왕은 구국영웅으로 추앙받아 북부여의 5세 고두막 단군으로 즉위하였다(BCE 86).
원래 북부여의 4세 단군을 계승하여 잠시 보위에 있던 해부루는 동쪽의 차릉(가섭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이로써 부여는 동서로 나뉘게 되고 후기 북부여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두막한의 등장으로 전기 북부여 시대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북부여는 고두막 단군의 다음 대에 이르러 182년(BCE 239~BCE 58)의 짧은 역사를 끝내게 된다.
왜 북부여사는 이렇게 난도질되었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한 무제가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킨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졌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였다.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서부여의 역사이다. 서부여는 동부여가 망한 후 요서에 생긴 망명부여로서, 서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이다. 예를 들어『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울구태蔚仇台,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등은 모두 서부여의 왕이다. 그런데도 강단사학계에서 나온 책과 논문들은 서부여를 부여의 원래 모습인 양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부여의 원형이 처참히 파괴되고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버렸다. 한국사의 국통 맥이 어지러워지고 뿌리 역사가 소멸되었다. 북부여라는 잃어버린 고리가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에 제대로 연결되는 그날이 바로 동방 배달민족사의 9천 년 국통 맥이 온전하게 똑바로 서는 역사 광복의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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