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불교의 분류

황령산산지기 2014. 10. 28. 14:51

 

    ▒ 불교의 분류 ▒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통적으로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세 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불교란 어떤 범주에 묶을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해인사의 불상인가, 기와인가? 아니면 팔만대장경인가? 불교란 그런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승, 대승, 선 이라고 구별하는 것 또한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다. 옛날 ,한 스님이 중국의 조주(趙州) 선사에게 물었다.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곧 "불교란 무엇인가?"를 물은 것이다, 그러자 조주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이다." 또 옛날 어떤 스님이 중국 馬祖 선사에게 "부처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마조선사는 이렇게 답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소승이니, 대승이니, 선이라는 것은 실제 없다. 불교란 '참 나'를 깨달아 다른 사람을 돕는 길, 즉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길을 일컫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어렵게 생각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와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중생들을 가르친 것은 '참 나'를 깨달아 남을 돕고 살라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부처님이 주로 초반에 가르침을 펴신 것을 소승불교라 할 수 있다. 소승(小乘)불교의 핵심은 삶이란 언제나 변하며 고통임을 깨닫는 자각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이 어느 정도 이 가르침을 이해한다고 여기자 우리가 현재 대승불교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은 바로 '공'(空) 사상이다. '공'을 깨달은 뒤에는 대자대비를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자대비란 고통 속에서 헤매는 중생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해 내지 못하면 결코 자기 혼자서 영원한 고요와 기쁨의 세계인 열반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큰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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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승과 대승의 가르침이 끝났다고 생각한 부처님은 드디어 선불교(禪佛敎)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처님이 법문을 하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2천5백여 명의 제자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영산(靈山)에 모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고 자리에 앉아 계실 뿐이었다. 제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법문은 언제 시작하시는 거야." "스승님이 오늘 편찮으신 게 아닐까........." 잠시 후 부처님은 한 손에 꽃을 드시더니 높이 치켜드셨다. 모든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면서 이상하다는 듯 오직 부처님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군중들 틈 사이에서 오직 한 제자, 마하가섭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에게 꽃을 건네주며 "법을 너에게 전하노라."고 했다. 마하가섭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법맥의 첫 번째 승계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선(禪)은 이처럼 말이 필요 없이 직접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선불교의 기본적인 차이점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전해 주는 방법이나 기술이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방향과 목적은 우리가 어떻게 참 나를 깨달아 세상에 도움을 주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같다. 소승불교는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 , 즉 에고가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이 '나'라는 것이 떠오를 때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한다는 얘기이다.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선과 악..... 이 모든 상대적인 마음이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것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소승불교는 이런 생각이 일어날 때 법, 규칙, 이론 등이 나온다고 가르친다. 이런 것들이 나오면 이름과 모양(色)이 나오고, 이름과 모양이 나오면 좋고 싫은 것, 오고 가는 것이 나오며,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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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승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이 덧없는 고통의 바다임을 먼저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 그 고통의 세계는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며, 일단 생각이 일어나면 삶과 죽음이라는 상대적 세계가 나온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끊어 상대적 세계에서 영원 불멸의 절대적 세계, 즉 열반을 얻어야 한다. 열반의 세계에는 삶과 죽음도, 오고 감도, 오르고 내림도 없다. 완벽한 평화와 축복만이 있다. 이 완벽하게 텅 빈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소승불교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이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는 '공'(空), 즉 본래 이 '나'라는 것은 없다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이 끝나는 지점에서 곧바로 시작한다. 소승불교가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 공, 열반의 세계에서 끝난다면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종착점인 공(空)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해, 달, 별 모든 것이 그대로 공하며 고통과 행복도 그대로 공하다. 이렇게 따지면 공하지 않은 것이란 없다. 이런 말이 있다. "각각 완전한 존재이며 각자가 일체를 갖추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안과 밖이 따로 없으며, 주체도, 객체도 없다. 