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활기차고 긍정적인 사람이 큰 사건·사고에 취약하다

황령산산지기 2019. 3. 30. 09:58



단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간접적인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다. 픽사베이 제공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간접적인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다. 픽사베이 제공


직접 충격을 받아야만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지만, 어떤 경우엔 간접 체험만으로 우울, 불안 수위를 높이고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준다. 이를 간접 트라우마(vicarious trauma)라고 한다.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 인류애를 잃게 만드는 끔찍한 범죄 등 많은 사건들이 단지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입힌다. 어떤 사람들이 간접적인 트라우마에 더 취약할까?

201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향하는 여객기가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면서 탑승자 298명 전원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 상당수가 네덜란드인이었고 이 사건은 당시 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큰 화제가 됐다고 한다.

때마침 네덜란드 흐로닝언대의 심리학자 버투스 제로니머스 교수 연구팀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정신건강 상태에 관한 연구를 진행중이었다. 참가자들은 한 달 간 매일 하루에 세 번 씩 정서 상태와 신체적 건강 상태를 보고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여객기 격추 사건이 일어났다. 원래의 연구 목적에는 없었지만,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닌 현재 진행형인 트라우마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사건 전 후를 기준으로 사람들의 정서 상태를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우선 사건 발생 전에 비해 발생 후 참가자들의 긍정적 정서(활기참, 즐거움)는 다소 감소하고 부정적 정서(짜증, 슬픔)는 증가한 경향이 나타났다. 100점 만점에서 3점 정도의 작은 변화였지만,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큰 사건사고가 사람들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며 간접적인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나아가 연구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간접 트라우마에 취약한지 살펴봤다. 연구자들은 다섯가지 기본 성격 특성 중 ‘신경증(부정적 정서성, 부정적 단서에 민감·예민하며 기본적으로 걱정과 불안이 많은 특성)’이 높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간접 트라우마에 취약할 것으로 예상했다.

 

신경증이 높은 사람들이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 후 정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신경증이 높은 사람들이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 후 정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하지만 흥미롭게도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신경증이 높은 사람들이 낮은 사람들에 비해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 후 긍정적 정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거나 ‘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긍정적이고 활기찬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긍정적 정서가 ‘많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에 대해 연구자들은 신경증이 높은 사람들은 어쩌면 본인이 겪은 위험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타인’이 겪은 위험에 대해서는 되려 둔감한 것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자신을 향한 위험에 주의를 곤두세우느라 조금 멀리 떨어진 위험까지 신경 쓸 에너지는 없는 것일까?

다른 가능성으로는 타인의 괴로움에 지나치게 공감하는 경우 공감적 과각성(empathic arousal)이 나타나 번아웃을 겪게 된다. 따라서 되려 공감을 ‘덜’ 하게 된다는 연구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신경증이 높은 사람들의 경우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을 접하면 과각성이 일어나 애써 이를 무시하고 그 결과 비교적 평온한 감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외향성이 긍정적 정서 감소와 관련을 보인 것에 대해서 연구자들은 이들이 사회 활동을 더 활발히 하므로 사건의 디테일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과 많은 시간 이야기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역시 추측이므로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참고로 간접 트라우마가 대중적인 수준에서 발생하는 예는 크게 두 가지 사례로 나뉜다. 예를 들어 대통령, 유명 정치인, 사상가, 지도자, 연예인 등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의 죽음이 하나이고 부정 부폐 사건이나 비행기 추락, 테러 같은 사회가 어느 정도 공정한 룰과 예측 하에서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과 안전감을 앗아가는 사건들이 나머지 하나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가져오는 사건들은, 이를 직접 경험한 사람은 소수라고 해도, 그 사건을 접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그리고 그 충격을 기반으로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변화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예컨데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았거나 부정부패 등으로 인해 큰 인명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이제라도 법규를 가다듬고 책임을 엄히 물자는 여론이 커지는 등 집단적인 트라우마가 결과적으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한국의 경우 세월호 사건이나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는 추악한 성폭력 사건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 같다. 충격을 원동력으로 사회를 바꿔나가되, 충격에만 잠식되지 않게끔 하는 마음 관리가 중요할 것이다.


박진영 심리학 칼럼니스트