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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령산산지기 2016. 5. 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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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과 혼과 영


거짓 가르침은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짓이 진리라는 확신에 기초해 있으므로..

자신의 사고 방식 속에 있는 논거만을 통용시키려는 사람끼리 벌이는 논쟁은 불모 그 자체이다. "증명하는 것"의 본질을 잘 아는 사람은 인간의 혼(魂)이 진실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논쟁과는 전혀 다른 길 위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몸과 혼(魂)과 영(靈)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사물을 연결시키고 혼을 통하여 사물이 던져주는 인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영을 통하여 사물 스스로가 말을 걸어오게 한다. 이렇게 인간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세계의 시민이다. 그 몸을 통하여 인간은 지각하는 세계에 속하고, 그 혼을 통하여 그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그 영을 통하여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눈앞에 펼친다.

인간은 자의식을 통하여 자신을 모든 다른 것과 구별하며, 자신을 '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몸과 혼(魂)으로 체험하는 모든 것을 '나' 속에 통합한다. 몸과 혼과 함께 내가 있고, 몸과 혼 속에서 '나'는 활동한다. 몸의 중심이 뇌라면 혼의 중심은 '나'이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본성이다. '나'는 혼자다. 그리고 '나'는 인간 그 자체이다. 이것이 '나'가 인간의 진정한 본성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과 혼을 '나'가 살아가는 외피이며, '나'가 활동하기 위한 조건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외피를 '나'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나'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말과는 다르다. 이 말 뜻을 잘 생각하면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다른 모든 말도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책상은 책상이고 모든 의자는 의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나'에 대한 '나'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을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영원한 빛을 자신 속에 받아들인다. '나'는 '인간 존재의 가장 성스러운 부분'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높이 우러러보는 것을 "신(神)"이라 부른다. 인간의 사명은 이런 신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현실 세계, 물질적 현실계와 고차원적 영적 세계는 같은 존재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눈으로 고차원적 세계를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태도는, 보는 행위 그 자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다.

인간은 대상을 금방 자기 자신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대상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매력이 있는가 없는가, 유용한가 해로운가,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운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로 사물을 관찰하고 판단해 버린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태도 때문에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고, 그 오류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판단기준을 버리고 평등한 관점, 이른바 신적인 태도로서 존재하는 그 자체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실한 식물학자처럼, 식물의 아름다움이나 유용성이 아니라, 식물의 형성, 다른 식물과의 관계를 탐구하고 모든 식물이 태양 앞에 평등하게 드러나듯이 조용한 눈길로 관찰하고 음미하며, 모든 판단의 척도를 자신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세계에서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태어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의미를 가진다. 인류의 진화는 어떤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조상의 복제품이다. 근본적인 두 가지 힘이 있다. 그것은 공감(共感)과 반감(反感)이다. 공감이란 혼(魂)적인 구성체가 다른 것을 끌어당겨, 다른 것과 융합하려는 힘이다. 반감이란 그 반대로 다른 것을 물리치고 배제하며, 자신의 특성을 주장하려는 힘이다. 보통 사람들처럼 공감과 반감이 상호의지하고 있을 때 공감의 힘은 탐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 탐욕은 만족을 모른다. 왜냐하면 반감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것을 물리치기 때문에 혼이 가득 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이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면, 반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공감만이 본래의 작용자로 빛처럼 나타난다. 한 인생에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다음 인생에서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사항이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일생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초월하고 있는 요인에 세 가지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다. 육체는 유전법칙에 따른다. 혼(魂)은 스스로 만들어 낸 운명에 따른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 운명을 업(業)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靈)은 윤회전생의 법칙을 따른다. 영(靈)은 멸하지 않는다. 탄생과 죽음은 물질계의 법칙에 따라 신체를 지배하고 운명에 따르는 영혼의 행위는 이 세계에 관련성을 부여한다. 영(靈)은 인간의 중심점이다. 몸은 이 영이 물질계를 관찰하고, 인식하고, 활동하는데 필요한 매개자이다. 그리고 혼(魂)은 이 영과 몸의 매개자이다. 그러므로 영(靈)속에 나타나는 사고내용은 혼(魂)속에서 그것을 실현하려는 바램으로 바뀌고, 그 바램을 몸을 도구 삼아 행위 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자신을 향하여, 지금 내 주변에 펼쳐지고 있는 것들이 예전에는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배운다. 중요한 것은 노력 그 자체이며,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방황하면서도 진리를 갈구하는 한,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황 속에 있을 때도 이 힘이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준다.

루돌프 슈타이너

 


출처 : 아코디언 음악 사랑
글쓴이 : peterto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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