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

[스크랩] 법화경일일법문:만약 사람이 괴로움을 만나....

황령산산지기 2014. 11. 13. 09:24

-법화경유통회-

 

법화경일일법문:만약 사람이 괴로움을 만나....

 

만약 사람이 괴로움을 만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싫어하면

열반(涅槃)을 연설해주어

모든 고제(苦際-괴로움의 경계)를 끝내게 합니다.1-50

 

약인조고 염노병사 위설열반 진제고제

若人遭苦 厭老病死 爲說涅槃 盡諸苦際

 

1-미륵보살이 부처님의 놓으신 광명을 통해 타방의 부처님이 소승의 가르침을 연설하는 모습을, 소승의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가지고 사구게송으로 노래했다.

 

약인조고(若人遭苦)! ()은 선악(善惡)의 업()을 말하고, ()은 소승의 근기를 말하고, ()는 생인(生因-태어나는 원인)을 말하고, ()는 삼계(三界)를 말한다. (고제-苦諦)

 

2-염노병사(厭老病死)! ()은 소승의 가르침을 말한다. 생로병사는 생사(生死)와 노사(老死)와 병사(病死)와 생로병사(生老病死) 이렇게 넷이 있다. 생사는 태어나자 바로 죽는 것. 노사는 태어나 늙어 죽는 것. 병사는 태어나 병으로 죽는 것. 생로병사는 태어나 늙어가면서 병으로 죽는 것이다. (집제-集諦)

 

3-위설열반(爲說涅槃)! 소승은 유여열반(有餘涅槃-소승경전)에 머물고, 보살은 무여열반(無餘涅槃-대승경전)에 머물고, 부처님은 중도열반(中道涅槃-법화경)에 머무신다.

 

장교(藏敎)는 생멸도(生滅道)를 깨달아 열반에 머물고, 통교(通敎)는 무생도(無生道)를 깨달아 열반에 머물고, 별교(別敎)는 무량도(無量道)를 깨달아 열반에 머물고, 우리 원교(圓敎)는 무작도(無作道)를 깨달아 열반에 머문다. (멸제-滅諦)

 

4-진제고제(盡諸苦際)! ()은 끝낸다는 뜻이니 소승의 수행을 뜻하고, ()는 사혹(思惑)을 뜻하고, ()는 견혹(見惑)을 뜻하고, ()는 경계(境界)를 뜻한다.

 

이승석(二乘釋)에 입각해 풀이하면, 방등보살(方等菩薩)은 즉공(卽空)을 깨달아 고제(苦際)를 벗어난다. 반야보살(般若菩薩)은 불공(不空)을 깨달아 고제를 벗어난다. 화엄보살(華嚴菩薩)은 공불공(空不空)을 깨달아 고제를 벗어난다. 법화보살(法華菩薩)은 중도공(中道空)을 깨달아 고제를 벗어난다. (도체-道諦)

 

5-일승석(一乘釋)! 소승의 관점에서 삼계를 가지고 고집멸도에 입각해 관찰하면 온통 괴로움뿐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법화경에서 이르시길, “허접한 삼계의 낡은 것에서 벗어나라.”하심은 소승의 근기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 삼계를 관찰하면, 중생은 삼계를 고()라고 여기나 부처님은 상()에 머무시고, 중생은 삼계의 집()으로부터 괴로움을 받으나 부처님은 락()에 머무시고, 중생은 삼계가 멸()해야 하는 대상이나 부처님은 아()에 머무시고, 중생은 삼계를 닦아야 하나 부처님은 정()에 머무신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부처님이 보는 삼계의 관점은 중생과 다르다.”하시었다.

 

6-고집멸도에 있어 셋이 있다. 첫째 소고(小苦). 소집(小集). 소멸(小滅). 소도(小道). 둘째 중고(中苦). 중집(中集). 중멸(中滅). 중도(中道). 셋째 대고(大苦). 대집(大集). 대멸(大滅). 대도(大道). 이다.

 

7-첫째의 고집멸도는 소승의 가르침이니 무명(無明)이라는 말조차 끌어낼 수 없고, 또 중생을 교화하는 측면에서 매우 인색하여 무시(無始)로부터 만난 부모님과 형제와 중생을 버린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중고와 대고라는 말조차 모를 수밖에 없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소승을 배우려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마라.”하심은 이러한 이유다.

 

8-둘째의 고집멸도는 방편의 대승(大乘)을 가리키니, 방등경전과 반야경전과 화엄경전을 말한다. 그 가르침에 무명이라는 말은 있으나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 깨달음이 있은 뒤에야 구제하려고 한다. 따라서 중도에 가까워 진 것이지 중도를 깨달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고(大苦)라는 말조차 없을 수밖에 없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법화경의 사람들은 내가 설법한 모든 방편의 경전과 외도의 경전을 일체 만날 필요가 없다.”하심은 이러한 이유다.

 

9-셋째의 고집멸도는 법화경을 가리키니, 무명(無明)이 있건 없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화경을 유통(流通)하는 일을 가지고 대고(大苦)를 깨닫는 사람이라 한다. 대고를 깨달을 바에야 대집(大集)과 대멸(大滅)과 대도(大道)를 모두 깨달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부처님이 법화경에서 이르시길, “누가 이곳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유통하겠느냐! 지금 내 앞에서 맹서의 말을 하라.”하심은 이러한 이유다. 이는 법화경을 유통하는 선업(善業)을 짓지 않고 불도(佛道)를 절대로 이룰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이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것이 육바라밀을 가장 잘 닦는 것이니라.”하심도 역시 이러한 이유다.

 

-게송-

 

사람으로 태어나 법화경을 유통하면

생로병사가 바로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열반이라 하랴!

고제(苦際)가 바로 열반인 것은 유통인(流通人)만의 비밀입니다.

 

-보운법사 합장-

 

 

 

출처 : 불교미술이야기
글쓴이 : 보운법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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