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두 가지 방식의 삶

황령산산지기 2018. 7. 29. 11:00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아름다움과 우정과 사랑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강하게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과연 이런 죽음의 확실성 속에서 편히 이완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우선, 죽음이 확실할 때에만 편히 이완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오히려 뭔가가 불확실할 때 편히 이완하는 게 어렵다. 자신이 오늘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살아갈 날이 하루 남았다면 최대한 강렬하게, 최대한 전체적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죽음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강렬하고 전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올 수 없다. 죽음이 오더라도 삶을 전체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죽음을 크나큰 위안으로 받아들이고 환영한다. 그들은 살아가는 일에 지쳤다. 그토록 강렬하고 전체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죽음은 친구처럼 다가온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면 밤이 되어 완전히 편안하고 안락한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삶 이후에 죽음은 그렇게 다가온다. 죽음은 결코 추하지 않다. 죽음보다 더 깨끗한 것은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삶으로 채워지지 않은 구멍이 몇 군데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런 두려움은 사실 큰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된다. 그것은 그대가 삶이라는 춤을 좀 더 빠르게 추어야 하고 삶이라는 횃불을 모두 태워야 한다는 것을 그대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좀 더 빠르게 춤을 추어서 춤을 추는 사람이 사라지고 오직 춤만 남게 하라. 그러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대를 엄습할 가능성은 없다.

그대가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하게 산다면, 왜 굳이 내일을 걱정하겠는가? 내일은 내일이 알아서 할 것이다. 예수가 신에게 신이시여, 저에게 일용할 빵을 주소서.'라고 말한 것은 옳다. 그는 내일을 위한 빵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늘은 오늘로서 충분하기 때문이다.

매순간이 스스로 완성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순간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했을 때에만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 마음, 공간의 개념은 사라진다.

 

어느 상인이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몇 살입니까?

상인이 대답했다.

360살입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보세요. 내가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습니다.

상인이 크게 소리쳐 말했다.

360살이라고요!

그 사람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요. 당신은 불과 60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요!

상인이 대답했다.

그 말도 맞아요. 달력으로 따지자면 나는 60살입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으로 보면 나는 다른 누구보다 여섯 배는 더 많이 살았어요. 그래서 60년을 살고 나니 360년을 산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삶의 강도가 관건이다. 삶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황소처럼 하나의 선을 따라 수평적으로 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붓다로 사는 것이다. 그는 높이와 깊이가 있는 수직의 삶을 산다. 그러면 매순간이 영원할 수 있다.

하찮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삶을 살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랑하라. 최대한 전체적으로, 그리고 모든 것이 흘러넘치도록 행하라. 그러면 두려움은 그대를 간섭하지 못할 것이고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늘은 오늘로 충분하다. 삶을 완전하게 살아라. 그런 삶은 다른 걸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오쇼의 <초월의 명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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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강조하는 바는,

'지금 현재'가 유일한 실체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오쇼


출처 : 불교미술이야기
글쓴이 : 델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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