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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황령산산지기 2015. 6. 15. 08:22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 청담스님

 

 

우리가 꿈에서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소위  현실이라는 것도 그대로 꿈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다.

지금  살고 있는 생시가 바로 꿈이라고 하면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대들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 꿈(생시)이 영원한 꿈인데도 꿈인 줄 모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연애해 가지고 아들딸 낳아서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또 장가들이고 시집보내서 손자를 보고 하여 잘 산다.

이처럼 우리가 꿈속에서 겪는 세계나  생시의 일들이 너무도 같기 때문에

 그 꿈을 깨기 전까지는 그게 꿈인 줄 모르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있고, 산소 수소가 있으며 온 우주가 다 거기있다,

 꿈에서도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있어서 날씨가 차고 더우며

어린애들 낳아서 키워보면 어려서부터 점점 자라서 커간다.

그러니 아러한 것을  어떻게 꿈인 줄로 알 수 있는냐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꿈을 깨어볼라치면 시간은 불과 몇 분도 채 안된다.

 
인생이 꿈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이다.

성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이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다는 말이 있는 것이지 성불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이다.

정말  실상자리에서 보면 제대로 되있으니 꿈꿀 사람도 없다.
 
사람이 자는 시간도 대체로 하룻밤에 일곱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므로

 내가 잠이 든 전시간 동안에 꿈을 꾸었다고 해도 여덟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 들어가서는 여덟 시간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 경험한 시간은 닷새 사는 때도 있고 한  달 사는 때,

한 해 사는 때, 몇 해 사는 때 까딱 잘못하면 한평생을 사는 때도 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가며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여덟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꿈에 들어 가서는 일평생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시에 반나절 꿈도 꾸지마는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 시간보다 꿈 속에서 사는 시간이 훨씬 더 많게 된다.

 
꿈과 현실이  똑같은 것은 다 한마음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꿈을 꿀 때에도 이 몸뚱이 처자 재산을  다 그대로 놓아두고

마음만 나아가서 꿈세계를 창조헤 놓는다. 꿈울  깰 때에도

꿈 속에 있던 몸뚱이 재산 처자를 만들어서 꿈하고 똑같은 세계를 만든다.

 
꿈만 꿈이 아니라 꿈 아닌 것도 꿈이다. 망상은 꿈을 이룬다.

 이것은 곧, 주관은 객관을  조화한다는 실증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밖에 개관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주관이 곧 객관이며 객관이 곧 주관이다.

뜨겁고 찬 것이 불과 물에 있을 수 없다.  

  주객이 둘이 아니므로  우리의 인식밖에 기둥과 기둥이 있을 수 없으며

기둥과 기둥의 모양 밖에 인식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주관을 쉬어버린 때에는 객관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을 쉰 이 청정한 본래의 마음법에는 기둥도 기둥 모양도 없다.

 그러므로 저 기둥 한가지를 볼 때에는 곧 기둥이 나타나는 이치와

그 기둥을 나타낸 이 마음의 본연면목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저 만물을 다루면 된다.

 꿈이 아무리 헛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꿈을 깨기 전에는

꼼짝없이 사실인 고와 낙을 받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을 깨치지 못한 중생들을

업습에서 일어나는 천당 지옥의 꿈을 벗어날  길이 없다.

꿈에서 죽고 꿈에서 태어난다.

 
우리 승려들은 꿈이 없다는 소리를 한다.

 거짓말이 아니다 중 노릇을 제대로 하는 수자들은 꿈이 없다.

 또 대인들, 수양이 되어 있는 사람들도  확실히 꿈이 적다.

수양이 되면 마음이  비어서 번뇌망상이 적으므로  꿈이 적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낮꿈은 평생  살아봐도 70년, 80년밖에 안된다.

 그것도 잠자는 시간, 병 앓는 시간 다 빼고 나면 몇 십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밤꿈은 몇 백년 몇 천년을 산다.

따라서 생시는 얼마 안되는 시간을 산 것이고 밤꿈은 낮꿈의  몇 배, 몇 십배를

더 사는 결과가 되므로 정말 꿈은 밤꿈이 아니라 생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밤꿈에만 우주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깬 낮꿈에도 우주를 창조해 내고 있다.

 그러므로 꿈이라고 하면 낮꿈 밤꿈이 다 꿈이다.

밤 낮 금생 내생이 다 꿈인데 이 꿈 가운데  꿈이 아닌 것은 꿈을 꾸고

우주를 창조해 내는 우리의 마음뿐이다.

 밤꿈에는 이 마음 이대로이고, 낮꿈에 더 이 마음 이대로이다.

그런데 생각은 그때 그때 환경에 따라서 추우면 춥다, 더우면 덥다 라고 느낀다. 

 생각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만 추우면 추운지 알고,

더우면 더운지 아는 이 마음은 불변의 나다.

 

생사의 변천이 없고  질량의 변화가 있을 수 없는 이 나는 모든 지식의 주체인데, 

이 마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지가지고 큰 것은 크다, 작은 것은 작다고 하는 것이다.

육신도 마음이 만든 피조물인데 중생들이 육신을 주인으로,

 마음을  육신의 종으로 삼아서 주객을 뒤엎고 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주관 대 객관으로 벌어져 있는

이 우주와 인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을 다루려고 드는 통에

 온 우주의 주인공인 유아독존의 자아가 깜빡하는 순간에

도리어 창해일속으로 한 개의 적은 육체의 인간으로 전락되어서

이 생사대몽을 이루어서 윤회와 인과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안생이 사는 것도 꿈이요, 죽는 것도 또한 꿈이다.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유당(幽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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