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실직국(悉直國)의 마지막 왕 안일왕(安逸王)

황령산산지기 2017. 9. 17. 08:27

실직국(悉直國)의 마지막 왕 안일왕(安逸王)

원도내에는 실직국(悉直國)·예국(濊國)·맥국(貊國) 등 3개의 고대 국가가 있었다. 춘천의 맥국이나 강릉의 예국은 일반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삼척의 실직국은 일반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삼척 실직국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항 파사이사금(波娑尼師今·신라는 18대왕까지 이사금이라 했다) 조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파사이사금 23년, 8월에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 경북 안강지역)과 실직국(悉直谷國이라고도 부름)이 서로 지경(地境)을 다투었다. 파사이사금에게(두 나라가)와서 이를 판결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파사이사금은 해결이 어려운 일이라 했다. 그리고서 말하기를 {금관국 수로왕은 연로하고 지식이 많으므로 그를 초빙해서 묻자}고 했다. 수로왕은 의론을 바로 세움으로써 실직국과 음집벌국이 서로 다투는 땅을 음집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파사이사금은 육부(六部)에 명령하여 모이게 하고, 수로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오부(五部)에서는 모두 이찬(伊瑗)으로써 접빈주(接賓主)를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에서만 벼슬이 낮은 자로서 접빈주를 삼으므로, 수로왕은 크게 노하여 노탐하리(奴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주(漢祇部主)인 보제(保齊)를 죽이고 돌아갔다. 이때 노탐하리는 도망하여 음집벌국 타추간(陀鄒干)의 집에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파사이사금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음집벌국을 정벌했다. 그 때, 타추는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에 실직(悉直) 압독(押督·지금 경북 경산에 있던 나라) 2국도 항복하였다. 10월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피었다.

파사이사금 25년. 정월에 많은 별들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7월에 실직국이 모반하므로 파사이사금은 군사를 내어 이를 토평하고, 그 무리들을 남쪽 변방으로 옮겼다. 신라 제5대 왕인 파사이사금 23년 8월부터 25년 7월까지의 실직국에 대한 이 이야기는 실직국 역사의 기록으로서 유일한 것이고 또 전부이다. 삼국사기의 지리(地理) 조에는 신라 파사왕때 실직국이 항복하였고, 지증왕(智證王) 6년에 주(州)로 만들어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삼척(三陟)이라고 했다. 삼척군의 영현(領縣)이 넷으로 죽령(竹領)현, 만경(滿卿)현, 우계(羽谿)현, 해리(海利)현이 그것이다. 죽령현은 고구려의 죽현(竹峴)현으로 미상이고 만경현은 고구려의 만약(滿若)현인데 역시 미상이라고 했다. 우계현은 고구려의 우곡(羽谷)현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했으며 지금의 옥계지방이다. 해리현은 고구려의 파리(波利)현을 경덕왕 때 역시 개명했지만 미상이다. 신라가 실직국을 멸망시킨 다음 실직인들은 경북 울진 남쪽으로 옮긴 훨씬 후에야 실직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異斯夫)가 실직주의 군주로 임명되어 파견됨으로써 비로소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지증왕 6년, 서기 505년 이사부가 실직주로 부임하기 이전까지는 실직국의 세력이 아직도 잔존하여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실직국과 신라는 그만큼 적대 관계에 있었고, 파사왕이 실직국을 정복하고서도 4백여년 동안 실직국의 명맥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파사이사금 때 패망한 실직국을 건설한 사람들을 실직인(悉直人)이라 부르고, 임금을 실직왕(悉直王), 그 부족을 실직씨(悉直氏)라고 불러오고 있다. 물론 지금은 실직씨라는 성씨가 남아 있지는 않다. 잃어버린 나라요, 잃어버린 왕손이요, 또 잃어버린 성씨이다.
경북 울진군 서면에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이 있다. 왕피리에는 병위동(兵衛洞) 임왕기(臨王基) 포전동(飽田洞) 거리곡 등이 있다. 통고천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는 강을 왕피천이라 부른다. 옛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이 예국(濊國)의 침략을 받아 지금의 소광리에 있는 애밀왕성(安逸王城)으로 피난하여 버티었으나 성이 함락되었다.
이 마을로 실직국 왕이 피신하였으므로 이곳을 왕피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왕피리의 병위동은 실직국 안일왕의 군사들이 머물렀던 곳이고, 포전은 군사들이 밥을 먹던 곳이라 한다. 또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이며 거리곡은 실직곡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웃한 삼근리의 복두괘현(일명 박달재)은 애밀왕성이 함락되자 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하다가 이곳에서 복두를 쓰지 못하고 그냥 도망한 곳이므로 두건을 걸어 놓은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왕피리의 전설은 실직국과 예국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실제로 실직국을 멸망시킨 나라는 신라인데도 엉뚱하게 울진군 왕피리의 전설은 예국이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와 예국이 뒤바뀌어 있는 것이 이 전설의 묘미이다. 실직국은 신라에 멸망한 3년 후에 다시 봉기하여 부흥 전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신라군에 다시 패망한다. 신라는 이에 실직국이 다시 모반할까 봐 실직국 사람들을 모두 남쪽으로 옮긴다. 실직국을 비워 놓고 신라 쪽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왕피리 전설에는 실직국의 왕과 백성이 모두 삼척 남쪽 울진으로 내려와 피난한 곳으로 변형되어 있다.

실직왕, 실직씨는 고대 삼척을 건설한 원래의 종족이고, 지금 실직군 왕릉은 삼척 김씨의 시조 경순왕 7자의 무덤이다. 실직국왕, 실직씨와 실직군 왕릉의 주인공을 왕왕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래서 역사의 오류가 생긴다.
실직국의 안일왕(애밀왕)은 실직국에 전해 내려오는 유일한 왕의 이름이며 또 유일한 실직인 이름이기도 하다.

● 참고 : 김영기 논문,〈실직문화〉1992년, 3집, 삼척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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