우리 자신이 온 우주이며, 온 우주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의 세계'라 부른다. 절대란 '완전한' 것이며,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모든 생각을 끊는다면 '나'라는 것이 없어진다. '나'라는 것이 없으면 우리 마음은 거울과 같이 맑게 된다. 거울은 단지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며 개는 멍멍 짖는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의 세계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완전한 진리의 세계를 얻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늘은 푸르다. 이것은 진리이다. 설탕은 달다. 이것 역시 진리이다. 지금 이 순간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있다.이것도 역시 진리이다. 모든 것이 진리이다. 참선 정진을 통해 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산은 산, 물은 물' 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부처님은 우리가 이 지점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자, '산은 산, 물은 물' 이라는 진리의 세계를 얻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진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이 말은 진리를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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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 실용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중생을 도울 것인가를 의미한다. 대승불교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보고 그런 다음 이생에서 다음 생, 또 다음 생..... 계속 삶을 이어가는 동안 어떻게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도우며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의 삶이다. 순간순간 내 삶은 오로지 중생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선불교는 무엇인가? 선(禪)은 결코 절대니, 상대니 하는 것을 운운하지 않는다. 허무의 세계니, 진리의 세계니, 완전한 세계니 하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선 수행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직접적으로 마음을 탐구해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돕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한 배움에 강조를 두지 않는다. 단지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선 수행은 바로 이 순간 '마음' 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선의 가르침은 항상 우리가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곳으로 돌아온다. 한 순간이 전부이다. 한 순간 안에 모든 것이 있다. 한 순간 안에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있다. 한 순간 안에 올바른 길이 있으며 진리가 있으며 올바른 생명이 있다. 한 순간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또 아무 것도 없다. 만약 내가 순간을 얻는다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선의 가르침이다. 여기에는 마음도, 부처도, 신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니, 마음이 있고 부처가 있고 신이 있다. 모든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선불교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라는 각기 다른 세 가지 불교 전통은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각기 다른 기법들이다. 수박을 예로 들어 소승, 대승, 선의 가르침을 설명해 보자. 여러분이 수박이라는 과일을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다고 치자. 그런데 누군가 여러분에게 '수박이 무엇인가?' 를 물었을 때,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소승불교적 가르침으로 설명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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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씨가 땅에 뿌려지면 가지가 나고 꽃이 피고 둥근 열매가 열린다. 열매가 점점 자라면 푸른빛을 띠고 겉에는 검은 줄이 나 있다. 열매 속은 빨갛고 그 안에는 검은 씨가 박혀 있다. 이것을 다시 땅에 심으면 뿌리가 생기고 잎이 생기고 싹이 터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 이렇게 씨-꽃-열매, 씨-꽃-열매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러한 관점은 시간과 연관되어 있다.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적 가르침은 공간 혹은 모양과 연결되어 있다. '수박은 푸른 껍질과 검은 줄을 갖고 있으며, 약간 무겁다. 서양 사람들은 럭비 공을 연상할 것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축구공을 연상할 것이다. 속은 붉고 부드러우며 달지만, 겉은 딱딱하고 껍질 맛은 쓰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 진리를 보는 관점은 이처럼 공간, 즉 모양과 연관되어 있다. 색깔이 어떻고 무게가 어떻고 맛이 어떻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공(空)하다. 이에 비해 선의 가르침은 어떨까. 선의 가르침은 보다 더 직접적이고 쉽다. 이해나 설명이 필요 없고 그냥 '먹어보면 된다.' 칼을 들고 수박을 잘라 바로 먹는 것이다. 목마름 이웃에게 수박 조각을 건네주는 것이다. '여기 있다. 먹어라.' 어떤 말이나 단어, 수백 권의 책, 수백 가지 법문도 수박을 한입 깨물어보는 것 이상의 가르침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선불교의 기본이다. 실제로 수박을 한입 깨물어보면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다. '와아아아! 맛있구나.' 하는 그 경험. 맛을 보는 그 순간 수박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이렇게 얻는 것이야말로 나의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이처럼 선의 가르침은 단어나 말 혹은 경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 문자에서 가르치는 진리, 즉 마음만을 전할 뿐이다. 수박을 맛보는 일은 아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선의 가르침은 특별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 좋은글 중에서 -

출처 : 고운남고운여
글쓴이 : 팽이돌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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