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괴로운 것만은 아니다 / 틱낫한 스님
삶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또한 푸르른 하늘, 햇빛,
아기의 눈망울 같은 경이로운 것으로도 가득 차 있다.
괴로움만 접할 게 아니라
우리는 생의 경이와 접해야 한다.
생의 경이로움은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행복하고 고요하지 않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한 지붕 밑에 사는 사람들과 행복과 고요를 나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하고 고요하다면
우리 입가엔 꽃처럼 웃음이 피어나고 우리 가족과 전 사회가 그 고요함의 덕을 보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즐기는데 연습을 요하거나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가?
아니, 우리는 그저 즐길 뿐이다.
삶의 매 순간이 그러하니 언제 어디에 있건 우리는 햇살을 만끽하고
서로가 곁에 있음을 낙으로 삼으며 숨쉴 때마다 그 느낌을 사랑할 수 있다.
푸른 하늘을 즐기기 위해 중국까지 갈 필요도 없고
즐겁게 숨쉬기 위해 미래로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행복한 것들과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접할 수 있다.
단지 고통밖에 느끼지 못하는 삶은 참으로 슬프다.
명상이란 지금 내 몸 안에, 감각에, 마음에, 주변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지하는 것이다.
매일 4만 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죽어간다.
강대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는 5만두가 넘어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하고도 남아돌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햇살은 아름답고
오늘 아침 담을 따라 넝쿨져 피어난 들장미는 기적이라 할만하다.
삶은 끔찍스러운 한편 경이롭기도 하다.
명상을 하는 것은 삶의 이 양면을 다 접하는 것이다.
명상을 하려면 근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명상을 잘하려면 실은 잘 웃을 줄 알아야 한다.
며칠 전 아이들과 같이 앉아 있는데 팀이라는 소년이 환하게 웃었다. 난 말했다.
"팀, 네 미소는 정말 아름답구나!"
"고맙습니다."
"네가 내게 감사할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너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환한 웃음으로 넌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었거든.
그러니 고맙다고 할 게 아니라 '별 말씀을요'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아이 하나가 웃고, 어른 하나가 웃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웃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고요하고 행복해 질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두가 행복해 질 것이다.
이것이 평화운동의 가장 기초라고 할 수 있다.
팀이 웃는 걸 볼 때 나는 정말 행복하다.
자신이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팀이 알게 된다면
그는 당연히 "별 말씀을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삶이 고달프고, 때론 웃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매일 아침 사람들을 만나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할 때 정말 좋은 아침이 되어야 한다.
한 청년이 물었다.
"가슴속에 슬픔밖에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웃으란 말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자네의 슬픔에 웃어 주게나!"
우리 마음 속엔 슬픔만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수백만 개의 채널이 있는 텔레비전과 같다.
우리가 불성의 채널을 켜면 우리는 부처가 된다.
슬픔의 채널을 켜면 우리는 슬픔이 된다.
웃음의 채널을 켜면 우린 웃음 그 자체가 된다.
하나의 채널이 우리를 사로잡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의 씨앗은 마음 속에 있으므로
당면한 상황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주인의 위치를 회복해야 한다.
너무 바쁘게 살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도 바라볼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다.
조직화된 사회에 길들여져 시간의 여유가 생겨도 그걸 자신과 접하는데 쓸 줄을 모른다.
우리가 귀중한 여유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이다.
텔레비전을 켜고, 전화를 걸고, 차를 탄 채 어디론가 가고.......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낯설어,
마치 자신을 혐오하고 어떻게든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고요히 앉아 깨어있는 마음으로 숨쉬고 웃을 때 우리는 '참자신'이 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우리를 열면 참 자신을 프로그램이 침입하도록 두는 것이다.
물론 좋은 프로그램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소음에 불과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기 때문에
소파에 앉아 시끄러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침략하고 공격하여 파괴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소음에 신경이 괴로워해도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끌 용기가 없다.
텔레비전을 끈 이후엔 자신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명상은 그 반대이다.
명상은 우리가 참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현대와 같은 사회 여건에서 명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공모해 우리를 참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것 같은 형국이다.
비디오나 음악 같은 수천 가지 것들이 우릴 참자신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대기하고 있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깨어 있는 것, 웃는 것, 숨쉬는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참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한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즉 현실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어린이들은 개개의 인간 내면에 깨어나서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묻고 또 물어도 그런 역량이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어떤 이는 그런 역량을 더욱 발전시키고
어떤 이는 그냥 묻어두는 게 다를 뿐 모든 이가 그런 역량을 갖고 있다.
이렇 듯 깨어있을 수 있는 역량, 즉 감성에서, 육체에서, 마음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역량을 우린 불성이라 부른다.
불성은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다.
우리들 안에 있는 불성의 씨앗을 가꾸어야 한다.
그래서 웃음이 중요한 것이다.
밖에 나가 데모를 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웃고 숨쉬고 평화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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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와 중생의 차이
말과 행동과 생각하는 바가
그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는 사람,
남들이 존경해도
우쭐대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 사람,
남들이 비난해도
흔들리지 않아 중심이 잡힌 사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숫타니파타]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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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행동과 생각이
그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음은,
내 앞의 그 어떤 사람과도
맑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 자는 그래야 합니다.
어떤 사람과도 화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지만,
미운 사람과도
맑게 지낼 수 있는 일은
마음 닦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존경에 우쭐하고
비난에 흔들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존경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일이야말로
수행자의 마음 살림살이입니다.
존경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나'라는 상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므로,
중심없는 중심이 딱 잡힌 사람입니다.
참 어렵지만
한번 저지르면 쉽게 행할 수 있고,
또 참 쉽게 할 수 있 지만
한생각 돌이키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며,
그 누구 에게도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수행자와 중생의 차이가
이렇게 작지만 너무도 큰 차이인 것입니다.
크지만 너무도 작은 차이인 것입니다.
수행자와 중생의 차이는
그 차이 없는 차이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