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선왕릉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10가지를 들여다본다.
1. 조선왕릉은 왜 서울 경기에 몰려 있을까?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 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다.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 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2.어느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쪽이 왕비일까?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조선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 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 기 때문이다.
3. 조선왕릉 은 왜 거의 도굴이 안됐을까?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 이 없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 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 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4.왕과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못한 까닭은?
왕릉은 당대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정왕 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 이다.
5. 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
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
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 인 셈.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
6. 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
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
중종 시대 (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이 아닌가.
전문가 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다고 말한다.
7. 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 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 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 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8. 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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